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멧돼지’를 통쾌하게 잡다

456
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인도네시아 미술사와 현대사의 복원, 노여움의 예술가 조코 퍼킥의 부활

1965년 11월8일, 며칠 동안 비를 뿌리며 추적거리던 하늘이 아침부터 화사한 빛을 쏟아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족자카르타 동쪽 센툴에 자리잡은 민중화가의 집(Sanggar Pelukis Rakyat)으로 발길을 옮겼다. 9월30일 수카르노 대통령 경호단장 운퉁 중령이 주도한 이른바 친위 쿠데타를 카운터 쿠데타로 제압한 수하르토 장군이 11월 들어 공산당 박멸을 외치며 인도네시아 전역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 즈음이라, 이른 아침부터 민중화가의 집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걱정스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사진/ 호치민의 얼굴을 연상케 하는 조코 퍼킥. 그의 예술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선물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자욱한 담배 연기가 주름진 얼굴들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들 무렵, 난데없이 문이 열리면서 날카로운 햇살을 업은 경찰들이 밀어닥쳤다. 경찰들은 그를 거칠게 낚아채 차 속으로 구겨 던졌다. 그리고 응우파산 경찰서로 끌고가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심문에 심문을 거듭했다. 취조 내용은 오직 두 소절이었다. “공산당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공산당놈들이 어디에 있나?”

‘짐승 조심’을 거꾸로 읽으면…


1996년작 〈멧돼지 대왕〉.
그리고 1972년 석방될 때까지, 그는 7년 동안 족자카르타 감옥에서 벌레를 잡아먹는 벌레처럼 지냈다. 그는 세상을 잊었다. 세상도 그를 잊었다. 그로부터 그 이름 조코 퍼킥(Joko Pekik)이 세상에 다시 온전히 부활하기까지는 3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장마가 꼬랑지에 걸린 2003년 4월11일 이른 아침 조코 퍼킥을 찾아갔다. 족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15km쯤 떨어진 반툴의 프라타란 마을 어귀에 자리잡은 조코의 집은 베도그 강을 끼고 잘 다듬은 숲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는, 그야말로 얼핏 보아도 ‘예술’이 나올 만한 그런 곳이었다. ‘짐승 조심’이라 써붙인 팻말을 따라 걸어 집뜰로 들어서자 니힐(Nihil)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지닌 조코의 넷째아들이 무뚝뚝하게 기자를 맞았다. “야, 근데 넌 이름이 왜 그렇게 ‘허무’하냐?” <템포> 잡지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한다는 니힐과 인사를 터고 있던 참에, 동네 나들이를 나갔던 조코가 돌아왔다.

“텅 빈 것,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런 걸 염두에 두며 이놈 이름을 붙였는데…. 좀 어려워.” 그렇다. 어려웠다! 조코의 집 둘레에서 느낀 첫인상은 뭔가 수상한 게 많았다. 니힐도 그렇지만, 맹수도 없는데 왜 ‘짐승 조심’이라는 팻말을 붙였는지도 그렇고, 마을 이름도 우리말로 풀어보면 ‘큰 뜰’이 되고, 또 강 이름은 ‘닭 서리한 놈’이라는 괴상한 뜻이 되는 식이니.

또 있다. 흔히들 고상한 이름 하나쯤은 붙여두는 예술가의 작업실-조코는 아무 데서나 내키는 대로 그림 그리는 특성이 있는 탓에, 이걸 그저 그림 창고라 했다-도 그냥 ‘1층’이라 부를 뿐이다.

“짐승 조심, 그건 거꾸로 읽으면 돼. 짐승이 사람을 물어뜯으니 조심하라는 게 아니라, 짐승을 조심해서 다루고 밟지 말라는 뜻이야.” 팻말에 이런저런 사정을 다 설명할 수가 없어 그냥 그렇게 붙였다며 조코는 웃어젖혔다. “강 이름, 마을 이름, 그건 나도 몰라. 예부터 누가 그렇게 불렀으니 그냥 그렇게 우리도 따라 부르는 거지. 좋잖아!” 조코는 현학적이고 복잡한 게 싫단다. 그래서 작업장 이름도 1층에 있으니 그냥 누구나 선뜻 알아차릴 수 있게 ‘1층’이라 부르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들리는 그대로 듣는’ 제 몸에서 우러나는 자연다움을 동력 삼은 조코의 예술은 그렇게 일상 속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조코가 그토록 예민하게 염탐해온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도 모조리 그 뜰에 놓여 있었다. 짐승, 참 많기도 했다. 동물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원숭이에서부터 강아지, 싸움닭들, 대형 염소에 이르기까지. 또 독수리에서부터 공작을 비롯한 각종 새들과 수백 마리 물고기들….

“모두 동네에 있던 놈들인데, 사람들이 잘 돌보지 않는 놈들은 그냥 내가 데리고 와서 같이 사는 거지.” 이래서 그림 그릴 시간이 없다는 조코 말은 엄살이 아님이 분명했다. 아침저녁으로 그 많은 식구들 밥 주고 나면 한나절 다 간다는 말을 실감하고도 남을 만치. “그림 그리는 것보다는 짐승들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지.”

