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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중국은 ‘촌놈’들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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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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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세계 | 중국

디자이너 안상수 교수가 본 중국… 서구화 조급증 속에서도 문화의 정체성 찾는 ‘촌놈’들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객좌교수로 있다 곧 귀국할 예정인 안상수 교수(홍익대·시각디자인)를 만나러 가며, 문득 지난해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앞에서 안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이슬람식 모자를 쓰고 개량한복풍의 너비가 풍성하면서도 색상과 디자인이 독특한 옷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역시 시각디자이너구나”라는 감탄이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차림새에서 물씬 풍겨지는 ‘시각적 디자인’ 효과는 아무리 호리하게 잘 빠진 ‘물찬 제비’ 같은 사람이라도 쉽게 모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베이징에서 그를 처음 만난 느낌이 그랬다.

사진/ 중국의 문화생산자들에게는 촌놈 기질, 치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서구화에 대한 조급증도 있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이다.(이미지프레스 노순택)

무료함의 아름다움


또 한번 놀란 것은 그가 중국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였다. 중국에서 음식을 시켜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중국음식 주문하기란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다. 손짓발짓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몇년을 산 사람이라도 만날 시키는 몇 가지 요리 외에 무슨 음식이 있는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중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안 교수는 아주 능숙하게 ‘맛있는’ 음식들만 골라 주문하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1970~80년대에나 썼을 법한 손바닥만한 구식 노트 안에 항상 쓰는 붓펜으로 틈틈이 중국인들과 함께 먹어본 맛있는 요리 이름들을 메모해놓은 게 그 비결이었다. 만일 메모해놓은 노트가 없거나 요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종이 위에 직접 요리 그림을 그려서 주문하기도 한다. 역시 시각디자이너다운 독창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중국음식에 무슨 대단한 일가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든 중국사회에 휩쓸려보려고 노력한 결과’라는 것.

“음식 시키는 게 가장 고역이었어요. 예전에 가끔씩 중국을 왔을 때는 별명이 ‘만두’였을 정도로 중국음식을 먹지 못했지요. 입에 안 맞으니 만날 만두만 시켜먹었어요. 그래서 보는 대로 이름을 외우고 자꾸 시켜먹어 보고 하면서 습관을 들였죠. 음식에서 자유로워져야만 빨리 중국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

한글을 가장 ‘한글답게’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안 교수가 “이방인들에게 가장 배타적인 느낌을 주는 기호”라고 표현한 ‘한자’의 왕국, 중국에 대한 첫 느낌은 어땠을까. “무료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몇년 전 쿠바의 하바나를 갔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사람들의 일상과 표정에서 읽히는 것들이 다소 무료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거기서 아름다움 같은 게 느껴졌어요.”

다소 의외의 대답이었다. ‘무료함의 아름다움’이라니. 중국에 대한 첫인상부터 파격적이다. “솔직히 도시가 어찌 무료할 수 있겠어요. 도시는 무료할 수 없지만 일상에 쫓겨사는 도시인들은 가끔씩 그런 무료함을 추구할 때가 많은데, 중국에 와서 느낀 게 바로 그런 것이었어요. 무료해 보이는 표정들 속에서 느껴지는 낙천적인 태도 같은 거요. 나는 그것이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사진/ “무료해 보이는 표정들 속에서 느껴지는 낙천적인 태도가 참 좋아 보인다.” 안상수 교수가 발견한 중국의 아름다움은 ‘무료함’이다.(이미지프레스 노순택)
안 교수가 느낀 무료함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중국적 낙천주의’였다. 빽빽한 과밀인구와 치열한 생존경쟁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낙천적 기질과 인내심으로 심리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중국인들의 내면세계를 그는 무료함의 아름다움이라는 시적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라는 ‘악마의 맷돌’은 이들 낙천적인 중국인을 한없이 ‘무료한 아름다움’이나 추구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안 교수가 어떻게든지 중국사회에 휩쓸려보려고 ‘만두’라는 별명에서 탈피했듯이, 중국 역시 부단한 경제발전을 통해 낙후성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당당하면서도 예의바른 학생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서구를 닮아가려고 하는 모습들이 눈에 자주 들어와요. 특히 잡지들을 볼 때마다 누가누가 더 빨리 (서구를) 닮아가나 경쟁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서양 현대화의 비밀이나 그것들의 공개적 테크닉을 단시일 내 다 알아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사회주의가 무너진 러시아에서 레닌의 동상이 파괴되고 그 위에 맥도널드나 KFC 같은 자본주의의 상징물들이 들어선 것처럼 중국 역시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중국적인 원형의 문화들이 많이 사라져가는 듯해 다소 씁쓸하단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 중국이 원하는 것은 바로 ‘서양 현대화의 공개적인 테크닉’인 것을.

