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의 반란 속에 등산객 뚝… 미·영·중이 네팔군 도우며 ‘국제전’ 비화
지난 1월 마오이스트 게릴라와 정부가 ‘신뢰’를 선언하고부터 3차례에 걸쳐 평화회담을 열어 그 신뢰를 측정하기 위한 실행법에 동의할 때만 해도, 시민들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기간에 쌍방은 걸핏하면 실행법을 위반했고 80명이 살해당해 휴전협정을 무색케 했지만, 그래도 시민들은 이전보다 낫다는 한줄기 인내심을 버리지 않았던 기억도 있다.
분쟁의 뿌리, 네팔 왕실
결국 반쪽자리 휴전협정이 일곱달 만에 깨지자, 네팔 사회는 더 격렬한 분쟁과 불확실성 속에 빠져들었다. 휴전이 깨진 8월27일부터 단 1주일 만에 다시 100여명을 웃도는 이들이 살해당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처음부터 이 모든 일들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지만, 폭동 종결을 열망해온 네팔 국민 2300만명은 모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지난 8년 동안의 분쟁으로 가뜩이나 어렵던 국가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최대 현금수입원이었던 관광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수십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중동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사실 그동안 단 한명의 등산객도 해코지당한 적이 없고,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은 절대로 등산객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지만, 정치적 불안정과 폭동 뉴스는 관광객들을 쫓고 말았다. 국가경제나 마을단위 경제나 모두 관광산업에 의존해온 네팔은 관광객 상실이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며 빈곤에 빈곤을 재촉했고, 결국 그 빈곤이 분쟁을 격화시키는 밑감이 되면서 악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네팔의 빈곤과 불평등 그리고 분쟁의 뿌리는 모두 민주화 약속을 무시한 왕실에서 비롯됐고, 네팔공산당(NCP-Maoist)은 시민들의 깊은 좌절감을 동력 삼아 태어났다. 농업기술자였던 프라찬다와 도시계획자 바부람 바타라이 박사를 중심으로 좌익운동가들과 1990년 민주화운동 뒤 선출되었던 국회의원들이 지도부를 형성한 마오이스트는 페루 공산주의 운동인 ‘빛나는 길’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들은 한계를 드러낸 네팔식 입헌군주제를 뒤엎고 인민공화국을 건설해 마오쩌둥의 불완전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임명권과 선거를 통해 보호받는 이른바 ‘봉건 반동계급’들에 환멸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결국 “남은 것은 무장투쟁뿐”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1996년 2월, 교통이 전혀 없는 중서부 지역 산골 경찰지서를 공격함으로써 무장혁명투쟁 깃발을 올린 마오이스트 게릴라는 악질들을 혼내주고 선을 복구하는 ‘로빈후드’를 현실에 부활시켰다. 그리고 2000년에 접어들면서 카트만두의 부정부패와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는 사이 마오이스트 게릴라는 네팔 전 지역에서 성원을 얻었다. 이에 놀란 정부가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이 똬리 튼 중서부 지역들을 거칠게 몰아붙이자 오히려 수많은 주민들이 마오이스트 게릴라에 손을 내밀었고, 마오이스트는 경찰에게서 노획한 무기들로 무장하고 주민들에게 혁명세를 거둬들이며 점점 프로페셔널 게릴라로 성숙해갔다.
그러던 2001년 1월1일, 디펜드라 왕자가 왕실 살해극을 벌이면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져들자 마오이스트는 곧장 정부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마오이스트는 겉치레 협상으로 상호 ‘신뢰’를 구축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날’을 준비했다.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은 2001년 11월 마침내 네팔정부군(Royal Nepal Army) 기지를 공격하면서 일방적으로 휴전을 깨뜨렸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져나갔다.
게릴라들이 기댈 곳은 인디아뿐!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에게 분쟁을 맡긴 채 전면에 나서지 않던 군이 결국 구두끈을 졸라매기 시작했고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정부는 용맹스러운 굴카 군인들을 동원해 마오이스트 게릴라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험악한 히말라야 지형에서 같은 형제인 게릴라를 쫓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게다가 1816년 네팔-앵글로 전쟁(Anglo-Nepal War) 뒤 싸워본 경험이 없는 정부군은 헬리콥터를 비롯한 기동장비들마저 부족해 제대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결국 난처해진 네팔 정부에게 미국과 영국, 인도와 심지어 중국까지 무기를 지원해 히말라야 산골 분쟁은 차츰 ‘국제성’을 덧칠해가며 복잡한 꼴로 변질되고 있다.
