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그 마지막 기회]
정부 방해공작에도 성과 거둔 뉴욕 반전시위… 감세와 전쟁의 선택에 놓인 부시 행정부의 고민
2월15일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한 뉴질랜드부터 아시아·유럽·남미·미국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자전을 따라 거대한 반전평화 물결이 일어났다. 세계적인 평화행진을 벌이자는 제안은 지난해 말부터 간헐적으로 제기됐다. 급기야 지난 1월28일 폐막한 세계사회포럼에서는 각양각색의 활동가 그룹들이 이례적으로 2월15일을 국제 반전운동의 날로 만들자는 데 동의했다. 세계 각국의 활동가들은 이날을 위해 치밀한 준비와 토론을 진행했다. 한국에서도 3천여명의 시민들이 대학로에서 종묘까지 평화대행진을 벌였다. 각국은 높아가는 반전의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미군의 포화가 이라크의 목전에 이른 시점에서, 우리는 평화의 마지막 기회를 가질 수 있는가. ‘움직이는 세계’는 전문위원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지난 2월15일 뉴욕에서 경찰 추산 10만, 시위 주최쪽 추산 40만명(따라서 그 중간이 정답이다)이 모여 반전시위를 벌였다. 동시에 진행된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어쨌든 일본보다는 많다), 레이건 정권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침체 일로였던 미국의 사회운동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리고 9·11 테러사건의 진원지인 뉴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중적 호응이 적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거기다 날씨가 아주 나빴다는 것과 미국 정부쪽의 간접적 방해공작이 극심했다는 것까지 포함하면 평가는 더욱 달라질 수 있다.
미국에서 반전론자의 비율은?
반전시위를 앞두고 미국사회는 그야말로 정신없는 며칠을 보냈다. 빈 라덴의 육성테이프 공개에다 본토방위부는 테러 경보 레벨을 한 단계 올렸고, 시안가스 테러 위험 루머가 퍼져 동네마다 난데없이 청테이프(Duct Tape)가 동나는 소동을 겪었다. 텔레비전 방송사는 교외의 한 주택이 문틈을 모두 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화학가스 공격을 테이프로 막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반전 움직임이 힘을 얻는 데는 이 같은 공포가 분명히 한몫을 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정말로 미국에 위협이 될까 여론조사 결과 희생이 클지라도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절반의 미국인들은 적어도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에 찬성할, 부시에 대한 강경 지지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뉴욕타임스>와 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적극적 전쟁찬성론자와 반전론자의 비율은 46 대 46으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다.
미국 내에서 대이라크전에 대한 논란은 두 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하나는 정말로 후세인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적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위협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꼭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대략 70% 이상의 미국인이 후세인 정권이 미국 안보에 위협적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후세인 정권과 알카에다 조직과의 연관성을 믿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연관성이 밝혀졌다며 미국이 제시한 최근의 빈 라덴의 녹음테이프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주장한 것과 달리 후세인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빈 라덴의 종교적 입장에서 후세인은 이슬람의 배신자로 보일 만하다. 이라크는 중동 이슬람 국가 가운데 가장 세속화된 나라일 뿐 아니라, 심지어 주요 각료 중에 기독교도조차 있다. 빈 라덴은 다만 미국의 대이라크 압박을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계기로 삼았을 뿐이지만 대부분의 미국 국민에게는 파월의 목소리만이 전달되고 있다. 명분과 무관하게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구호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는 데는 미국 내 주요 언론들의 힘이 주효했다.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대부분의 언론들이 직·간접적으로 이라크전 지지의사를 밝힌 상태다.
후세인 정권이 위협이 된다고 보는 미국인들도 모두 전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위협이 되더라도 전쟁에는 반대한다는 미국인(소극적 반전론자)들은 한편으로는 현재의 사찰만으로도 충분한 위협 억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 가져올 여러 부작용들(아랍계의 테러 위험이나 전쟁의 사상자들)을 이유로 협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구호는 반전이지만 사실상 방법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현실인식은 전쟁론자들과 같이하고 있다.
