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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디오니소스를 위해 한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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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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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재발견(7)

이 술의 신은 왜 인간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나… 그리스 비극도 결국 그에게서 나와

아테네의 옛날 거리인 플라카는 지금도 포도주가 위력을 떨치고 있다. 수천년 전부터 이곳에는 ‘타베르나’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음식과 함께 포도주를 제공해왔다. 요즈음과 달리 십수년 전만 해도 밤만 되면 기분좋게 술에 취한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오늘 밤에는 겨울의 찬바람이 시려서인지 떠들썩한 분위기는 가시고 다소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흰머리가 흩날리는 왕년의 ‘디오니소스’를 만난 곳은 테이블마다 촛불과 포도주가 놓여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에서였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최고작로 알려진 유리피디스의 <바키의 여인들>을 연출하고 디오니소스 역을 직접 연기한 코라이스 다마티스. 25년을 연극에만 헌신해온 보상으로 이제는 어엿한 그리스 국립극장의 감독이 되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자연의 법칙이 디오니소스의 가르침


사진/ 디오니소스의 그림이 그려진 아테네 술집 간판. 고대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며 취하고 노래하고 춤췄다.
“젊은 연출가 시절에 수술비가 없어 노모를 방치했던 일이 지금도 제일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말을 초면에 할 정도로 속이 확 틔었다. 그는 “포도나무처럼 겨울 동안 죽었다 봄이 되면 푸른 잎사귀들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자연의 법칙이 디오니소스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의 제자라면 당연히 포도주의 대가일 것으로 판단하고 포도주를 한병 주문하려는 순간 극구 사양한다. “포도주는 나의 연인과 단둘이서만 마시는 술”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유를 들었다. 디오니소스 핑계를 대고 오랜만에 포도주를 한잔 맛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인류역사와 함께해온 포도주는 고대시대부터 성스러운 술로 취급됐는데, 붉은 빛깔의 포도주가 피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가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직접 칼리도니아의 왕 이노스에게 가르쳐주면서 그리스 전역에 포도가 재배되고 포도주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고대인들은 매년 축제를 열어 디오니소스에게 첫 열매와 첫 포도주를 바쳤다. 이 풍습은 나중에 기독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처음 기독교가 그리스로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디오니소스의 영향력을 대중들에게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 깊이 빠져 있던 그리스인들은 예수와 디오니소스를 유사한 인물로 간주했다. 어쨌든 지금도 그리스정교회 건물 기둥에는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포도나무가 걸려 있거나 건물 벽에 조각돼 있다.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던 신도들은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세계 곳곳으로 다니기도 했다. 중동과 인도까지 여행하면서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생산방법을 전파했다. 디오니소스가 처음 그리스에 들어올 때는 외부에서 온 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이는 <바키의 여인들>에 잘 나타나 있다. 한번은 디오니소스가 티베스의 왕 팬테아스에게 자신의 환영준비를 하라는 통지를 전달하자 디오니소스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들어온 왕은 그의 방문을 거절한다. 이에 디오니소스는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여인들을 성 밖의 숲으로 뛰쳐나가 노래하고 춤추게 만든다. 불안하여 잠을 잘 수 없었던 왕은 여인으로 변장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이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나무 위에 숨어 있는 왕을 발견했다. 초자연적 힘에 이끌린 어머니의 눈에는 자신의 아들이 사자로 보였고 그를 나무에서 끌어내려 목을 베었다. 유리피디스는 디오니소스를 존경하지 않은 왕의 죽음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는 곧 파멸이란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북방으로 올라갈수록 남성적 술문화

사진/ 포도가지 관을 쓰고 있는 전형적인 디오니소스의 모습. 그는 인간을 무시한 다른 신과 달리 인간의 생활 속에 언제나 함께했다.
디오니소스의 신도들은 노래와 춤으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린다. 한번은 테스피스라는 디오니소스파의 제사장이 합창단 속에서 빠져나와 관중들에게 말도 하고 몸도 움직이는 연기를 펼쳐보였다. 이것이 비극의 시초인데 그리스가 인류문화에 기여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다. 새로운 형식의 공연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서서히 뿌리내린다. 당시(기원전 6세기께) 아테네의 참주정치가 시스트라토스조차 시민들의 요구에 못 이겨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극장을 짓고 이를 디오니소스에게 바쳤고, 매년 디오니시아라는 연극축제를 했다. 이때부터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만이 아니라 연극의 신이 되어 인간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대체로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이기적인 모습만을 보인 반면, 디오니소스만은 인간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실제적인 이로움을 안겨주는 신으로 사랑받아왔다.

디오니소스로부터 전해진 술은 지역과 기후, 민족에 따라 다른 문화를 형성했다. 인상적인 점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집단주의적·남성중심적 술문화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내가 한겨울을 났던 폴란드의 한적한 시골 크렘프나는 겨울철이 되면 매서운 시베리아 북풍이 몰아치면서 기온이 영하 30℃ 이하로 떨어진다. 이런 추위 속에서도 밤만 되면 농부들은 슬그머니 술집으로 모여든다. 안주도 없이 그냥 물과 독한 보드카를 마셔대는데 몇 사람들은 취해 그대로 눈 위에서 잠드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흰 눈이 하늘을 뒤덮던 밤, 눈길 위에 쓰러져 자는 술에 취한 농부를 순찰차에 태우던 한 경찰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난해 여름에는 코소보의 그라차니차에 있는 수도원에 세르비아정교회의 지도자인 아르테미예 주교를 인터뷰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 주교를 기다리고 있는데 묵직한 옛날 카메라를 멘 오십대의 남자가 자두주를 병째로 들고 왔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컵에 독한 자두주를 따른 뒤 하는 말, “남자라면 자두주 한잔은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것도 그랬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카메라맨이 ‘남자’의 명예를 걸었기 때문에 ‘대한 남아의 명예’를 걸고 들이켰다. 비록 폴란드에서 보드카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60도가 넘는 술이니 자연히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다시 한잔 더 따른다. 원래 한잔은 예의가 아니라면서. 이 세르비아 카메라맨은 이런 식으로 나를 취하게 만들었다. 대낮에 그것도 전쟁의 긴장감이 도는 지역의 수도원 안에서 수녀들과 수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술에 대한 찬양과 저주

사진/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에 바쳐진 아크로폴리스 야외극장의 모습. 지금도 여름이면 이곳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술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찬양과 저주를 동시에 받아왔다. 적당한 술은 사람들의 기를 살리고 겁쟁이들을 용감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한도를 넘을 경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디오니소스의 경고를 귀에 담지 않은 알렉산더 대왕은 한창 세계정복의 대야망을 이뤄가던 서른세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지금도 그의 죽음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나 알려진 원인은 과음이었다. 당대에 그의 주량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동행해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절친한 친구들도 모두 술로 인해 죽었다. 술에 취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절친한 친구 클리토가 취중에 언성을 높이자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 일로 알렉산더 대왕은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와 언제나 대작하던 친구인 이피스티온마저 과음으로 목숨을 잃자 알렉산더 대왕은 더욱 음주에 빠져들어 결국 죽음을 맞았다.

주신 디오니소스는 술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주량을 조절하여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더욱 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는 고대시대부터 내려오는 권주가에서 “첫 잔은 건강을 위하여 둘째 잔은 사랑과 즐거움을 위하여, 셋째 잔은 평안한 잠을 위하여 마신다”면서 세잔으로 끝낼 것을 권했다. 그러나 “네 번째 잔은 폭력을 부르고 다섯 번째 잔은 소란을 불러일으키고… 열 번째 잔은 기물을 파손한다”며 과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아테네=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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