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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도살자에게 동심을 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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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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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명상과 반전운동의 삼위일치, 미국 시인 샘 해밀의 현대판 은자생활

여름의 풀
대장군에게 남는 유일한 것은
제국의 꿈….

1991년에 걸프 전장으로 떠나던 페르시아만 주둔 미군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는 일본의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1644~94)의 하이쿠(徘句·일본의 전통시가) 영역본을 한 미국 시인으로부터 우편으로 받았다. 제국의 꿈의 허황함을 가리키는 이 명작을, 수십만명의 이라크인들을 재물로 삼으려는 슈워츠코프 장군에게 보낸 시인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이 시의 깨달음의 에너지가 제국 도살자의 동심(童心), 오래전부터 잃어버린 그 인간적 양심을 되찾게끔 도와주리라 정말 믿었을까 어쨌든 시인에게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우리 군대를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슈워츠코프가 우편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보내는 양식의 답신이었다. 우리 군대를 지원한다 공룡과 같은 미 제국은 시인을 파리쯤으로 알았던 셈이다.

해병대에서 반전평화와 인연


사진/ 1991년 페르시아만 주둔 미군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왼쪽)와 그에게 마쓰오 바쇼의 시를 보낸 미국 선불교 시인 샘 해밀. (SYGMA)

12년 전에 순진하게도 살육자들의 양심을 바쇼의 시로 깨치려고 했던 미국의 선불교 시인 샘 해밀(Sam Hamill·59). 지금 그는 훨씬 더 적극적이며 대중적인 시인들의 반전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다. 2월12일에 그가 이라크 침략 계획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백악관에서의 시 토론회 참석을 거부하여 동료 시인들에게 반전의 시를 쓰자고 호소하자 부시의 전쟁을 비난하는 시들이 그의 웹사이트(poetsagainstthewar.org)로 쇄도했다. 웹사이트의 1만편(!) 넘는 반전의 시 중에는 저명한 시인의 명작급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청년 학생들이 보내는 처녀작들도 있다. 예를 들어, 12년 전에 어린아이로 부모와 함께 사우디에 살면서 걸프 전쟁을 지켜본 일이 있었던 핼리 안젤라 브룩스(Halley Angela Brooks·17)양의 시를 보자.

나는 까맣게 된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어린 눈들을 기억한다
눈물이 글썽이는 어린 눈들…
잠자다가 폭발의 굉음을 듣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나야 그나마 행운아다.
나는 잠자다가 갑자기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50살쯤 되는 남자들을 안다.
그들은 아내를 때리고 아이를 학대하고 술에 늘 취해도
어디에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게 원수가 도처에 있고,
그들에게는 죽음이 도처에 있다.
우린 그들을 ‘전쟁의 영웅’으로 부른다!”

예민한 청년의 눈으로는 제국의 희생자들의 죽음과, 술과 폭력으로 보내는 제국의 살육자들의 외롭고 처절한 만년이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남녀노소의 반전 시를 모으는 샘 해밀은 과연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와 반전평화, 선불교의 인연을 맺어준 것은 군대였다. 1963년 해병대 군인으로 일본에서 복무했을 때, 동양 문화와 불교에 매력을 느껴 자신의 손으로 누구도 살육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예편하여 본국에 돌아간 뒤 그는 시애틀 근처의 한 한적한 곳에 일본식 집을 지어 참선과 시작(詩作)의 현대판 은자 생활을 시작했다. 자작 시집()들도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가 설립한 출판사 ‘코퍼캐년’(coppercanyonpress.org)은 미국에서 극동 문화 소개에 기여한 바가 대단히 크다.

