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농장주들 불법적 ‘포도주 임금’ 지속… 알콜중독·저체중 태아 등 사회문제 양산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로 편입되어 350년 넘게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지탄을 받아왔던 남아공화국의 소수백인 정권은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역사의 무대 뒷전으로 물러앉았다. 그로부터 9년간 정치적 격변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남아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프레토리아, 케이프타운 등 주요 도시에서 만난 백인의 상당수는 흑인 다수정권의 출범 이후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정치 상황에 노골적인 불만과 불신을 표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현재 옴베키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는 다수의 흑인들에게 정치·경제적 힘을 싣기 위한 정책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들은 백인들이 수백년간 누려왔던 기득권과 주도권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백인들은 흑인정부의 정책에 완강히 저항하며 공공연히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백인들은 자신들이 수세기 동안 구축해온 억압과 왜곡의 기형적 사회구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력의 이양과 새로운 정치주도 세력의 등장으로 제도적인 인종차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 몰라도 인종간 뿌리깊은 불신과 감정의 간극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을 듯했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습 ‘돕시스템’
무지개처럼 조화로운 다인종사회를 추구하는 남아공화국 사회에서 인종격리 정책 실시 당시의 인권유린과 노동력 착취의 어두운 면들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어 불평등한 사회적 단층구조를 극복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이러한 인권유린과 노동력 착취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돕시스템(the dop system)이다. 포도농장에 고용된 흑인노동자들에게 급여 대신 싸구려 포도주로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는 악습이다. 통상 하루의 노동력 제공에 대한 대가로 1ℓ 정도의 싸구려 포도주를 준다. 이는 단순히 포도주 생산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낮추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노동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된다. 돕시스템이 남아공화국에 뿌리내린 것은 토지소유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대규모 포도농장을 소유한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흑인 노동력의 저렴한 임금구조를 이용하여 포도주를 생산해낸다. 포도주 농장의 인권유린과 노동착취가 돕시스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비행을 저지른 노동자에 대한 가차없는 채찍질을 일컫는 ‘샴보킹’(sjambokking), 보호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농약을 살포하는 데 노동자들을 동원함으로써 농약중독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등 아름답기 그지없는 포도농장의 이면에 실존하는 노동조건은 이처럼 열악하다. 게다가 정부 당국의 정책에 뿌리깊은 불신감을 품고 있는 농장주들은 모잠비크나 짐바브웨 등 인접 아프리카 국가에서 남아공화국으로 밀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암암리에 고용함으로써 종종 물의를 빚기도 한다. 포도주산업은 남아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으로, 200여 포도주 제조업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포도주 제조업의 연간 매출액이 1999년 기준 17억달러로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남아공화국은 양질의 포도를 생산해내는 데 적합한 토양, 온화한 날씨, 적절한 강우량 등 필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성장 잠재력이 크다. 특히 포도수확기가 1월 말부터 3월 중순에 이르는 기간이라서 주요 포도생산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북반구 나라들에서 생산된 포도와 중복되는 시기에 시장출하를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종격리 정책을 종식하고 들어선 흑인정권은 돕시스템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법안의 통과가 아니라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제도적·구조적 체계와 수단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포도재배농장에서 돕시스템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아직도 약 10% 정도의 포도농장에서 불법 사례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돕시스템의 지속 정도는 지역마다 어느 정도의 편차를 보인다. 포도 산지로 유명한 웨스턴 케이프 지방은 20% 정도의 노동자들이 저급의 포도주로 급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돕’철폐 법률도 무시… 노숙자 양산하기도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권리와 노동조건의 실상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도 돕시스템의 완전한 철폐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포도농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문맹이나 학력수준이 지극히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자신들의 역량을 결집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전국적 규모의 노조가 제대로 틀을 갖추지 못해 문제해결을 위한 주체 당사자들로서 노동자들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돕시스템이 낳은 대표적인 사회문제로 알콜중독, 빈곤의 악순환, 결핵과 에이즈 등 질병의 만연, 영양부족이 주로 거론된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포도농장에 고용된 여성들은 임신기간에 음주를 일삼는 비율이 일반인보다 현격하게 높다. 이로 인해 신생아의 체중 미달, 태아알콜증후군(FAS) 등이 널리 퍼져 공중보건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포도농장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태아알콜증후군에 시달리는 비율이 11%로 보고되기도 했다. 이는 세계최고 수준이다. 알콜중독으로 파생되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등의 사회문제도 심각하다. 이들의 종착역은 대부분 대도시의 길거리이다. 실제로 케이프타운 시내 노숙자들의 상당수가 돕시스템이 양산해낸 노동자들로 파악되고 있다.
