•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버마] 다시 ‘버마’는 잊혀진다

476
등록 : 2003-09-17 00:00 수정 :

크게 작게

[아시아의 분쟁 | 버마]

국제사회에 기댄 혁명전선엔 먹구름만 잔뜩… 영양가 없는 ‘로드맵’만 나돌아

“아웅산 수치를 석방하지 않으면 버마를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에서 축출해야 한다.”

외세 개입을 성토하는 데 선봉장 노릇을 했고 아세안의 이른바 ‘불간섭정책’ 신봉자였던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나왔다. 1989년 랑군의 봄 이후 경제봉쇄 속에서도 버마의 최대 투자국 가운데 하나였던 게 말레이시아였고, 아시아 최고정치가 가운데 버마군부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마하티르의 말은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경제봉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버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원칙이지만, 힘들다면 타이의 로드맵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 타이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차기 마하티르’를 꿈꾸는 타이 총리 탁신 시나와트라도 뒤질세라 로드맵을 들고 나왔다. 타이 사회 내부는 물론 버마 민주혁명 세력들 속에서도 “타이의 인권문제를 함부로 다룬 독점적인 권력가 탁신이 버마 민주화에 나설 자격이 있느냐”며 탁신의 로드맵을 고깝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사진/ 버마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아웅산 수치. 지난해 12월 친주 방문 때의 모습.
“버마 문제는 버마 내부에서 해결한다.” 방콕을 방문한 버마 외무장관 윈 옹은 무뚝뚝하게 되받았다. 그리고 새로 총리직을 꿰찬 킨년트 장군은 지난 8월30일 ‘국가 안정, 민족화해, 헌법개정, 현대국가 건설’이라는 4대 정치적 목표와 민족대표자 회의 재소집을 비롯한 7개항 정치적 프로그램을 담은 버마식 로드맵을 발표했다. 군사정부의 로드맵은 1988년 이후 줄곧 이야기해온 내용들을 재탕하며 말만 바꿔놓아 신선함이 없는데다, 핵심이 되어야 할 민주화 시간표 대신 신뢰성 없는 ‘점진적’(step by step)이라는 표현들로 채워져 있다.

“이제 버마가 로드맵을 지녔으니 타이 로드맵은 없던 일로 하겠다.” 아무튼 탁신 총리는 다음날 곧장 자신의 버마 민주화용 로드맵을 철회했다.

지난 5월30일 아웅산 수치 구금 뒤부터 동남아시아는 버마를 놓고 전에 없던 관심을 보였고 국제사회도 경쟁적으로 달려들었다. 미국 정부는 곧장 경제봉쇄를 취했고 유럽연합과 아세안, 일본은 물론 놀랍게도 중국까지 가세해 버마 군부를 난타하며 아웅산 수치 석방을 요구했다. 일찍이 볼 수 없던 일이었다. 국제사회 장단에 맞춰 버마 국경지대의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도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해방혁명 단체들의 결집체인 버마연방민족회의(NCUB)는 성명서를 통해 국제사회의 개입을 촉구했다. 그러나 버마연방민족회의가 지나치게 빨리 속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안팎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시민들만 괴롭게 만들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버마 개입은 인정할 수 없다.” 중국 국경쪽 버마공산당(CPB) 서기장서리 옹 텟은 곧장 반발하고 나섰다.

“불쾌하다. 우리가 나서서 미리 외세 개입을 환영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지켜보기만 해도 좋은 시점인데.” 버마 혁명 지역에서 뉴스 에이전시를 꾸려가고 있는 옹 나잉 편집장은 간도 쓸개도 다 내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떠오른다며 해방혁명 세력들의 전략적 미숙함을 탓했다.

한번쯤 소리 꽥 질러보는 국제사회

이런 상황에서 9월2일 또 다른 로드맵이 등장했다. ‘버마연방 재건을 위한 로드맵’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로드맵은 카렌민족연합(KNU)를 비롯한 8개 소수민족 무장해방투쟁 세력들의 연합전선체인 민족민주전선(NDF)과 카레니민족진보당(KNPP), 그리고 버마 내부의 10개 소수민족 정당연합체인 민주연합민족동맹(UNLD)이 참여해, 말 그대로 버마 내 모든 소수민족 해방세력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사진/ 지난해 6월 마궤학교 방문 때 아이들과 기념촬영.
이 로드맵은 ‘연방 위기의 평화적 해결, 정치적 대화를 통한 해결, 시민 의지 존중, 연방 시민의 권리보호와 인정, 모든 소수민족들의 언어·종교·문화 보호와 인정, 연방의 헌법적 권리보호와 인정’이라는 6대 원칙 아래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NLD)을 비롯해 1990년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들과 현 군부 최고권력기구인 국가평화개발회의(SPDC), 그리고 소수민족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3자회담에서부터 마지막 국민투표와 총선까지를 4개년 계획표에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로드맵도 찬찬히 뜯어보면, 국제사회의 중재에서부터 인도주의 지원에다 사회개발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로그램을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인상을 풍기면서 논쟁 여지를 남겨놓았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아웅산 수치가 길고 짧은 구금을 여러 차례 당할 때마다 국제사회는 한번쯤 소리 질러보고 마는 일을 되풀이해왔다. 이번에도 또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갑작스레 로드맵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것뿐이다. 군사정부 것이든 소수민족 것이든, 그 로드맵이 50년 묵은 버마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만.

아웅산 수치가 갇히고 벌써 석달 보름이 지났지만 버마 군사정부는 까딱도 없고 국제사회는 어느덧 버마를 잊어가고 있다. 이런 국제사회에 기댄 버마 혁명전선에는 전에 없던 먹구름이 깔려 있고, 간간이 고개를 내미는 ‘태양’에 울고 웃는 이들의 애달픈 표정들이 스쳐지나간다. 길 잃은 민주혁명, 갈 곳 없는 민족해방투쟁. 2003년 9월 버마전선의 모습이다.

버마-타이 국경= 정문태 |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