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나잉옹의 고백 III-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혁명적 애정관계
“벌써 12년간이나… 혁명에 대한 애착이 결국 결혼생활 4년 동안의 애정보다 더 중요한 건지….” 결혼한 지 4년 만인 1988년, 아내를 고향에 남겨둔 채 혁명의 꿈을 안고 버마-타이국경으로 온 한 동지는 최근 밀선을 통해 고향의 부인으로부터 이런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동지들의 ‘가족정신’이 뿌리내리다
우리 모두는 이해한다. 오랫동안 홀로 남겨진 아내들의 이 감정 폭발을. 혁명에 대한 애착과 결혼에 대한 애정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의 부인이 말한 혁명에 대한 우리의 애착과 혁명전선의 동지애는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고향을 떠나올 때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한 정은 그리 힘들지 않게 끊을 수 있었으나, 혁명에 대해서는 쉽게 그럴 수가 없다.” 한 동지의 말처럼 이게 진실이다.
개인적인 이익과 상관없는 12년간의 혁명과업을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자유’에 대한 즐거움 탓이다. 물론 이건 아이들이 가출하면서 느끼는 종류의 자유와는 다른 것이고. 내가 혁명에서 느끼는 자유의 즐거움은 압박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며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믿음 속에서 표현하고 반성하는 자유에 대한 배움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이다. 자유를 추구하면서 나는 자신을 발견하는 ‘부수익’도 얻었다. 내가 자유를 발견했을 때, 마침내 나는 내 두발로 일어서기를 시도했다. 이건 스스로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나는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의장으로서 혁명공동체의 동지들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했고, 스스로 생존할 때만이 독립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걸 성숙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기회로 여겼고 또 비록 상황은 가혹했지만 자유의 경험은 민주화를 위한 혁명전선의 고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모두에게는 쉽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애착이나 애정 같은, 말하자면 동지애가 형성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처음 국경 밀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대다수는 서로 얼굴도 몰랐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공동의 신념 아래 함께 살기 위해 그리고 혁명적인 삶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지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셈이다. 우리의 밀림생활은 고향의 경험과 같을 수도 없었고 같지도 않았다. 병영에서는 고향의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음식을 마련해주셨던 것처럼 우리 서로가 부모님이 되어 동지들의 먹을거리를 장만했다. 부모님이 만들어 주셨던 침대에서 잠을 잤던 우리는 이제 각자 부모님이 되어 동지들의 병영을 만들었다. 병든 부모님 보살피기를 주저했던 우리는 지금 대신 병든 동지들을 보살피고 있다. 가족과 집을 떠나온 우리에게 동지들이 유일한 가족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가족정신’이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담요 한장을 두명이 덮었고 슬리퍼 하나를 순서대로 신기도 하면서 나는 동지들의 것을, 그들은 나의 것을 내것처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코 누구도 질투하거나 근심하거나 쩨쩨하게 굴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는 잠자리도 없었다. 누울 만한 빈자리가 보이면 그게 누구의 자리든 함께 몸을 부대꼈다. 언제든 어디서든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런 동료의식과 가족의식은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최고전략가 툰우의 죽음
밀림의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우리는 수많은 죽음과 결혼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목격했다. 내가 밀림에서 처음 맞이한 동지의 죽음은 말라리아 때문이었다. 그는 예전에 우리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의 죽음 앞에 참으로 공허해졌다. 병영의 모든 이들은 낙담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 그의 장례식을 치렀다.
내게 가장 큰 슬픔을 주었던 동지의 죽음은 버마학생민주전선 군사작전의 최고 전략가로 모두가 신뢰했고 내가 크게 의지했던 툰우였다. 그의 죽음은 버마정부군이 맹렬하게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본부를 공격하고 있던 1995년이었다. 정부군의 공격이 극에 달했던 이 기간에 나는 주로 배를 타고 전선 시찰을 다녔다. 하루는 길을 떠나기 위해 배를 준비하고 있던 내게 툰우가 다가와 말했다. “미스터 체어맨, 나도 함께 가겠소.” 나는 “당신은 어젯밤에 한잠도 못 잤으니 여기에 남게”라고 말했으나 그는 “괜찮소. 이건 내 의무이기도 하오”라며 따라나섰다.
결국 나는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사실은 잠시나마 그에게 전투로부터 긴장을 풀게 해주고 싶었던 뜻으로. 그러나 우리가 탄 전선 시찰용 배는 바위에 충돌해서 전복되었다. 당시 살윈강은 그리 깊지는 않았으나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랐다. 툰우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적들에 포위된 상태였던 우리는 그의 주검을 수색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동지들은 참으로 큰 비탄에 잠겼다. 툰우의 장례식에서 우리 모두는 울었다. 나도 몹시 울었다. 버마에서 밀령을 통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나는 결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동지, 툰우를 잃은 슬픔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동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버리고 버마를 위해 몸바쳐 싸우다 불의의 죽음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사라져간 동지들의 끝나지 않은 과업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은 책임지고 혁명의 완수를 위해 노력할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다짐했다.
