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상트페테프부르크시 전경(아래). ) 지난 10월7일 저녁 7시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소도시 푸슈킨시와 파블로프스크시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 러시아식 레스토랑 ‘파드보리예’. 이 식당에 베르비츠카야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 등 학계 인사와 게르기예프 마린스키 극장(옛 키로프 발레단) 단장 등 지역 예술계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도 이 모임은 지역 내 학계, 예술계 인사들의 조그만 만찬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금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야코블레프, 세르게이 이바노프 국가안보회의 서기와 알렉산드르 볼로쉰 크레믈 행정실장이 합류하자 모임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를 기다렸던 이들은 “생일 축하한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바로 이날은 만 48살이 된 푸틴이 대통령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맞은 생일이었다. 그런 만큼 주변의 축하와 선물공세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돼왔다. 이같은 분위기를 사전에 묵살하듯 푸틴은 당정의 고위관료들에게 일체의 축하행위와 선물공세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고, 아예 이같은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생일 전날 수도를 ‘무단가출’하고는 돌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사전 경고에 걸맞게 이날 갑작스레 열린 푸틴의 생일잔치는 매우 조촐하게 치러졌다. 생일선물들도 소박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은 푸틴에게 학교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를 선물했고, 법학부 학장은 학부의 상징인 ‘아기 곰’이 새겨진 기념배지만을 선사했을 뿐이다. 야코블레프 시장조차 푸틴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이날 모임을 통지받았을 만큼 푸틴은 극히 비밀리에 행동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전형적으로 KGB 출신다운 행동이라 묘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일잔치에까지 행동을 조신하는 데는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는 ‘지역주의’ 원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비슷한 예는 지난달에도 연출되었다. 원래 9월 중순으로 예정되었던 푸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식방문이 지난 8월의 모스크바 테러사건 및 잠수함 침몰 사건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무기한 연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푸틴이 러시아 중앙정치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소외시키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현지의 정치평론가들은 귀띔한다. 이를 입증하듯 푸틴 자신은 상트페테르부르크행에 매우 신중하지만 주변 참모진들은 자주 고향을 방문하곤 했다. 푸틴의 생일에 맞춰 다른 업무를 핑계로 세르게이 스테파쉰 연방회계원장과 아나톨리 추바이스 국영전기회사 회장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땅을 밟았다. 지난달 하순에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부에서 60주년 기념학회가 개최되었을 때 동문 출신 장관들인 일리야 유자노프 반독점 장관 등이 동문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푸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태도를 종합하면, 비교적 정치적 색깔을 덜 띠는 학술, 문화 등의 주요행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러시아 지성의 중핵의 위치를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차지하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같은 전망에 비춰볼 때 애초 이달 초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철학부에서 개최하려 했다가 푸틴의 일정에 맞춰 12월 중순에 개최될 예정인 ‘21세기 러시아에서의 시민사회형성의 가능성과 그 전망’이라는 주제의 학계-정계 공동포럼에 과연 그가 참석할 것인지, 그리고 이와 병행해 상트페테르부르크시를 공식방문할 것인지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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