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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 딸은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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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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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필리핀 여성의 사연… 이주노동과 국제중매혼의 어두운 그림자

“따따 가족이 오셨어요.” 필리핀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 사무실에서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반을 더 기다려서야 알가나레이 비비(31·애칭 따따)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두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온 따따 아버지 멜란도(56)와 여동생 멜린다(29)는 사무실 밖에서 잠시 서성거리는 듯했다. 멜란도는 사무실 밖에서 담배 한대를 다 피우고서야 들어섰다. 지난 3월 25일, 한국인 남편의 폭력을 피해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따따 아버지에게 어떤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잠시 막막했다. 이미 알고 있을 신문보도 기사부터 읽어주었다.

가족은 철저한 조사를 바란다

사진/ 한국 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진 알가나레이 비비의 아버지 멜란도와 여동생 멜린다. 비비는 가족의 희망이었다.
아무 말 없이 듣던 멜란도는 대뜸 “내 딸은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한 거요”라며 눈시울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필리핀 남부 농촌가정의 9남매 가운데 셋째면서 맏딸인 따따는, 1992년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은 이후 가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책임져야 했다. 어려운 가정생활 속에서도 명석한 따따는 교육기술대학교를 졸업했고, 95년 한국 남자를 만나 시집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아버지 말마따나 온 가족의 ‘희망’이었다. 동네에서는 딸자식 잘둔 집이라 소문났고, 한국인 사위는 동네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결혼 8년 만에 ‘희망’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프레스에 눌려 엄지손가락이 잘린 오른손으로 멍든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는 하루에 한번씩 꼬박꼬박 안부전화를 하던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죽고 나서야 한국인 남편에게 맞고 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딸이 남편에 쫓겨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역만리에 딸 자식을 두고 행복해하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한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는 그는 딸의 주검을 찍은 사진에 선명히 드러난 온몸의 타박상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버지는 그날 밤 이웃의 신고로 달려온 경찰들이 아파트 문을 안 열어준다고 돌아갔을 때 따따가 느꼈을 절망감을 생각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멜란도와 멜린다는 눈물을 삼키면서 한국어로 쓰인 딸의 사망진단서를 보여줬다.

친구들에게까지 남편의 상습폭행 사실을 숨기고 지내던 따따가 결국 3월25일 새벽 1시께 만취해 “함께 죽자”며 칼을 들고 협박하는 남편을 피해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고 쓴 한국 신문의 기사를 읽어주자, 멜란도는 손사래를 쳤다. 그는 타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멜란도는 나중에야 딸이 사건 발생 이전에도 남편의 구타가 심해 필리핀 대사관과 인권보호단체에 하소연했고, 그 이후 남편에게 경고를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건 발생 1주일 전에는 집에 전화를 걸어 당장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동생들과 아버지를 잘 보살피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가족은 그래서 좀더 철저한 조사가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멜란도를 인터뷰하던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 사무실에 올해에만 이와 비슷한 50여건의 이주노동자, 필리핀 여성들의 피해사례가 접수되었다.

사진/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의 회의 모습. 이 단체는 해외에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의 책임간사 마이타는 빈곤과 실업으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고초가 심하다고 했다. 첫째, 비자발급을 받고 취업을 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돈을 빚을 내서 지불해야 하고, 둘째, 취업이나 국제결혼을 해서 낯선 땅에서 살며 겪는 각종 고초, 송금하면서도 부담해야 하는 이자 문제 등이 있고, 셋째, 본국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생활과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삼중고를 겪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장의 생계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해외로 취업하거나 국제결혼을 한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고생을 해서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그나마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이렇게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 품에 돌아오는 필리핀인이 하루에 4~5명 정도 된다.

96년 창립된 필리핀의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는 해외에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는 전 세계에 23개국 96개 단체가 모여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체를 방문했을 때 마침 한국에서 돌아온 두명의 필리핀 노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서울 수유리에서 일하다 지난 3월 말에 돌아온 레이(가명·29)는 따따 사건이 난 다음날 필리핀에 왔다. 레이는 한국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북 전주시 한 외곽의 농촌지역에 시집온 필리핀 여성은 예상치 못한 농촌지역의 힘든 일은 고사하고라도 남편이 시도 때도 없이 원치 않는 성생활을 강요해 자신이 짐승이 된 듯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왜 이주노동자 자치조직은 없나

사진/ 알가나레이 비비의 사망진단서. 가족은 줄곧 타살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의 어두운 그림자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연애결혼이 아닌 다음에야 많은 국제결혼은 당사자들이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고, 서로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졸속으로 결혼을 한다. 이후 문제가 생겨 이혼하면 여성쪽은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히고, 자식들은 어떤 형태로든 보호받지 못한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인권 사각지대다.

이번 따따 사건의 경우에도 경찰은 부부싸움을 벌여 소란스럽다는 주민신고로 현장에 도착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냥 기다리다 사고를 막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필리핀의 여성단체들은 국제결혼한 이주여성의 가정폭력 실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가정폭력 신고에 대해서는 경찰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이주노동자국제연대센터 관계자들은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데서도 반성할 점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주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운동에 깊은 관심이 있던 활동가 구스만(가명·28)은 97년부터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해왔다. 그는 91~97년 6년간 한국의 이주노동자 활동을 정리하다 이주노동자 자치조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에 놀랐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이 언론을 통한 ‘주장운동’(Advocacy)에는 강한 반면 풀뿌리 대중들의 참여조직운동이 취약하다는 점이 이주노동자운동에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케손시티=글·사진 나효우 전문위원 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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