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산에서 ‘전쟁 반대’를 외치며 저주받은 요정 이호의 대답을 듣다
포연으로 뒤덮인 살상의 세계를 벗어날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바로 올림포스산이었다. 올림포스산에 살고 있다는 제우스를 만나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전해주고 싶었다. 물론 올림포스산의 정상을 정복한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됐다. 사실 ‘정복’이란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류의 심장과 의식에 비수를 꽂고 말았다.
올림포스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역사교과서에 쓰여진 정복영웅들인 칭기즈칸, 나폴레옹, 알렉산더…. 수많은 영웅들은 한낱 학살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번 전쟁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낸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약한 나라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부터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마침내 전 세계를 정복해 ‘영웅’의 타이틀을 획득하려는 속셈인지 모른다. 그리고 먼 훗날 역사교과서에서는 부시가 아랍세계에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아랍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기록될지 모르는 일이다. 마흔살이 되도록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한때는 이 풍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장한 일이라고 자위했지만 이제는 살아남은 것이 점점 부끄러워지고 있다.
아테네에서 올림포스산을 향하기로 작정한 날 아침, 3월의 아테네 하늘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뒤 유럽에서 가장 반미의식이 높다는 그리스인들의 얼굴에서는 밝은 표정이라곤 한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모두 미국과 부시를 비판하는 소리 일색이며 모두가 처참하게 짓밟힌 듯한 모습이다. 올림포스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에 시원스레 펼쳐진 라리사 평야를 보면서도 만감이 교차한다. 아직도 기차 밖의 세상에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하얀 눈이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밀려오는 봄기운에 대한 겨울의 마지막 저항인 양, 그동안 모아둔 눈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듯 그렇게 처절히 뿌려대고 있다. 이제 기차는 산악지대로 접어들고 있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경이로운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자, 드디어 자연의 위용은 인간들의 번뇌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산 밑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리토호로’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잠시 들른 타베르나(대중음식점)에서는 레치나(솔향이 첨가된 그리스 와인)에 취한 한 노인이 지난날 자신이 뱃사람으로 부산이나 인천을 자주 드나들었다면서 여행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서 올림포스산의 정기로 인해 힘센 장수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할 때는 마치 나 자신이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주막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음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난 뒤 신발끈을 동여매고 올림포스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리스 신화의 전승자인 오미로스(호머)가 신들의 산인 올림포스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지리적 위치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다. 터키와 사이프러스의 올림포스산을 신화의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 북부의 테살리 지역에 위치한 올림포스산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에 위치한다는 것이 결정적 요소가 됐겠지만 험한 산세와 함께 태고 때부터 내려오는 신비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영산으로서 지금까지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시 모여드는 은자들
산 아래 동네인 리토호로에 사는 주민들 중에서도 산 정상에 오른 사람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고 들었다. 이곳에 찾아오는 미국이나 유럽의 등산객들은 올림포스를 정복한다는 야망으로 오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올림포스산은 숭배 대상일 뿐이다. 어쨌든 산으로 향한 길은 관광지로 지정된 때문인지 잘 닦여 있었다. 이른 아침에 산을 향해 걷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산을 바라보니 흰 눈에 싸인 산봉우리들이 햇빛에 반사돼 환한 빛을 드러낸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제 오늘이라는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다.
거의 한 시간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그리스정교회 수도원 ‘아기오 디오니시우’가 나타났다. 이 수도원은 15세기에 지어졌는데 2차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독일군은 수도원이 반나치 게릴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폭격했다. 올림포스산에 지어진 수도원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그리스 사람들도 산의 정기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부터 거룩한 산으로 여겨진 올림포스산에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오래전부터 숲과 동굴 등에서 은둔하며 영혼을 갈고 닦는 수도사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2천년 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리스의 신화와 전설을 금기시하고 강제로 잊게해 서서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드물어졌다. 요즈음 다시 올림포스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옛날처럼 숲이나 동굴 속에 은둔하면서 수행하려는 사람들도 모여들고 있다. 지난해 여름 숲 속에서 혼자 한달간 머물렀다는 한 영국인 교사는 “고대 신화의 신들과 여신들의 존재를 아주 강하게 경험했다”고 말했다.