소식과 이태백의 시집도 번역소개

사진/ “미 제국이라는 커다란 살인기계 안에서 일군의 정상적인 지성인들이 존재한다는 소식은 반갑고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뉴욕 중심가의 반전 시위. (GAMMA)

바로 그 출판사에서 쉬운 문체로 대중적으로 번역된 동파(東坡) 소식(蘇軾·1036∼1101)이나 이태백(李太白·701∼762)의 시집들이 나와 극동의 시성(詩聖)들을 미국인 독자에게 더욱 친숙한 인물로 만들었다. 샘 해밀이 직접 고전 한시를 번역하기도 한다. 최근에 그가 펴낸 고전 한시 300선의 번역(,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by Sam Hamill, BOA Editions, NY)들 중에서,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이태백이나 왕유 (王維)에 비해 훨씬 덜 알려진 두보(杜甫·712~770)의 시를 많이 읽어볼 수 있다.

(…)친한 벗은 한자 소식 없고 親朋無一字
늙고 병든 몸은 외로운 배에 있다 老病有孤舟
관산 북쪽은 아직 전쟁 중이라 戎馬關山北
난간에 기대어 눈물과 콧물을 흘린다 憑軒涕泗流
- ‘登岳陽樓’

내란과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티베트와의 전쟁 이야기를 들은 두보가 죽기 2년 전에 쓴 슬픈 시다. 이처럼 전쟁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데, 전쟁 소식을 기뻐하는 미국의 극우들을 과연 정상적인 인간으로 봐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자신의 시를 화두처럼 오랜 시간 동안 종이에 쓰지 않고 입으로만 외우면서 퇴고한다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당나라 시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는 선(禪)의 시인 샘 해밀. 그는 전쟁뿐 아니라 이른바 ‘미국적인 생활양식’도 마땅히 부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즉흥적인 욕망 충족을 산업적으로 생산·판매하는 미국의 대중적 소비 문화는 개인의 자율적 정신생활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든 질문들에 대한 ‘정답’들이 이미 대량으로 생산된 문화, 일률적인 ‘성공’- 즉, 이름과 부- 을 최고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모두에게 강요하는 문화는 남과 다른 자신을 찾으려는 진정한 개인주의적 구도자가 숨을 못 쉬게 한다. 개인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불허하는 대량 생산과 소비, 그리고 그러한 대량 우민화의 지옥에서 동심과 양심을 잃지 않으려는 그에게 은둔생활이야말로 가장 선호되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시마(詩魔)에 걸린 시애틀 근처의 선객(禪客)이 시작한 시인들의 반전운동이 부시의 도당이 살육하고자 하는 수십만 내지 수백만명의 이라크인들을 살릴 수 있을까 물론 시인들의 고요한 목소리가 포성을 잠재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무고한 인간의 도살을 주업으로 하는 미 제국이라는 커다란 살인기계 안에서 선근(善根)을 열심히 닦는 일군의 정상적인 지성인들이 존재한다는 소식은 반갑고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침마다 명상하면서 온 마음으로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미래에 희망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25살의 음악가 아만두스 올리엔(Amandus Aalien)이 지은 반전의 노래다.

“전쟁의 아이들이 나를 탓하지 않는다 해도,
나 스스로 내가 죄인의 한 사람임을 안다.
우리가 지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구를 돈과 명예를 위해 망치고 있다.
전쟁의 아이들이 나를 탓하지 않는다.
전쟁을 현실로만 아는 그들은
옳고 그릇됨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될 수는 없다!
이제는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The children of war don’t accuse me
But I know that I am to blame
What do we do to the earth,
we destroy it for money and fame
The children of war don’t accuse me
They haven’t learned right and wrong
They think it’s like this it should be
This cannot last very long
We have to sing a new song)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자료링크

1. 샘 해밀 인터뷰: http://www.thedrunkenboat.com/hamill.htm
2. 샘 해밀의 반전운동에 대한 시애틀 지역 신문의 기사:seattlepi.nwsource.com/local/109071_poets18.shtml
3. <플라우셰어스>에 기고한 샘 해밀의 시:http://www.pshares.org/Authors/authorDetails.cfmprmAuthorID=643
4. 샘 해밀의 사진, 소개: http://www.poets.org/poets/poets.cfmprmID=750
5. 샘 해밀 시 낭독 오디오:http://www.counterbalancepoetry.org/samhamil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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