사라져가는 동지들의 영혼 아래, 한편 새삶을 건설하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인구도 늘어갔다. 대다수 동지들이 처음 혁명에 참가할 무렵 미혼이었으나 그사이 세월이 흘러 많은 이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밀림의 결혼식? 나는 직책상 동지들의 부모님을 대신해서 신부- 국경의 소수민족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 쪽 부모님을 만나 상견례를 하고, 동지들은 새로 태어나는 부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그들이 살 집을 지어준다. 그리고 신혼부부는 밀림에서 마련한 조촐한 먹을거리로 동지들을 초청해 함께 한끼를 나누는 것이 밀림결혼식의 전부다.
이렇게 병영에서 태어나는 새 생명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 아이들은 결국 우리와 같은 혁명전사로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버마의 미래가 달린 이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한 어린 시절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특히 교육사업에 집중했다. 우리는 밀림 속에 학교부터 지었다. 처음엔 보육원을 지었으나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지금은 고등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나는 밀림 속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훗날 이 아이들이 자랐을 때 안전하고 풍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러다보니 처음 우리가 국경에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책무가 커져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과 동시에.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는 절대금기
다른 동지들처럼 나도 혁명 속에서 결혼을 했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나는 이제 결혼 1주년을 앞두고 있다. 내 아내는 나와 같은 신념을 지녔고 같은 삶을 살아온 이다. 아내는 1990년 밀림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98년 다시 국경밀림으로 돌아와 현재 혁명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국경으로 되돌아온 1998년부터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혁명의 조건 속에서 혁명의 지도자라는 나의 위치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처음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든 장애물을 넘어섰다. 혁명전선의 시작으로부터 살아 있는 현재까지를 통틀어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한 여성으로부터 지금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내 아내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우리 부부의 사랑에는 우리 둘만을 위한 삶을 건설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주저없이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혁명 속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듯이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개인적인 것들보다는 동지들과 혁명을 위한 것들이 늘 우선된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혁명과 결혼한 신랑과 신부 모두에게 주어진 공동의 과제다. 따라서 모든 동지들이 결혼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항상 맨처음 묻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너의 혁명적인 삶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 부부에겐 잠자리에 들 때말고는 개인적인 시간이 없다. 귀가시간과 출근시간이 따로 있을 수 없고 토요일과 일요일 같은 휴일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때가 바로 근무시간이고 이 근무시간은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 계속될 성질의 것이다. 이건 규칙이나 명령이 아니라 다만 동지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판단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동지들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동지들은 그만큼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무도 강요한 적이 없는 금기 같은 게 하나 있다. 절대로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발생하면 조건없이 일을 찾아 길을 떠나고 공동체의 남은 이들이 우리의 가족들을 돌보는 책임을 지게 된다.
사실은 우리의 혁명적인 삶은 상호 깊은 애정으로 묶여 있고, 동지들에 대한 책임은 미래에 대한 출발로 늘 인식되고 있다. 여기 이 밀림은 작은 사회지만 우리가 건설하고 싶은 미래와 매우 닮았다. 조직을 위해 모든 우선권을 바치는 혁명에 대한 헌신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다른 동지들의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믿고 있는 사회다.
여기서, 나는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의문들을 <한겨레21> 독자들에게도 남기고자 한다. “당신들은 우리의 혁명적인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까?”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개인적인 이익과 상관없는 12년간의 혁명과업을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자유’에 대한 즐거움 탓이다. 물론 이건 아이들이 가출하면서 느끼는 종류의 자유와는 다른 것이고. 내가 혁명에서 느끼는 자유의 즐거움은 압박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며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믿음 속에서 표현하고 반성하는 자유에 대한 배움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이다. 자유를 추구하면서 나는 자신을 발견하는 ‘부수익’도 얻었다. 내가 자유를 발견했을 때, 마침내 나는 내 두발로 일어서기를 시도했다. 이건 스스로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나는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의장으로서 혁명공동체의 동지들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했고, 스스로 생존할 때만이 독립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걸 성숙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기회로 여겼고 또 비록 상황은 가혹했지만 자유의 경험은 민주화를 위한 혁명전선의 고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모두에게는 쉽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애착이나 애정 같은, 말하자면 동지애가 형성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처음 국경 밀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대다수는 서로 얼굴도 몰랐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공동의 신념 아래 함께 살기 위해 그리고 혁명적인 삶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지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셈이다. 우리의 밀림생활은 고향의 경험과 같을 수도 없었고 같지도 않았다. 병영에서는 고향의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음식을 마련해주셨던 것처럼 우리 서로가 부모님이 되어 동지들의 먹을거리를 장만했다. 부모님이 만들어 주셨던 침대에서 잠을 잤던 우리는 이제 각자 부모님이 되어 동지들의 병영을 만들었다. 병든 부모님 보살피기를 주저했던 우리는 지금 대신 병든 동지들을 보살피고 있다. 가족과 집을 떠나온 우리에게 동지들이 유일한 가족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가족정신’이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담요 한장을 두명이 덮었고 슬리퍼 하나를 순서대로 신기도 하면서 나는 동지들의 것을, 그들은 나의 것을 내것처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코 누구도 질투하거나 근심하거나 쩨쩨하게 굴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는 잠자리도 없었다. 누울 만한 빈자리가 보이면 그게 누구의 자리든 함께 몸을 부대꼈다. 언제든 어디서든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런 동료의식과 가족의식은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최고전략가 툰우의 죽음

(사진/12년간의 혁명과업을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과 ‘자유’에 대한 즐거움 탓이다)

(사진/밀림의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우리는 수많은 죽음과 결혼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목격했다. 밀림에서 교육받는 아이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