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편집총국장 사퇴 사건을 계기로 돌아본 9·11 이후 미국 언론의 현주소
요즈음 미국 언론보도를 보고 있노라면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났어도 사담 후세인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아프간 전쟁이 끝났어도 오사마 빈 라덴의 행적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던 언론들이 지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실상을 파헤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언론은 그 사실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가져야 하고, 취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언론이 9·11 이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례없는 장문의 ‘고해성사’
미국의 언론사를 되돌아보면 오늘의 미국 언론이 제 기능을 수행치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의 많은 기자들은 비록 몸은 미국 언론사 소속이었으나 사명은 국경을 초월했다. 그래서 존경을 받아왔고 명성도 따랐다. 한 예로 <워싱턴 포스트>의 봅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워터게이트 사건 추적보도(1972)로 대통령의 도덕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미 언론은 국제연합(UN)을 무시하고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시킨 부시 행정부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제대로 들이대지 못하고 있다. 세이무어 허시 기자의 ‘밀라이 학살 사건’ 추적보도(1969)는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야만성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그러나 아프간전과 이라크전에서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심층적으로 보도한 미 언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창사 152년의 전통을 지닌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 신참기자가 저지른 표절과 왜곡 사건의 여파로 편집국장을 포함한 고위 간부들이 사퇴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지난 6월5일 <뉴욕타임스>는 성명서를 통해 하웰 레인스(60) 편집총국장과 편집국 2위 서열인 제럴드 보이드(52) 국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조지프 랠리벨드(66) 전 편집총국장을 임시 총국장으로 발령한다고 발표했다. 편집국 역사에 유례없는 인책 사건이다.
5월11일치 <뉴욕타임스>에는 지금까지 미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정정보도’가 게재되어 언론계는 물론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전국부 소속 제이슨 블레어(27) 기자의 오보·표절·왜곡 기사에 대한 사과와 함께 경위를 밝힌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약 7500개의 단어로 4개 지면에 걸쳐 블레어 기자가 지난해 10월 이후 작성한 73건 기사 중 36건의 ‘사기성’ 기사 보도의 경위를 소개했다. 단순히 정정보도를 한 것뿐만 아니라 문제 기사들에 대한 독자들의 제보도 요청했다.
이어 5월13일에는 편집국의 1단계 자체조사를 보도하면서 사전에 오보를 막지 못한 중요한 원인은 편집국 고위 간부들간 공유 시스템이 허점을 드러내고 인사관리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5월14일에는 <뉴욕타임스>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발행인을 포함한 편집국 비상총회를 인근 극장을 빌려 약 2시간 동안 진행했다. 언론사 자체가 취재 대상이 돼버린 비상총회는 외부 언론에 비공개로 실시됐는데 상당히 뼈아픈 대화들이 쏟아져나왔다는 후문이다.
이 자리에서는 평소 문제점이 노출된 블레어 기자를 옹호해왔던 하웰 레인스 편집총국장에 대한 책임론까지 거론됐다. 한 기자는 레인스 국장에게 “사퇴할 의사가 없는가”라고 했으나, 당사자는 “다시는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강구책을 마련할 것이며 이번 일로 사퇴하지 않겠다”고 답변했고, 아서 설즈버거 주니어 발행인도 “사퇴서가 제출되더라도 반려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AP통신은 익명의 참석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퓰리처상 수상자까지 문제 일으켜
