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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샌프란시스코에 무지개 뜬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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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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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세계 | 미국

정치적 현안으로 부각된 6월 게이 퍼레이드… 항문성교 구속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도 나와

해마다 6월이 되면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는 무지갯빛 깃발들이 나부낀다. 그리고 마지막 일요일엔 화려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지난 6월29일 서울로 치면 남대문에서 시청 앞에 이르는 길인 마켓가(Market St.)에 7만5천명 정도가 모여 게이의 자존심을 기념하는 행진을 펼쳤다.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 전, 조금 쌀쌀한 날씨에 시작했지만 4시간 가까이 180여개 팀이 참여한 퍼레이드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날씨 또한 화창해졌다. 흔히 말하는 ‘게이 퍼레이드’는 ‘LGTB Pride 축제’라고 해야 정확하다. ‘게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보다 ‘Lesbian, Gay, Transgender and Bisexual’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로 지적된다. 퍼레이드는 미국 전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지만 샌프란시스코가 게이문화의 중심지라서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다.

사진/ 게이들의 결혼할 권리를 주장하는 긴 행렬. 일부 참가자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이미 동성결혼권리가 인정되었음을 상징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게이 인권, 결혼의 권리로?


더구나 올해는 퍼레이드 며칠 전에 나왔던 미 대법원의 판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5년 전 텍사스주 경찰이 자기 집 침실에서 섹스하는 두 남성을 현장에서 체포한 행위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정상적인 성교에 관한 법’(sodomy law, 어떤 주에서는 구강과 항문성교를 포함한다)에 제동을 건 것이다. 미국 언론은 이제 비로소 게이들도 헌법에 따른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크게 보도했다. 또 게이 인권의 획기적 개선이 앞으로 결혼의 권리로 이어질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미국 내에는 미주리·오클라호마·캔자스·텍사스 4개 주와 푸에르토리코에 동성애자들에게만 적용하는 법이 있고, 다른 9개 주에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 모두를 규율하는 법이 있다. 이 법은 거의 등장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일단 적용되면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이들에게 심각한 사회적 불이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정치·사회적인 뜨거운 감자로 남아왔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동거인(domestic partner)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주 하원의회 법안 AB205가 지난달 통과돼 현재 상원의회 심의를 앞두고 있으며, 관련 정부기관에서도 공청회를 여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올 퍼레이드는 여느 해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끌어모았고, 정치적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직업, 지역, 학교, 종교와 교파, 국적과 인종, 취미와 경력, 나이와 성 등을 초월해 게이의 인권에 관심을 보였고, 또한 강조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물론, 차기 선거를 염두에 둔 정치인, 시민단체 활동가, 경찰과 소방관, 후원과 협찬 회사 직원들까지 갖가지 치장을 하고 피켓을 들고 즉석 모금활동을 벌이고 홍보물을 돌렸다. 특히 미국 기업들의 관심은 남다르다. 2001년 기준으로 미국에는 많게는 1450만명에 이르는 게이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기업들의 핵심 고객으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하비 밀크의 저격, 그리고 희망

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 즉 퍼레이드를 통해 외치고자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인권이다. 올해 주제인 “그들에게 희망을!”을 외쳤던 하비 밀크(Harvey Milk)는 자신이 게이임을 처음으로 드러낸 공직자였으며, 25년 전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이었던 조지 모스콘(George Moscone)과 함께 시청 건물 안에서 게이 혐오자에 의해 저격당했다. 이 사건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들이 게이의 인권 문제에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유달리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게이의 인권 개선에 앞장서는 이유다.

‘게이’(gay)라는 말은 본래 ‘명랑하다’, ‘즐겁다’, ‘쾌활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남성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의미가 확대됐다. 다양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축제는 게이의 본뜻에 가장 걸맞게 시끌벅적하고 신나게 치러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글·사진 박여라/ 자유기고가 iris649929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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