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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주검없는 살인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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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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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실종된 아내를 살인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 심증만으로 유죄판결 가능할까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뒤 15년 동안 아무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죽은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오직 그가 사라졌다는 것뿐이다. 영원한 미궁일 것 같던 이 사건은 지난 겨울 지금은 재혼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남편이 체포되면서 새로운 막을 열었다. 죄명은 살인 및 사체유기. 그러나 이 재판은 통상적인 가정불화 참극과는 다르다. 단 하나의 물적증거도 없이 오직 정황증거만, 즉 심증만으로 기소된 것이다. “시체도, 어떠한 법의학적 증거도, 살인흉기도, 혈흔도 그리고 지문도 없는”(지방검사 스티븐 사라코), 그리고 덧붙인다면 살인현장조차도 없는 기이한 살인사건 재판이 지난 10월 초부터 뉴욕에서 열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비행기를 탄 것이 증거의 전부

뉴욕의 센트럴파크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던 게일 카츠-비에른바움이라는 29살난 여의사가 실종된 것은 지난 85년 7월 초이다. 게일은 지갑, 열쇠는 물론 상복하던 약까지도 모두 집안에 남겨둔 채 실종됐다. 남편과의 불화가 심했지만 그것뿐이었고 수사는 종결됐다. 그뒤 게일의 가족들은 끈질기게 재수사를 요청했고 10여년이 지난 다음 남편(당시 30살)이었던 비에른바움이 사건 당일 저녁 인근 에섹스 카운티 공항에서 개인용 경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2시간 동안 비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됐다. 급기야 검찰은 “비에른바움이 게일을 살해한 뒤 사체를 경비행기에 싣고 대서양에다 버렸다”며 살인죄로 기소했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모두 심증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심증뿐임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사실, 주검없는 또는 물증없는 살인사건의 유죄판결이 미국에서 처음은 아니다. 영미법에서는 이미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하나의 판례로 확립된 이래 심증은 피의자를 사형대로 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사건과 유사한 사건으로 1957년 레오나드 유잉 스콧이라는 남자가 부인을 살해 유기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일이 있다. 검찰에 따르면 스콧은 부인인 에벌린을 죽이고 사체를 샌디에이고 고속도로의 콘크리트 방벽 속 어딘가에 숨겼다고 하는데, 그 긴 방벽에서 주검을 찾을 재간은 없었고 다른 물증 또한 없었다. 다만 부인이 알코올중독에 질병, 그리고 5번이나 결혼했던 전력을 숨긴 것이 살인 동기였다고 주장했다. 이 정황증거만으로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플로리다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방검사까지 지낸 부잣집 아들이 내연의 여자를 살해하고 대서양에 사체를 유기했다고 기소됐는데 물론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고 물증도 없었다. 다만 주검을 유기하는 데 배로 동행한 동생이 바다에다 무거운 둘둘 말린 카펫을 함께 버렸는데 그때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의 발만 보았다는 목격증언이 전부였다. 변호인은 설사 그가 사람을 죽였다손 치더라도 그게 그 여자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했지만 결과는 유죄였다.

이 경우에는 최소한 목격자라도 있다. 지난주에 감옥 안에서 자신을 인터뷰하던 리포터로 인질극을 벌였던 키메스 일가 사건의 경우는 좀더 닮은꼴이다. 자신들이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을 살해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아산티 키메스와 아들 케네드 키메스 역시 주검, 흉기, 혈흔 등 직접적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지난 여름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이들은 집주인의 신용카드 등 물건들을 지닌 채 체포되었기 때문에 검찰쪽으로서는 좀더 용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쪽의 전략은 ‘인간성 공격’