히말라야 왕국 네팔의 마오이스트 반란은 특히 국경을 맞댄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중국 언론들이 네팔 분쟁을 보도하면서 결코 ‘마오이스트’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만 봐도, 중국이 이 분쟁을 얼마나 성가시게 여기는지 잘 드러난다.
“중국은 네팔 왕실과 정부가 벌이는 무장 반정부세력 축출을 지원한다.” 지난해 갸넨드라 국왕이 베이징을 공식 방문했을 때 장쩌민은 네팔 마오이스트 게릴라에게 ‘대못’을 박았다.
그러나 네팔 마오이스트에게 장쩌민의 발언은 아무런 압력이 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인도 마오이스트와 ‘동지’ 관계를 맺고 출발한 네팔 마오이스트에게 마오의 고향 중국은 안중에도 없었던 탓이다. 네팔 마오이스트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동부주들을 발판 삼아 혁명투쟁을 벌이고 있는 인도 마오이스트로부터 지원받으며 국경을 넘나들었으니.
이렇게 국제적 압박과 정부군의 공세 강화로 현재 마오이스트 게릴라는 상당히 움츠러든 모양새다. 게다가 정보전과 선전전이 치열해지면서 마오이스트 게릴라는 마을단위 투쟁에서 반감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해 초기 자신들을 지원하며 동력을 제공했던 ‘민심’을 잃는 치명타를 입었다. 그렇게 해서 재조직과 재무장이 시급했던 마오이스트는 지난 1월 결국 휴전협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오이스트는 입헌군주제를 명시한 1990년 헌법 개정을 위한 개헌의회 선거라는 정치적 해결책을 주장하고 있다. 마오이스트는 특히 최고사령관을 겸직한 국왕이 지배해온 정부군을 시민정부 아래 두어야 한다는 원칙과 모든 정치적 개혁이 빈곤층과 소수를 위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걸고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각 정당은 국왕을 성토한다
그러나 마오이스트와 정부 사이의 제3차 협정이 마오이스트의 개헌의회 선거 요구와 정부의 예산지출 거부로 깨지자, 네팔 사회는 다시 심각한 논쟁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군사적 해결책은 없다’고 믿어온 시민사회와 일부 정당들이 나서 마오이스트의 개헌의회 요구 수용이 불가능한 장애물이 아니라며 정부를 타박하자, 정부는 개헌 없이도 마오이스트의 요구를 수용하고 실행할 수 있다고 맞받아쳐 서로 불신감만 깊어져버린 꼴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들은 정부와 마오이스트 사이의 평화협상 과정 참여를 거부해버렸다. 각 정당들은 2002년 10월 선출한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 총리를 퇴짜놓은 갸넨드라 국왕이 전면적인 권력장악을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한 탓이다. 최근 국왕은 발뺌하며 각 정당들과 협상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태해결을 강조했지만, 이미 틀어진 정당들은 의혹의 눈길만 보내고 있다.
국왕이 임명한 우익 정치가들과 테크노크라트들이 꾸려가는 정부가 고집스레 기득권을 주장하는 카트만두 거리에는, 지금 국왕을 성토하는 정당들이 쏟아져나와 있다.
히말라야에서 조난을 당하기라도 하면 영영 돌아오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아는 시민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정치적 조난만은 막아야 한다며 애간장을 태우고 있으나, 아직도 히말라야 분쟁 해결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그 길은 어디로 나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길도 지도도 없는 막막한 히말라야 산악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들 사이에는 국왕이 마오이스트를 격리시키기 위한 사술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불만이 높아갈 뿐이다.

사진/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파괴된 산페 바갈 공항(왼쪽). 게릴라 추격전에 나선 네팔 정부군(오른쪽). 8년간의 분쟁 속에 네팔 관광산업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네팔리 타임스)
지난 8년 동안의 분쟁으로 가뜩이나 어렵던 국가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최대 현금수입원이었던 관광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수십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중동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사실 그동안 단 한명의 등산객도 해코지당한 적이 없고,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은 절대로 등산객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지만, 정치적 불안정과 폭동 뉴스는 관광객들을 쫓고 말았다. 국가경제나 마을단위 경제나 모두 관광산업에 의존해온 네팔은 관광객 상실이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며 빈곤에 빈곤을 재촉했고, 결국 그 빈곤이 분쟁을 격화시키는 밑감이 되면서 악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사진/ 지난 8월27일 휴전협정이 깨지면서 네팔은 다시 불안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평화시위에 나선 동자승.(네팔리 타임스)

카트만두= 쿤다 딕시트(Kunda Dixit) | <네팔리타임스> 편집인 겸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