백인소수 정권 시절 남아공화국산 제품의 불매운동을 주도했던 시민운동단체들은 흑인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남아공화국산 제품의 구입 행위를 남아공화국의 신정부에 대한 지원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풍미했었다. 그러나 돕시스템의 지속은 남아공화국산 포도주에 대한 수출경쟁력을 높여주는 반면, 노동자들을 빈곤과 절망의 나락에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모순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의 압력단체는 물론 남아공화국의 양심적인 학자, 시민운동가,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주축이 되어 돕시스템 철폐를 위한 조직들을 형성해 활동 중이다. 대표적인 비정부기구인 돕시스템철폐협회(The Dopstop Association)가 1997년에 결성되어, 돕시스템의 완전한 철폐와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전면에 나서고 있다.
돕시스템철폐협회는 특히 웨스턴 케이프 지방의 포도농장에서 돕시스템의 완전철폐를 주목적으로 결성되었으나, 지금은 돕시스템이 남긴 사회문제들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도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포도농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안 모색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활동 중 주목받는 것은 이해당사자인 농장주와 노동자들을 문제해결을 위한 주체로서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돕시스템의 완전종식은 물론 더 나은 노동조건의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흑인 노동자의 고혈을 짜낼 건가
남아공화국의 포도주 생산업자들은 1990년대 들어서 내수보다는 수출에 주력해왔다. 자국산 포도주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온 결과 비교적 폭넓은 시장과 애호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포도농업은 포도생산과 포도주제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크다. 포도농업과 직결된 산업이 관광산업이다. 케이프타운을 비롯한 남아공화국 관광 일정에서 대표적인 포도생산지인 스텔렌보쉬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화국의 포도주업계가 돕시스템과 이로 인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눈감고 있거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 한 남아공화국산 포도주는 ‘흑인 노동자의 고혈’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케이프타운(남아공화국)=양철준 전문위원 YANG.chuljoon@wanadoo.fr

사진/ 남아공의 한 포도농장. 아름답기 그지없는 포도농장의 이면에는 살인적 노동조건이 있다.(GAMMA)
무지개처럼 조화로운 다인종사회를 추구하는 남아공화국 사회에서 인종격리 정책 실시 당시의 인권유린과 노동력 착취의 어두운 면들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어 불평등한 사회적 단층구조를 극복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이러한 인권유린과 노동력 착취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돕시스템(the dop system)이다. 포도농장에 고용된 흑인노동자들에게 급여 대신 싸구려 포도주로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는 악습이다. 통상 하루의 노동력 제공에 대한 대가로 1ℓ 정도의 싸구려 포도주를 준다. 이는 단순히 포도주 생산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낮추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노동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된다. 돕시스템이 남아공화국에 뿌리내린 것은 토지소유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대규모 포도농장을 소유한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흑인 노동력의 저렴한 임금구조를 이용하여 포도주를 생산해낸다. 포도주 농장의 인권유린과 노동착취가 돕시스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비행을 저지른 노동자에 대한 가차없는 채찍질을 일컫는 ‘샴보킹’(sjambokking), 보호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농약을 살포하는 데 노동자들을 동원함으로써 농약중독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등 아름답기 그지없는 포도농장의 이면에 실존하는 노동조건은 이처럼 열악하다. 게다가 정부 당국의 정책에 뿌리깊은 불신감을 품고 있는 농장주들은 모잠비크나 짐바브웨 등 인접 아프리카 국가에서 남아공화국으로 밀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암암리에 고용함으로써 종종 물의를 빚기도 한다. 포도주산업은 남아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으로, 200여 포도주 제조업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포도주 제조업의 연간 매출액이 1999년 기준 17억달러로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남아공화국은 양질의 포도를 생산해내는 데 적합한 토양, 온화한 날씨, 적절한 강우량 등 필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성장 잠재력이 크다. 특히 포도수확기가 1월 말부터 3월 중순에 이르는 기간이라서 주요 포도생산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북반구 나라들에서 생산된 포도와 중복되는 시기에 시장출하를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종격리 정책을 종식하고 들어선 흑인정권은 돕시스템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법안의 통과가 아니라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제도적·구조적 체계와 수단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포도재배농장에서 돕시스템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아직도 약 10% 정도의 포도농장에서 불법 사례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돕시스템의 지속 정도는 지역마다 어느 정도의 편차를 보인다. 포도 산지로 유명한 웨스턴 케이프 지방은 20% 정도의 노동자들이 저급의 포도주로 급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수확한 포도와 이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들고 있는 노동자들(왼쪽). 포도를 다듬고 있는 흑인 노동자들(오른쪽). 급여 대신 싸구려 포도주를 주는 ‘돕시스템’이 여전히 문제다.(GAM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