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이라크의 기이한 두 가지 풍경

461
등록 : 2003-05-28 00:00 수정 :

크게 작게

석유는 부족해서 난리고 달러는 폭락하고… 특별한 대책 없이 방관하는 미군에 불만 쏟아져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다 싶은 일이 어디 하나둘일까? 세계 제2의 산유국인데 석유 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이라크다. 석유 부족으로 대부분의 주유소는 문을 닫은 상태고 주민들은 석유를 얻기 위해 아침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다. 한편, 디나르화에 그려진 사담 후세인은 달러화를 누르고 당당히 이라크인들과 외국인들의 주머니를 장악한 채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달러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나라 이라크…. 이래저래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다.

전쟁 전후 달러화 쏟아져

사진/ 이라크인에게 “미군이 무슨 이유로 이라크인들을 죄인 취급하느냐?”는 항의를 듣고 있는 미군 병사.
“이제 급여는 달러가 아닌 디나르로 주시오.” 바그다드에서 택시 영업을 하고 있는 나세르도 달러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자 이라크 디나르로 일당을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그다드 함락 직후인 4월 10만4천디나르까지 치솟았던 달러화가 지난 주간에는 800디나르까지 곤두박질을 쳤다. 같은 수준의 달러를 받는다면 실제 자신이 챙길 몫은 20%도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다시 달러화가 회복되면서 1200디나르 선을 유지하고 있다. 한동안 달러화는 큰 폭으로 널뛰기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달러화의 바그다드 점령은 특단 조치가 없는 한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여진다.


한때 이라크의 임시 화폐로 달러를 사용하려고까지 했던 미국은 지역 주민들의 거부감 때문에 입장을 바꿨다. 그렇지만 여전히 시중에서는 조만간에 이라크 디나르화가 휴지로 바뀌고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곤 했다. 지난 3월 이후 바그다드를 찾은 외국인들은 현지인들이 여전히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 담긴 이라크 디나르화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현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달러화 약세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전쟁 전과 전쟁기간 중 미국이 이라크 내의 내부 협력자를 찾기 위하여 거금을 뿌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미국은 바그다드 대접전을 겪지 않고 전쟁을 사실상 끝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CIA 요원들은 이라크 내 부족 지도자들을 회유·포섭하기 위하여 수백만달러 이상의 공작금을 투입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미군은 이라크군 고급 지휘관들을 포섭하기 위해 거금을 투입했다는 얘기도 나돈다. 결국 한 기에 100만∼200만달러나 되는 크루주 미사일 비용보다 훨씬 경제적인 가격에 이라크군의 발을 묶어놓는 전과()를 올린 셈이다. 이때도 물론 거액의 달러가 뿌려졌다. 여기에 더하여 종전이 되자 세계 각국의 비정부기구와 정부·단체 등에서 이라크에 거액의 자금과 물자를 풀었다. 달러화가 넘쳐난 셈이다.

일부 이라크인들은 은행이나 후세인 궁, 고위공직자들의 집에서 약탈자들이 빼돌린 달러도 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은행에서 약탈된 달러만도 4억달러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영 연합군은 이라크 입성 이후 현지 고용인들에게 달러로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이달 하순에도 고용된 이라크 공무원들의 5월치 급여로 1억7800만달러를 지급할 계획이다. 달러화가 이라크에 넘쳐나는 반면, 디나르화는 사려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이라크인들이 ‘사재기’를 하고 혹시나 하며 구입하는 외국인들도 많아 물량이 달린다. 무엇보다도 달러화의 약세는 이라크인들의 자부심, 생활상의 편의, 달러화에 대한 불신 등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라크인들은 달러화 위폐가 돈다는 소문에도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정유시설 부족이 이유다?