멧돼지는 감옥에서 왔다

1998년작 〈멧돼지 사냥〉. 대중들의 거친 분노와 수하르토의 퇴진이 담겨 있다.
이런 그 앞에서 조코를 가장 조코답게 만든 그 유명한 그림들 속의 ‘멧돼지’를 묻기가 민망스러웠다. 그래서 말을 비틀어 던졌다. “멧돼지는 누구인가?” 조코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멧돼지는 수하르토야. 또 나이기도 하고. 크고 작은 차이일 뿐.”

조코는 이 멧돼지를 감옥에서 데리고 왔다고 덧붙였다. “감옥살이란 게 벌레보다 못했어. 그런 중에도 살아보겠다고 버티는 게 사람이더군. 그래, 모든 생명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는데, 느닷없이 멧돼지가 떠올랐던 거야. 놈은 이래저래 죽임만을 당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고부터 멧돼지가 늘 무슨 강박감처럼 따라다녔지.”

그렇게 1965년 감옥에서 멧돼지를 건져낸 조코는 그 멧돼지를 “죽이자”고 결심했지만 30년 넘도록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조코는 결국 시퍼렇게 날이 오른 수하르토 독재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96년 기어이 그 멧돼지를 제물로 삼아 <멧돼지 대왕>을 그려냈다. 수하르토가 쫓겨나기 꼭 2년 전이었다. 그러자 1998년 수하르토를 몰아내는 싸움터에 시민들은 조코의 <멧돼지 대왕>을 들고 나와 온 인도네시아를 도배했다. 조코는 그렇게 30년이 지나 그 멧돼지를 죽이면서 찬란하게 부활했다. “늘 멧돼지를 제물로 삼아온 사람들의 역사지. 멧돼지를 통한 정화의식 같은 건데, 그 멧돼지가 모든 죄를 안고 가는 상징처럼.”

조코는 살아오는 동안 죄를 많이 지은 스스로도 멧돼지라고 했다. 가장 큰 멧돼지, 예컨대 가장 큰 죄를 지은 <멧돼지 대왕>은 수하르토였고.

조코의 부활은 인도네시아 미술사의 복원이었고, 현대사의 복구였다. 이른바 ‘9월30일 운동’이라는 1965년 수카르노 대통령 친위 쿠데타를 단 20시간 만에 카운터 쿠데타로 제압한 수하르토 장군은 공산주의 박멸을 내걸고 1965년 11월부터 1966년 초까지 3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힌 그 인도네시아 현대사 한구석에 조코 퍼킥은 지난 30년 동안 쥐죽은 듯 웅크려 앉아 있었다. 갓 스물 넘은 나이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의 문화전위대 격인 레크라(Lekra·인민예술가동맹)에 참여했던 청년예술가 조코가 다시 붓길을 휘갈길 수 있기까지는 30년이 걸렸고, 그동안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사 한쪽도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러나 조코가 세상에 고개를 내민 일로 이 혼탁한 세상이 끝날 수는 없었다. 어둠의 실체였던 독재자 수하르토를 쫓아냈지만, 조코의 눈에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모습과 정치꾼들의 기름진 아랫배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차오를 뿐이었다. 조코는 그 참을 수 없던 노여움을 2002년 11월10일 영웅의 날(1945년 대네덜란드 독립투쟁 기념일)에 그려낸 <혁명의 배신자들>로 폭발시켰다.

“난 뭔가를 놓고 화가 나야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바로 그 ‘노여움’이었다. 조코를 지배해온 삶도, 정서도, 그리고 예술에 대한 원동력도 모두 노여움에서부터 비롯했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죽도록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나 온통 가난만 보고 자랐으니, 그 가난이 최초로 나를 화나게 했던 대상 아니었겠어?”

가난에 대한 치떨리는 노여움

사진/ 조코 퍼킥의 예술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에서부터 출발했다. 조코가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다.
1938년 자바섬 중부 푸르오다디에서 대물려온 농사꾼 집안의 열두 아이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조코는 선조 때부터 따져, 또 가문을 통틀어 글을 읽을 수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인물이었다. 말 그대로 가문의 ‘풍운아’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사꾼 가정에서 운 좋게도 학교 다니며 글을 배웠으니 자연스레 가난한 사람을 위한 예술을 하자고 결심하게 되었던 거야. 그 가난을 적으로 삼아서.” 그런 조코가 공산주의 문화전위대 레크라에 참여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처럼 가난에서 비롯된 조코의 노여움은 벌레보다 못한 감옥살이에서 숙성했고 다시 세상에 돌아나와서도 붓을 들 수 없었던 현실 속에서 폭발력을 얻어 결국 ‘노여움의 예술’로 승화해내기에 이르렀다.

흙(갈색)과 멧돼지(죄)가 조코 예술의 색감이고 밑감이었다면 노여움(정화)은 조코 예술의 기운이었다. 조코는 흙(농업중심사회)과 멧돼지(정치적 반역)와 노여움(혁명)을 통해 더도 덜도 없이 인도네시아 사회를 가장 정직하게 규명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인도네시아의 갈 길을 제시했다.

예술가 조코는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선물이었다.

족자카르타=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