그러나 책임소재 규명에서 비켜갈 수 없던 레인스 국장은 끝내 사표를 내고 말았다. 애초 사표반려를 강조했던 설즈버거 발행인도 “타임스를 위해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가 안고 있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고질화되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이번에 편집총국장 서리에 선임된 랠리벨드 국장이 재임하던 2000년 당시 그는 “<뉴욕타임스> 지면에 오류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심지어 발행인의 이름 철자도 틀리게 쓰는 기자가 있다”고 지적했으나 개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수도권부 조나탄 랜드맨 부장은 “블레어 기자를 당장 정직시켜야 한다”는 메모를 작성했으나 어쩐 일인지 편집국 상층부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일부 백인계 기자들은 “비호 세력이 있다”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문제의 블레어 기자는 흑인계로 <뉴욕타임스> 인턴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됐다. 이 과정에서 실력보다는 인종별 고용기회균등법의 혜택으로 정식 채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일정 비율의 기자를 흑인·라티노 등 소수민족계에서 선발하는 과정에서 흑인인 블레어 기자가 쿼터제로 정식 기자가 됐다는 것. 이를 두고 다른 백인계 기자는 “흑인계 기자들에게 잘못을 지적할 때 자칫하면 인종차별로 오해당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블레어 기자 때문에 초상집이 된 <뉴욕타임스>는 2주가 채 못 되어 또 ‘문제성 기자’가 나타나 줄초상을 맞고 있다. 1996년에 퓰리처상까지 받은 베테랑 기자인 릭 브래그는 지난해 보도한 기사가 문제가 되어 정직처분을 받았다. 브래그 기자는 지난해 6월 플로리다주의 소규모 굴양식장을 취재했는데 그 기사의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최근 온라인 매거진 <슬레이트>는 “브래그 기자의 이름으로 보도된 굴양식장 기사는 사실 그의 보조원인 웨스 요더가 취재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보조원인 요더는 <슬레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굴양식장 취재를 위한 인터뷰와 탐사는 모두 내가 했고, 브래그 기자는 단지 하룻밤 현장을 다녀왔을 뿐이다. 그러나 브래그 기자는 내가 취재한 내용을 보고 받아 생생한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보조원이라 애초 내 이름이 게재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한편 당사자인 브래그 기자는 <컬럼비아 저널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나와 요더는 둘이 함께 좋은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민감한 질문도 못하는 분위기”
최근 가 , 갤럽 등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 국민의 36%만이 “언론이 사실보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조사결과는 89년에 실시한 조사에서 나타난 54%에 비하면 크나큰 추락세이다. 언론의 신뢰도 추락은 제이슨 블레어 기자의 엄청난 오보·표절 사건과 이라크전에서 야기된 애국주의적 과장 및 편향 보도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조사분석관들은 풀이했다.
한편 오보가 발생했을 때 신문들이 지체 없이 정정보도를 한다고 응답한 수는 63%였다. 오보에 대한 신속한 정정보도는 독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뉴욕타임스>가 블레어 기자의 표절·오보 사건에 대해 이례적으로 4쪽에 걸친 장문의 ‘고해성사’를 게재한 것도 독자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영국의 는 9·11사태 이후 미국 언론보도의 객관성 상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방송은 미국 언론이 (진실성이 결여된) ‘애국적 언론’ 열풍으로 선정적으로 변질됐다고 비난했다. 일례로 ‘제시카 일병 구하기’ 보도는 <워싱턴포스트>를 포함한 유수의 언론들이 구출작전을 마치 할리우드의 영화처럼 극대화시켰다. 실제로는 이라크군도 없는 빈 병원에 버려진 여군을 실어온 것인데도 말이다. 의 간판 앵커인 댄 래더도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애국 열기 때문에 민감한 질문을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통탄했다.
언론 칼럼니스트인 팻 힉키는 요즘 미국 언론을 사람에 비유해 ‘중년의 위기’라고 표현하면서, 언론이 현재의 위기에서 생존하려면 저널리즘의 원리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상기시켰다. 즉, 언론의 기본이 진실성, 공정성, 정확성, 객관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의 언론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 언론도 심각하게 생각할 과제이다.
LA= 김지현 전문위원 lia21c@hotmail.com

사진/ 5월14일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열린 <뉴욕타임스> 편집국 비상총회장 밖에서 한 시민이 블레어 기자의 왜곡보도를 비꼬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GAMMA)

사진/ 이라크전 당시 현장을 취재 중인 미국 언론인들. 9·11 이후 애국주의 열풍에 휩쓸려 언론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낸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SYGMA)

사진/ 다른 신문들의 기사를 짜깁기하거나 허위보도를 해 해고당한 <뉴욕타임스>의 제이슨 블레어 기자.(AP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