이번 비에른바움 사건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심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키메스 사건을 유죄로 이끌어낸 맨해튼 지방검사장 로버트 뫼겐소는 “살인 이외의 다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어야 하며, 배심원들이 살인 외에는 다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모든 가능성은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하나는 실종된 게일이 자살하거나 다른 곳에서 숨어살 사람이 아니며, 또한 남 모르게 불의의 사고를 당할 만한 곳에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인 비에른바움이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피의자가 사람을 죽일 만큼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법정에서 보여주는 것이 검찰쪽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된다. 이른바 인간성 공격(character attack: 클린턴 성추문에서 특별검사 스타가 주로 활용한 것도 바로 이 방법이다)이 검찰쪽의 전략이 되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비에른바움의 인간성이 흉악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폭력적인 과거 행적을 들춰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에는 결혼 시절에 부인인 게일의 고양이를 변기에 빠뜨려 죽이려 했다는 일화도 포함되어 있다(이 바람에 변호인쪽의 반대로 배심원 선발에서 고양이 애호가들은 제외됐다). 사건 전에 비에른바움의 정신상담 치료를 했던 심리치료사들이 부인인 게일에게 보냈다는 경고편지, “당신 남편이 살인성향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증언은 환자-의사간의 비밀엄수 조항 때문에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다.

변호인쪽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다. 무엇보다도 현재 비에른바움이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첫째 과제다. 그는 부인의 실종 뒤 노스다코타주로 이주해서 재혼, 자녀를 두었고 성형외과 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현재 부인은 재판 때마다 비에른바움의 팔짱을 꼭 끼고 공판정까지 함께 나타난다. 다음 순서는 게일이 남편에 의해 살해된 것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아 있을 수도 있고,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게일의 인간성을 공격한다. 성격이 불안정하고 혼외정사를 했으며, 특히 그 대상자가 마약을 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즉 범죄가 창궐하던 85년에 집에서 나와 질 안 좋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센트럴파크로 가서 거기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변호인인 데이비드 루이스의 말을 빌리자면 “게일이 죽었을지는 모르지만 비에른바움의 소행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이라는 딜레마

(사진/미국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의 확실성은 배심원이 판단하는 피의자의 '인간성'에 기초한다. <어퓨굿맨>의 한 장면)
형사사건에서 배심원이 유죄판정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판단의 원칙은 미국에서는 ‘근거있는 의심이 없을 정도의 확실성’(beyond resonable doubt)이다. 물적증거는 이 대원칙에 가장 잘 부합되는 ‘확실성’의 표지일 뿐 반드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황증거가 물증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맨해튼에서 개업하고 있는 변호사 제럴드 샤겔 같은 이는 “여러 가지 정황증거가 단일한, 압도적인 동기를 보여주고 있을 때는 배심원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성공적’인 중산층을 이루고 있는 비에른바움과는 달리 사회의 밑바닥으로 인식되고 있는 마피아단원의 경우에는 심증에서 몹시 불리한 대우를 받아왔다. 마피아들은 살인 뒤에 주검을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서 물에 던지는 수법을 자주 써왔기 때문에 사체가 발견되지 않거나 큰 가방을 들고가는 것이 목격됐다거나 자동차 키를 들고 트렁크를 여닫는 것이 목격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유죄의 증거로 인정되기도 했다. 이 확실성을 구하기 위한 수많은 판례의 확립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비에른바움 사건에서 보여주듯 궁극적으로 이 확실성은 ‘상식적인 인간인’ 배심원이 판단하는 피의자의 인간성에 기초한다. 결국 ‘보여주기’와 ‘연기하기’가 확실성의 코드를 지배한다. 그런 의미에서 법정은 작은 공연장이다. 결국 이 확실성은 상식에, 더 정확히는 이 상식이 구성하는 상상력에 의존한다. 형법 전공인 데이비드 킹 박사에 따르면 “이 사건의 유죄판결 여부는 배심원의 상상력, 즉 비에른바움이 부인을 죽일 수 있었다고 배심원들이 상상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당신의 상식으로는 상식이, 상식의 상상력이 한 인간의 유죄를 심판하는 데 결정적이라면 그것이 상식적이라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할 수 있는가?

뉴욕=이공순 통신원ks1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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