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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유와 해방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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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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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침략 궤변, 100년 전 청일전쟁 일으킨 일본의 논리를 빼닮았다

미국의 침략군은 이라크에서의 점령 전쟁을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 또는 ‘이라크인들을 위한 해방 작전’ 등으로 부른다. 그들의 이와 같은 궤변은, 태평양 지역의 최근 역사에서도 볼 수 있었다. 1894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내정 개혁’, ‘야만적인 청나라 응징’ 등의 명분을 내걸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명분은 동양 평화의 유지와 조선 왕실의 존엄 유지, 악정과 폐습의 개혁 등이었다. ‘주민들을 위한 은혜로운 점령’이라는 궤변의 골자는 100년 전의 일제나 오늘의 미제가 별로 다르지 않다. 베트남 전쟁에서 양민을 포함해 약 400만명의 베트남인들을 학살한 미국이 전쟁의 명분으로 ‘남베트남 주민의 자유 보호’를 내걸었던 것도 다 기억하는 일이다. 1980년대 내내 이란과 전쟁 중인 후세인을 지원하고 화학무기의 구성 요소까지 팔아준 미국이 지금 와서 후세인을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될 독재자’라고 하는 것은 희대의 희비극이지만, 자유나 평화·독립·개혁 등을 들먹이는 침략자의 궤변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들은 왜 친미 부역을 거부하는가

은혜로운 미군들? 이라크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미군이 바그다드의 한 학교에서 찾아낸 AK-47 탄창박스를 부수고 있다.(사진/ GAMMA)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비교를 할 수 있다. 100여년 전 청일전쟁의 경우,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개화 지향적인 조선 지성인들도 ‘조선 독립의 쟁취’에 대한 일제의 궤변을 믿었다. 그 중엔 일제에 붙어서 영달을 누려보려는 ‘일신 영달형 친일파’도 있었지만, 일본의 ‘지도와 지원’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순진하게 믿은 인물들도 있었다. 대일 종속적인 갑오내각(1894~95)에 참여한 김윤식이나 어윤중, 김홍집과 같은 정치인들에게 나름의 애국적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 대다수 사학자들의 판단이다. ‘약소국 문명화에 불가피한 시련’이라고 받아들인 신지식인들도 꽤 있었다.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군의 간섭이 ‘공산화를 막는 필요악’이라고 믿은 남베트남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는 과연 어떨까? 미국의 침략이 ‘독재자 후세인 제거를 위한 필요악’이라고 믿는 이라크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침략 첫날부터 미국과 영국의 신문·방송 기자들이 가장 열심히 찾은 것은 침략자들을 환영하는 대중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공중파를 타야 명분 없는 전쟁에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침략군의 위세에 눌리거나 식량품을 주는 식의 유혹에 넘어간 일부 주민들이 카메라 앞에서 미군들과 어설프게 악수를 나눈 장면은 침략 개시 직후 며칠 동안 미국 언론의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바로 같은 지점에서 미군에 대한 민중 저항이 곧 일어난 사실은 그 장면들의 진가를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침략자들이 가장 기대했던 남부 시아파들의 대다수도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당했음에도 친미 부역을 거부해왔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뒤에도 시아파 군중이 미군의 도움으로 급거 귀국한 친미적 망명 정치인 압둘 마지드 알코에이(Abdul Majid al-Khoei)를 처단했고, “후세인도 미군도 다 반대한다”는 표어 아래 데모를 했다.

일부 시아파 지도자들이 미군과의 협상에 응하기도 하지만, 그들마저 미군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있다. 후세인 정권의 기반층인 중부 수니파는 물론 ‘소외층’으로 분류돼온 남부의 시아파까지 전쟁 기간에 반침략 게릴라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이미 여러 보도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직후 침략자들을 반기는 몇몇 이라크 주민들의 얼굴이 등 미국 방송에 의해 세계의 공중파를 탔지만, 이들이 극소수였다는 사실은 곧 여러 외신에 의해 확인됐다(“미군환영·약탈자는 소수, 대부분 속으로 울음 삼켜”- <한겨레> 2003년 4월18일).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던 바그다드 함락이 이라크군 수뇌부와 미군의 모종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들을 서방의 몇몇 신문이 보도했지만, 아직 확증이 없어 이라크 지도부의 일부가 침략자에게 매수됐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군 지도자 몇 사람이 매수됐다 해도, 이는 유력한 친미적 세력 집단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침략자들과 현지에서 유일하게 조건부 협력하는 유력한 세력은 북쪽의 쿠르드족인데, 그 지도자들마저 후세인에게 군정을 베푼 뒤에 이제 친미 괴뢰정권을 세우겠다는 미국의 계획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또한 이미 10여년 동안 준독립 상태에 있는 그들의 거주지역은 실제로 ‘이라크’라고 부르기 어렵다.

‘민주화’는 일방적 선물이 아니다

전쟁기간에 이라크 내에서 친미 부역자들이 별로 생기지 않은 이유를 미국의 언론들은 주로 ‘후세인 정권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진회 회원 수가 늘지 않는 이유를 ‘폭도(의병)의 위협 때문’이라고 했던 통감부 관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친미 분자로서 ‘커밍아웃’해도 두려울 것이 없는 해외에서 사는 이라크인들이 과연 어떤가? 그들 중에서 미국의 침략을 ‘문명화를 위한 필요악’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까?