올림포스산은 우리나라 산에서도 볼 수 있는 소나무나 밤나무, 떡갈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결코 낯설지 않다. 수도원을 지나 거의 한 시간을 더 걷자 절경의 계곡이 드러났다. ‘마브롤롱고스’ 계곡이 발 아래 장관을 드러내고 그 밑으로는 에니페아스 강도 보였다. 이곳에서 망원경으로 새를 관찰한다는 디오니시우 수도원의 수도사는 에니페아스 강이 여신 이라의 저주로 인해 바다에 도달하기 직전, 땅 속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전설을 들려주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열심히 걸은 덕분에 제법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이제는 메아리의 진원지로 알려진 올림포스산의 메아리를 듣기 위해 힘차게 소리쳤다. “전쟁 반대”라고 소리치자, 저편의 산에서도 곧 이어 “전쟁 반대”라고 대답한다. 다시 힘차게 “부시, 넌 끝났다”고 하자, “넌 끝났다”고 맞장구친다. 확실히 올림포스산의 메아리는 다른 산보다 더 긴 것 같다.
열두 신들은 내 외침을 들었을까
신화에 의하면 이호(영어로는 에코·메아리)는 원래 아름다운 요정이었다.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함께 짐승들을 쫓아다니는 활동을 즐겼다. 그러나 이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었는데, 누구에게나 말을 걸거나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제우스의 부인인 여신 이라가 자신의 남편을 찾아나섰다. 언제나 제우스를 못 미더워하던 여신은 가끔 남편의 동정을 물색해 남편과 어울리는 여성들에게 가혹한 처벌를 내리곤 했다. 하지만 제우스가 요정들과 어울릴 때는 언제나 이호가 앞장서 이라의 길을 막고 말을 걸어 제우스와 요정들이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했다. 이날도 이호는 이라에게 다가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호의 의도를 알고 있던 이라는 이호에게 저주를 내렸다. “너는 마지막 말을 할 수 있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금지한다.” 그 뒤 이호는 다른 사람의 마지막 말을 반복하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미남이던 나르시소스에 반했던 이호가 은둔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마디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나르시소스의 끝말만 반복했던 이호는 수치심에 자신을 동굴과 숲 속에 가두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올림포스산을 찾아오는 등산객들이 이호를 부르면 모습만 드러내지 않을 뿐 여전히 대꾸하고 있다.
정상을 향한 산길은 이미 눈으로 완전히 덮인 상태다. 이미 등산로도 눈으로 완전히 가려져 더 이상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땅한 장비도 없이 간단한 등산차림으로 올라온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산에서 살고 있는 제우스를 비롯한 열두 신들은 나의 간절한 소망을 메아리로 들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헤맨 올림포스산을 내려오면서 되찾은 건 마음의 평화였다. 평화로운 올림포스산의 기운이 전쟁에 휩싸인 인간세상을 지배해 하루빨리 평화가 오기만 바랄 뿐이다.
아테네=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사진/ 올림포스산의 최고봉인 미티카스봉이 백설이 덮인 채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는 신들의 궁전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아테네에서 올림포스산을 향하기로 작정한 날 아침, 3월의 아테네 하늘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뒤 유럽에서 가장 반미의식이 높다는 그리스인들의 얼굴에서는 밝은 표정이라곤 한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모두 미국과 부시를 비판하는 소리 일색이며 모두가 처참하게 짓밟힌 듯한 모습이다. 올림포스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에 시원스레 펼쳐진 라리사 평야를 보면서도 만감이 교차한다. 아직도 기차 밖의 세상에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하얀 눈이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밀려오는 봄기운에 대한 겨울의 마지막 저항인 양, 그동안 모아둔 눈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듯 그렇게 처절히 뿌려대고 있다. 이제 기차는 산악지대로 접어들고 있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경이로운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자, 드디어 자연의 위용은 인간들의 번뇌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산 밑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리토호로’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잠시 들른 타베르나(대중음식점)에서는 레치나(솔향이 첨가된 그리스 와인)에 취한 한 노인이 지난날 자신이 뱃사람으로 부산이나 인천을 자주 드나들었다면서 여행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서 올림포스산의 정기로 인해 힘센 장수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할 때는 마치 나 자신이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주막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음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난 뒤 신발끈을 동여매고 올림포스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리스 신화의 전승자인 오미로스(호머)가 신들의 산인 올림포스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지리적 위치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다. 터키와 사이프러스의 올림포스산을 신화의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 북부의 테살리 지역에 위치한 올림포스산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에 위치한다는 것이 결정적 요소가 됐겠지만 험한 산세와 함께 태고 때부터 내려오는 신비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영산으로서 지금까지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시 모여드는 은자들

사진/ 올림포스산 자락에 자리잡은 수도원 디오니시우. 최근 다시 수도사나 은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사진/ 그리스신들의 천상회의를 그린 그림.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올림포스산을 숭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