사진/ 주유소마다 차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석유 부족은 산유국 이라크의 자존심을 뭉개버렸다.
한편으로, 이라크를 찾는 방문자들은 주유소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차량들을 보며 당혹스러워한다. 크고 작은 석유통에 휘발유를 담아두고 지나가는 차량들을 호객하는 장사꾼들의 풍경도 눈길을 끈다. 주유기가 아닌 호스를 이용하여 휘발유를 채우는 장면이 쉽게 눈에 띈다. 심지어 유조차를 길에 대고 휘발유 장사를 하는 거상(?)들도 보인다. 이라크 국경 트레이빌의 한 주유소에서는 주유소 탱크에 파이프를 연결하여 기름을 빼가는 장면도 목격됐다. 주유소 직원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바그다드 시내에 즐비한 주유소 중에 영업을 하지 못하는 주유소들이 태반이다. 그나마 일부 주유소는 미군의 삼엄한 경계를 받으면서 영업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일부 지점에서는 미군이 무료 급유를 하는 풍경도 눈에 띄었다.

공식적인 석유 매장량이 1120억 배럴로 세계 2위인 이라크가 내수용 석유 부족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현장이다. 급기야 이라크가 이달 하순 쿠웨이트 등으로부터 석유를 긴급 수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유 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정유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석유부는 정유시설 부족으로 남아도는 원유를 터키와 요르단의 휘발유나 LPG와 맞바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주유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주민들간에 다툼이 빈번해졌다. “미군들이 다른 관공서가 약탈되고 불타는 것은 방치했으면서도 석유부 건물만큼은 잘 보전시켰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던 것 아닌가.” 주민들의 말마따나 바그다드 함락 직후 석유부 건물은 미군의 엄중한 경호를 받아왔다.

“지금 이라크가 겪고 있는 기름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굉장히 쉽다. 하루만 제대로 정유 시설이 가동되어도 쉽게 해결된다. 미국이 무신경한 것이다.” 아부 아흐마드는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장비와 인력을 이라크 석유문제 해결에 투입하고 있다. 그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은 미군 공병단이다. 이들은 이라크전 종전 이후 유전시설의 주요 장비들 상당수가 약탈되었다고 말한다. 장비 부족도 이유지만 돈 되는 석유 시설물이 약탈자들의 손쉬운 표적이라는 불안감에서 석유 관련 근로자들이 업무 복귀를 기피하는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루 생산량인 23억 배럴의 원유가 수출되지 않아서 발생되는 문제도 많다. 수출도 안 되고 정유도 되지 않아 쌓이는 원유를 처리할 방법이 없어 다시 채굴한 유전에 부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석유부 관계자나 미국은 이라크 석유 수출 재개를 위한 대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유사시 한달 정도 버티는 데 긴급히 필요한 휘발유와 LPG 등을 확보하고 다음달부터 하루 100억 배럴 이상을 수출하는 것으로 석유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방치라는 음모론마저

사진/ 달러화의 이라크 점령은 아직 멀었다? 디나르를 달러와 바꿔주는 이라크 환전상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민심은 더욱 거칠어지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예상되는 문제에 대한 대책마련도 없이, 진지한 노력도 없이 무능력하게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비난이 퍼부어지고 있다. 음모론마저 제기된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전국적으로 번져간 약탈과 방화, 치안 불안에도 불구하고 달러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자 당혹스러워진 미국이 주둔 연장의 명목을 찾기 위해 석유부족 사태를 방임했다는 소문이다. 이라크 국민이 크게 동요하지 않고 전쟁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지자 미국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갓 풍문에 지나지 않으나 미군이 질서 유지가 더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정이양 시기도 연기하는 등의 효과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식의 음모론은 위기 상황이 길어지면서 더욱 번져가고 있다.

미국은 브레머를 이라크 최고행정관으로 임명하는 등 이라크 임시정부 관계자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아직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으니 이라크 과도정부로 권한을 위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민간정권이 수립할 때까지 미군은 주둔할 것이다. 미국의 정책을 바라보는 이라크인들의 거부감은 커져만 간다. 달러화가 바그다드를 함락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석유 위기로 야기된 반미 감정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 바그다드는 미군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지 않은 모양이다.

바그다드=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