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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35명을 구한 마지막 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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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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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에도 책임 다한 노르웨이 버스기사와 에티오피아 출신 살인범에게서 배우는 것

사진/ 살인범에게 칼을 맞으면서도 버스 추락을 막은 오둔 벨란드.
최근에 들은 대구지하철 참사 소식은 필자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의 원한을 삭이지 못해 살인마로 변해버린 사람의 범행과, 전동차 기관사를 비롯한 몇몇 지하철 관계자의 극도로 무책임한 대응과, 구명 시스템의 낙후성으로 거의 200명의 귀중한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상한다 해도 상처는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번 참사를 거울로 삼아 지하철 등 주요 공공시설의 구명 시스템이 한층 개선되리라 기대하면서도, 어떠한 개선도 사고 때의 완벽한 인명 구제를 보장할 수 없음을 동시에 인식해야만 한다. 시스템이 아무리 최첨단이라 해도 사고의 숙명적인 순간에 책임자 한 사람이 방심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한다면 피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기계에 의해 움직여지는 우리 세계의 엄연한 사실은, 기계를 다루는 한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수많은 인명의 생사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

사진/ 오둔 벨란드 사건을 다룬 노르웨이 신문의 인터넷 사이트. 대구 참사처럼 노르웨이 전국을 경악에 빠뜨렸다.


세계 최악의 원자력 사고로 기억되는 1986년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참사를 보자. 원자로의 안전장치가 부족한 면이 많았다는 것도 인정되지만 전문가들은, 실험을 진행하다가 사고를 촉발시킨 몇몇 기술자들의 무책임이 약 2천만명을 방사능에 노출시킨 참사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말한다.

결국 역설로 들리긴 하지만 현대 기술이 발전될수록 “한 사람의 마음속에 뭇 인류를 포함한 전 우주가 갖추어져 있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지나가는 한 생각 속에 우주의 삼라만유가 들어 있다)의 고대 동양철학 진리가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첨단 안전장치도 매우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원에게 늘 이웃을 생각하게끔 하는 ‘마음 여유의 사회’가 건설되는 것이 무엇보다 효과적인 안전장치가 아닌가 한다.

필자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2003년 2월16일에 노르웨이 전국을 충격을 빠뜨린 한 끔찍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서술에서 독자들이 볼 수 있듯 어떤 안전장치도 할 수 없는 역할을 한명의 의인(義人)이 다행히 해내 수많은 생명을 구해주었다.

…빼어난 자연미로 잘 알려진, 협만(피오르드)과 산이 만나 혼을 빼앗는 듯한 절경을 이루는 노르웨이 남부의 왈드레스 골짜기.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이 한적한 곳을, 일요일 저녁 한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승객들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산세를 구경하고 있었고, 운전을 하고 있는 기사인 39살의 오둔 벨란드(Audun Boeland)는 아내와 딸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빨리 가고픈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원래는 그날 저녁에 그가 핸들을 잡을 차례가 아니었는데, 급한 일이 있는 한 동료의 청을 들어주어 늦은 시간에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가려는 그의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버스가 바닷가를 지나가는 순간 한 승객이 갑자기 식칼을 빼들어 엉터리 영어로 누구도 이해 못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기사에게 총탄처럼 달려갔다. 누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에 그는 이미 식칼로 운전기사의 목과 등을 미치듯이 찌르고 있었다. 1분이 지나지 않아 칼을 맞은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숨지고 말았다.

그러나 괴한의 칼을 맞는 1분 동안 오둔 벨란드 기사는 승객 모두의 생명을 구한 가장 중요한 행동을 다행히 취했다. 굽어지는 길로 바로 협만의 얼어붙은 물을 향하고 있었던 버스의 브레이크를, 핸들을 이미 놓친 오둔 벨란드 기사는 생애의 마지막 1분 동안 밟은 것이었다. 만약 피를 흘리는 순간에 그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35명의 승객 전원은 물과 얼음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은 불보듯 뻔하다. 순직한 기사의 마지막 행동 덕분에 즉사를 면한 그들은 재빨리 비상구를 열어 성공적으로 대피했다. 몇십분 뒤에 범죄 현장으로 경찰이 출동했을 때, 범인은 아직 버스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경찰이 독한 최루탄을 뿌린 뒤에야 히스테리로 망아(忘我)의 경지에 빠진 그는 항복했다.

제3세계의 절망은 당신과 무관하지 않다

사진/ 86년 옛 소련에서 체르노빌 폭발사고. 기계로 움직여지는 세계는 기계를 다루는 한 사람의 마음가짐에 의해 수많은 인명의 생사가 결정된다.