전쟁 위협이 현실화될 때부터 노르웨이에서는 이라크 이민자들과의 인터뷰들이 거의 매일 텔레비전과 신문을 장식했다. 이들 대다수가 후세인으로부터 살인적인 ‘종족 말살정책’을 당한 쿠르드족과 소외층의 시아파임에도, 그들 중에 미국의 침략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후세인 독재의 종식을 바라고 있었지만, 미국 침략 이후에 들어설 친미 괴뢰정권 역시 대외 종속의 방향만 다를 뿐 똑같은 독재를 계속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민주화’는 국내 지식인과 민중의 투쟁에 의한 것이지 미군이 ‘일방적으로’ 선물해주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한 거의 모든 이라크인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전쟁 피해를 예상하고 있었으며 국내 친척과 친구들의 생사에 큰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내 가족이 폭탄에 맞을 것 같아 두려워 잠을 못 잔다”는 것은 그들의 발언이었다. 민간인 피해가 수천명에 달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현재로서 노르웨이 거주 이라크인들의 우려가 충분한 근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약속한 ‘해방’을 순진하게 믿어주기는커녕, 대다수가 미국의 침략을 ‘필요악’이 아닌 ‘절대악’으로 본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는 약 1천명 이상의 이라크인들은, 곧장 편안한 이곳을 떠나 고국에 가서 반침략 투쟁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결심을 밝혀 이곳 노르웨이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http://www.dagsavisen.no/innenriks/2003/04/722866.shtml). 후세인 독재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그 독재 체제와 가장 일관되게 투쟁해온 이라크 진보적 민중의 대표자인 이라크 공산당(http://www.iraqcp.org/framse1/)도, 미국 침략에 대한 반대를 당론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지금도 이라크 공산당이 미국의 점령군과 협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점령자 미국은 과연 누구를 그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라크를 통치하려고 하는가? 미국 국회가 1998년에 ‘이라크 해방 법령’이라는 희귀한 명칭의 법을 통과시켜 1억달러를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려는 반대파’에 투자했지만, 과연 그 투자를 받은 집단들이 민주주의나 이라크 민중과 하등의 관계가 있을까?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돈을 받아온, 그리고 미국을 위해 침략군 보조원의 훈련을 맡아 이제는 이른바 ‘과도정부의 수반’(즉, 괴뢰정권의 괴수)으로 유력시되는, ‘이라크국민회의’(INC·Iraqi National Congress, http://www.inc.org.uk/)를 1992년에 런던에서 창립한 ‘반대파의 지도자’ 아마드 찰라비(Ahmad Chalabi)의 경우를 보자. 왕족에 가까운 정상배(政商輩) 재벌 가문 출신인 그는 1958년 민주혁명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해외에서 줄곧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온 찰라비는 미국 국회의 일부 의원과 부대통령 체니 등과의 친분관계를 통해 큰 후원금을 따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라크 내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찰라비 등 ‘반대파’의 실체

조악하게 만든 성조기를 들고 미군을 환영하는 바그다드의 여인들. 침략 개시 직후 며칠 동안 미국 언론의 지면을 장식했다.(사진/ GAMMA)
찰라비가 1980년대에 요르단에서 ‘페트라’ 은행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상당액(약 2억달러)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아 아직도 요르단에서 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민주적(?) 반대파’ 지도자들의 범죄 경력이 훨씬 더 끔찍하다. 예컨대 1996년에 이라크를 떠나 망명한 뒤에 줄곧 미 중앙정보국(CIA)을 위해 봉사해온 니자르 알카즈라지(Nizar al-Khazraji) 장군은, 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방법으로 1980년대에 약 10만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한 장본인이다(이에 대한 인권단체 보고서 http://www.hrw.org/press/2002/11/iraq-denmark.htm). 사기꾼과 후세인의 전직 하수인들을 ‘민주적 반대파’로 변장시킨 미국이 그 저질 괴뢰를 내세워 전후의 이라크를 다스릴 생각이라면 미래가 정말 캄캄해 보인다.

옛날에는 피침략 민족의 지성인들 일부분이 침략자의 ‘문명화’와 ‘자유’ 궤변에 넘어가곤 했지만, 현재 이라크에는 극소수의 범죄적 망명객 이외에 이렇다 할 만한 친미 부역 집단이 없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일 것이다. 아랍 전역에서 대미 예속을 극복해야 발전이 가능하다는 자각이,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지성인들의 상식으로 굳어져 있는 상태고, 걸프 전쟁 때의 야만적 폭격과 그 뒤의 경제제재로 엄청난 인명손실과 가난으로 후퇴한 이라크에서 친미는 곧 민족 반역을 의미한다. 현재 중동에서는 근대 지상주의적 궤변을 내세워 피침략 민족 지성의 두뇌를 마비시킬 수 있는 상황도, 전통적인 ‘분할 통치’ 전략을 펼칠 형편도 아니다. 우군이 없는 지대로 진입한 미군은 그로 인해 ‘공포작전’을 펼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좀더 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의 반발을 살 것이다. 지금은 침략자들이 ‘승리’에 도취된 상태지만, 그들이 거센 민중적 저항에 부딪칠 순간은 머지않았다.

참고 자료

1. 이라크 ‘반대파’ 관련의 영국 자료:

http://news.bbc.co.uk/2/hi/middle_east/1881381.stm

2. 침략군 보조원의 사전 모집에 대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기사:

http://www.csmonitor.com/2002/1121/p01s02-wome.html

3. ‘반대파’의 실체를 다루는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라는 비판적 웹진의 기사:

http://www.fpif.org/briefs/vol6/v6n10iraq.html

4. 아마드 찰라비의 사진, 인터뷰: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saddam/interviews/chalabi.html

5. ‘민주 반대파’에 대한 미국의 지원 관련 보고서:

http://www.fpif.org/papers/iraqoppsupp.html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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