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도시가 찾아낸 텃밭

465
등록 : 2003-06-25 00:00 수정 :

크게 작게

움직이는 세계 | 영국

산업혁명기에 시작된 영국 도시농업 ‘얼라트먼트’… 최근 재개발로 숫자 계속 줄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 속에 사는 많은 도시민들의 바람 중 하나가 작은 땅이라도 가지고 이런저런 채소를 직접 기르는 일일 것이다. 근대도시로의 팽창을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인 만큼 영국에서는 일찌감치 이런 열망을 반영해 얼라트먼트(allotment·도시의 소규모 농지)가 나타났고 아직도 런던 여기저기에서 도시민들의 중요한 위안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정부가 개발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하는 기왕의 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나서면서 큰 위협을 받고 있다.

헛간이나 온실 만들기도


사진/ “여기서 다양한 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죠.” 영국 런던 북부 이슬링턴구의 얼라트먼트에는 젊은 경작자들이 많다.
얼라트먼트는 영국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도시농업이다. 물론 더 최근의 움직임으로 1970년대 농촌생활과는 거리가 먼 도시 어린이들의 농촌생활 체험을 위해 동물농장을 설립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마찬가지로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 실업자, 소수민족의 사회적응 등을 위한 사회복지 차원의 농장도 만들어졌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돼지·염소·양·토끼·닭 등을 기를 수 있는 작은 농장을 어린이들과 자원자들을 위해 제공하고 있다. 그와 별도로 슬럼가 재개발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매립지에 지역공동체를 위한 화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식료품의 안전성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유기농을 지향하는 농장을 만드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런 다양한 도시농업의 형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물론 개인적으로도 농지를 찾아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집단적으로, 즉 그룹단위로, 때로는 비정부기구(NGO)가 개입해 이루어지는 형태도 많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도시농업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얼라트먼트다.

얼라트먼트는 지방자치단체에게 1년에 공동관리비조로 약 15파운드(한국돈으로 약 3만원)를 내면 불하받을 수 있는 작은 경작지다. 토지를 불하받은 50명 이상의 경작자들이 일정 부지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셈인데, 이들이 위원들을 선출하고 그 위원회가 전체 농지 관리를 맡고 있다. 얼라트먼트는 인기가 높기 때문에 신청자가 농지를 얻기 위해서는 보통 2년 이상이 걸리며 일단 얻었더라도 위원회로부터 운영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는 반납해야 한다. 여기에 어떤 이들은 헌 목재로 헛간과 온실을 만들기도 한다. 풍자만화에는 가족의 등쌀을 피해 헛간에 TV·조리기구·소파 등을 갖춰놓고 혼자만의 공간을 즐기는 경작자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얼라트먼트는 영국의 도시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한 19세기 산업혁명기에 등장했다. 당시 도시의 비인간화를 완화시키기 위해 지방정부나 자선가들이 나서 공원을 설립하거나, 지역 내의 작은 숲과 공유지를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지만 얼라트먼트는 가난한 노동자나 빈민들이 겪는 도시생활의 압박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다. 농촌에서 갑자기 새로운 도시로 밀려난 노동자들은 삶의 조건이 열악했으며 빈민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식량은 비쌌지만 아직 농사꾼의 본능이 강하게 남아 있던 이들은 흙이라도 만질 수 있는 조그만 정원조차 가질 수 없었다. 토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욕구는 너무나 강렬해 19세기 중반에 도시 안에서 농사를 짓기 위한 토지구입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거대한 꿈임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요구는 컸으나 토지는 너무 비싸 결국 그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여기 채소는 훨씬 맛있어요”

사진/ 경사지기 때문에 토양유실의 염려가 있어 목재를 이용해 계단식으로 만든 얼라트먼트.
도시 속에서 전원생활을 꾸미려는 그들의 환상이 깨지면서 이제 도시가 자신들의 터전이 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도시의 작은 공지들을 점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보통 얼라트먼트는 유기된, 혹은 반 유기된 토지, 예컨대 오래된 매립지(어떤 것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것도 있다), 철도, 운하, 강가, 혹은 다른 공장 부근의 공지 등에 위치하고 있다. 땅과 다시 만나고, 잊혀진 농사기술을 회복하고,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려는 노동자들의 집요한 요구의 결과로 19세기 말 얼라트먼트는 도시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법적인 경작권을 확보하게 된다.

필자들이 방문한 곳은 런던 북쪽에 위치한 이슬링턴구의 한 얼라트먼트다. 여기는 역사가 30년밖에 안 돼 상당히 짧은 편에 속하는데, 어느 여성 장애인이 캠페인을 벌인 끝에 만들어진 것이다. 계곡처럼 경사진 아래쪽에 오래된 철로가 있었고 그 경사지를 이용해 얼라트먼트가 있었다. 경사지기 때문에 토양유실의 염려가 있어 각 경작지는 목재를 이용해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서 만난 경작자들이 생각보다 젊은 층이라서 왜 농사를 짓느냐고 물었다. 천연가스 탐사 엔지니어라는 마이클은 그의 어머니가 농사짓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리학자인 찰리와 공인 측량사인 남편 존은 주변을 안내해주고 친절하게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이 좋아요. 뭔가 벗어날 수 있고 채소를 기른다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아요. 가벼운 운동도 되고요. 또 농사는 인내심도 길러줘요. 여기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죠. 가족과 함께 아이들도 오고 서로 채소도 나누고요. 여기 채소는 훨씬 맛있어요. 아마 더 신선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직접 수고한 끝에 얻은 거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찰리의 말이다. 채소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연못을 만들어놓는가 하면 정성스레 갖가지 화초를 가꾼다.

이제 점점 도시인구가 늘어나고 도시 슬럼이 재개발되면서 예전의 노동계급은 사라지고 필자가 만났던 사람들처럼 전문직종의 중산계급층으로, 그리고 여성들로 그 주인이 바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중산층조차 정원을 갖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채소뿐 아니라 꽃 재배, 혹은 자신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유기농 재배라든가 관상용 식물 재배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시 속에서의 개방지는 끝없는 위협을 받고 있다. 영국의 모든 시가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 이제 도시개발의 압력은 이런 땅으로 쏠리고 있다. 주거용 건축을 위해 초등학교 운동장마저 넘보는 판국이다.

도시를 숨쉬게 하자

2차대전 당시만 해도 약 200만곳의 얼라트먼트가 있었다. 이제 30만곳이 남아 있고 그 수는 매년 조금씩 줄고 있다. 그러나 도시의 황폐함으로 인한 사람들의 자연을 향한 갈증 또한 커서, 그 해결책 중 하나로 얼라트먼트는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거대도시 주민들을 위한 지속 가능한 환경은 가난한 나라나 부유한 나라에서나 공히 하나의 커다란 주제가 되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은 세계화 이후 자주 경제위기를 겪게 되고 언제라도 반실업 또는 실업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도시 노동자 빈민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농사지을 땅을 찾아내고 개발하고 있다. 미관상의 이유로 반대하던 정부들조차 이제는 묵인하거나 NGO와 더불어 장려하기조차 한다. 음식쓰레기, 생활하수 재활용, 사회복지라는 차원에서 도시농업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농업의 한 형태인 얼라트먼트도 언젠가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될 것을 기대해본다.

런던=글·사진 줄리언 체인·조임숙 전문위원 joimsook@hotmail.com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