지난해 겨울쯤인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 학생들에게 “오늘 수업 끝나고 우리 어디 테크노바 같은 데 가서 신나게 놀아봅시다”라고 ‘호외성’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라면 강의실이 벌써 뒤집어지고도 남았을 일이다. 그런데 어떤 중국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나더니 “그런 말은 수업 끝난 다음에 하고 지금은 수업이나 하죠”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순간 안 교수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인기 한번 끌어보려다가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무안해진 나머지 황급히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그래도 수업 끝나고 테크노바를 가니까 그 학생이 제일 잘 놀더라며 웃는다.

중앙미술학원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안 교수는 내심 반성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한국적인 스승-제자 관계에 대한 반성이었다. “중국 학생들은 선생을 대하는 태도들이 참 당당하더라고요. 우리와는 달리 그 관계들이 수평적으로 보였어요. 그렇다고 선생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중앙미술학원에서 안 교수의 수업은 정규학생들 외에 외부 청강생들까지 들끓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른바 중국 내 분야별 ‘문화생산자’들을 학생들이 2인1조로 공동 인터뷰하고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전공인 시각디자인 분야를 벗어나 문화 전반에 대한 생생하고 폭넓은 인식을 갖도록 하는 수업 방식이었다. 학생들의 발표가 끝나면 인터뷰 대상자들을 직접 초빙해 학생들과 함께 공개토론 수업도 벌였다. 그것을 통해 학생들에게 문화를 생산한다는 것의 실제적이고도 현실적인 어려움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이 수업 과정과 내용은 조만간 중국에서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수업을 하면서, 그리고 지난 1년간 중국에 살면서 보니까 한국과 중국은 참 많이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만큼, 글자만큼 다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고. 우리 문화는 한글에서 보듯이 다소 풀어져 있는 반면 중국문화는 한자의 특성처럼 압축적이고 응축적이라는 느낌이에요. 마치 바람부는 걸 표현하더라도 우리는 ‘바람이 되게 부네’라고 풀어서 할 수 있지만 중국은 그저 ‘다펑’(大風) 한마디면 끝나는 것처럼요.”

정체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지난 1년간 “한자에 흠씬 두들겨맞은 느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 생활에 푹 젖어 있었던 안 교수는 중국문화의 저력을 “아직도 촌놈들이 많아서 비전이 있어 보인다”는 다소 재미있는 어법으로 비유한다. “사실 촌놈적 기질이 어떻게 보면 좋은 작가가 될 확률이 많아요. 사람이라는 게 지금은 ‘빤들’거리더라도 실은 촌놈 시절을 제일 그리워하거든요. 빤들거린 뒤에는 다시 ‘흙’을 만진다는 건 불가능해요. 중국의 문화생산자들에게는 이런 촌놈 기질, 치기 같은 게 느껴져요. 이들에게서도 역시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 서구화에 대한 조급증 같은 게 느껴지지만 자기의 주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이 느껴져요. 자기의 주제를 잃지 않으면서도 국제성을 획득하는 문화야말로 가장 저력 있고 무서운 거거든요.”

그가 말하는 촌놈 기질이란 바로 자기 주제, 문화의 정체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안 교수가 한글 디자인을 통해 지향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촌놈 기질’이 아니었는지. 뭔가 빈 곳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중국에 올 생각을 했다는 안 교수가 다시 무엇을 ‘채우고’ 돌아가서 예의 그 ‘촌놈 기질’을 발휘할지 또 문득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베이징= 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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