26살 젊은 나이로 6개월 전 노르웨이에 와서 망명을 신청한 ‘피난민 신분 대기자(待機者)’로 밝혀진 에티오피아 출신의 범인은 어떻게 해서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됐을까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의 내전 시절에 그는 강제적으로 징집되어 어린 몸으로 군인이 된 적이 있었다. ‘어린이 군인’으로서 이미 살육에 직접 참가한 일이 있는 그에게는 남의 생명이 더 이상 고귀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인 그의 정신상태가 노르웨이에 와서 이민당국의 망명 허가 결정을 기다리는 마음 떨리고 지루한 시간 동안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망명 신청자의 숙소 동료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켰고, 왈드레스 골짜기에서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 콩고 출신의 동료인 망명 신청자를 이미 죽인 상태였다. 그의 범행은 물론 일차적으로 한 개인의 악행이지만, 노르웨이가 제3세계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제3세계의 빈곤과 전쟁과 절망이 노르웨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제1세계와의 불평등한 무역으로 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기 장사로 떼돈이나 벌고 있었던 미국·유럽·소련의 사주와 후원으로 몇십년 동안 내란을 겪고 있었던 에티오피아의 절망과 아픔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 세계 체제의 산물이다. 이 절망과 아픔이 에티오피아의 국경을 얼마나 쉽게 벗어날 수 있는지, 그래서 타지역의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슬픔을 줄 수 있는지, 내란 때 정신이 미쳐버린 ‘어린이 군인’이 노르웨이에서 저지른 행동은 잘 보여준다.

<누구를 위해서 종이 울리는가>라는 작품에서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1899∼1961)가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 당신을 위해서 울리는 걸로 알라”는 시를 제사(題詞)로 채택하지 않았는가 ‘삼천호구’(三千互具·삼라만상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탐욕이 만들어낸 비극이 결국 돌아와 우리를 강타하고 만다. 에티오피아나 아프간, 앙골라 등지의 기아와 전쟁과 죽음의 참극을 알리는 종의 소리를 외면하면 안 된다.

어떤 안전장치도 하지 못했을 일을, 오둔 벨란드라는 이름의 평범한 운전기사는 죽으면서 해냈다. 물론 이처럼 행동할 수 있는 배경에는 평소에도 남을 늘 배려해주고 자신의 일에 대단히 성실했던 그의 인품이 일차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요소를 따져보면 타자와의 연대와 타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인명 존중을 늘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교육도 이와 같은 의인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보인다. 만약 그가 다닌 학교에서 성적에 의한 등수와 등급이 일일이 매겨져 학우들이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했다면 그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남의 생명을 그렇게 귀중히 여길 수 있었을까

가장 믿을 만한 사고방지 시스템이란…

물론 학교부터 학생들 사이에 계급을 만드는 사회에서 자랐다고 해서 꼭 다 남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된다는 법은 없다. 타고난 천성과 개성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남과의 경쟁보다 남에 대한 존중과 자비를 교육의 과정에서 강조한다면, 그 학생이 큰 뒤에 오둔 벨란드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의 무리한 경쟁 부추기기와 성적을 절대시하는 학벌 계급문화를 우리는 보통 사고의 현장에서 남의 생명을 경시하는 행동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한 곳에서 뿌려진 이기주의와 아집의 씨는 반드시 또 다른 곳에서 악과(惡果)를 낳는다. 승객의 생명을 경시한 기관사 한 사람의 행동과 “남이 망해도 나 혼자 잘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어릴 때부터 심어주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인륜 파괴적인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서로 무관하지 않는다.

평범한 버스기사이던 오둔 벨란드는 현재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만인의 사표(師表)로 추앙된다. 그의 행동이 어린이, 청소년들 학교 교육의 교육 자료가 되는 것은,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고방지 시스템이 아닌가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자료:

1. 체르노빌 참사의 원인 분석: http://www-bcf.usc.edu/~meshkati/causes.html
2. 오둔 벨란드의 사진:http://www.aftenposten.no/english/local/article.jhtmlarticleID=493169
3. 범죄의 현장에서: http://www.aftenposten.no/english/local/article.jhtmlarticleID=492044
4. 대중지 에 나온 오둔 벨란드의 사진과 관련 기사:http://www.vg.no/pub/vgart.hbsartid=14061
5. 이 사건 이후 정신이상인 망명 신청자를 위한 시설을 따로 건설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짐: http://www.vg.no/pub/vgart.hbsartid=13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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