부시의 약한 고리를 건드린 그린스펀
사실 미국에서 나오는 반전 목소리의 상당수는 여론조사에서 전쟁 반대와 찬성 사이에서 동요하는 30%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같은 반전 평화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이 같은 상황에 미국도 상당부분 책임을 같이하고 있다는 인식은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에 불과하다. 현실인식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전쟁찬성론자들이 보기에는 소극적 반전론은 무책임하고 비겁해 보이고, 반전론자들이 보기에는 전쟁은 무모하고 위험해 보인다. 따라서 전쟁의 공포가 현실화될수록 반전운동은 더 커지겠지만 그것으로 전쟁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전쟁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시의 전쟁 플랜에 가장 큰 난관으로 등장한 것은 미국 내 자본분파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다(이들은 각기 공화당, 민주당이라는 정치적 대변인을 갖는다). 지난 2월10일과 11일 이틀간 연방의회에서의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청문회 발언은 수백만의 반전시위보다 더 큰 타격을 부시 행정부에 입혔다.
그린스펀 의장의 발언은 묘한 뉘앙스를 띠고 있다. 당장의 현안 문제에 대해 그는 부시의 감세안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다른 연방 지출을 줄이거나 다른 분야의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뜻은 사실상 감세안과 전쟁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당장 전쟁에 돌입하면 설사 유엔 회원국의 지지를 얻더라도 엄청난 군비가 들어가고(미국이 다른 국가의 협조 없이 전쟁에 돌입해서 장기화될 경우에는 최고 6800억달러가 들어간다고 <뉴욕타임스>는 추산했다), 이미 내년 예산안이 적자 재정으로 책정된데다 어디에서도 더 이상의 연방지출을 줄일 부문이 없기 때문에 감세안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그의 발언의 숨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린스펀 의장의 발언 뒤 백악관은 재정적자 문제에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며 서둘러 파문을 진화하려 했지만 그린스펀은 부시 행정부의 가장 약한 고리, 국내 경제정책과 국제정책 사이의 괴리를 정확하게 짚은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에게 감세는 국내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제다. 사실상 종교나 도덕적 가치 등의 정치적 수사보다 감세라는 경제적 이해가 부시 공화당 정권의 핵심이며 지지기반이다. 감세를 위해서는, 더군다나 경기 불황시의 감세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처, 즉 연방정부 규모의 상대적 축소와 어느 정도의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것이 모두 필요한데 그린스펀 의장은 전쟁을 위한 지출과 감세가 동시에 가능하지는 않다고 들고 나선 것이다.
부시의 선택은 어디에 있나
부시 행정부에 더 타격적인 것은 이 발언이 나온 시점이다. 부시가 “유엔에서 합의를 얻든 얻지 못하든 공격한다”며 20만 군대를 중동에 배치해놓은 상태에서, 그리고 감세안이 연방의회에서 논의되기 직전의 시점에서 그의 발언이 나왔기 때문에 부시로서는 만일 어느 하나라도 얻지 못하면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덧붙이자면 오는 여름으로 임기가 만료되는 그린스펀 의장의 연임은 이로써 불투명하게 되었다). 만일 전쟁을 위해 감세를 포기하면 그의 핵심 지지층은 동요할 것이다.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반대로 전쟁을 포기하면 9·11 이후 부시가 앞장서서 고취해온 애국주의적·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상당히 약화된다. 이것 또한 미국인들에게 쉽게 납득시킬 수 없는 사안이 될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두 가지를 모두 돌파하는 경우, 즉 전쟁과 감세안을 모두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때는 유감스럽게도 재정적자 폭이 커지기 때문에 미국 국채시장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그린스펀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이 부분인 것 같다). 부시의 정치력이 발휘되는 정도에 따라 진폭은 달라지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이 상충되는 두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뉴욕=이공순 전문위원 mitren2005@yahoo.com

사진/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반전평화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경찰은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시위대 통제에 나섰다.
미국에서 반전론자의 비율은?

사진/ 전쟁 준비를 위해 일본 요코스카항에서 페르시아만으로 출항하고 있는 이 항공모함 키티호크.

사진/ 전쟁 반대와 평화를 외치는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평화행진하는 뉴욕 시민들.

사진/ “테러리스트를 찾으려면 백악관부터 시작하라”는 한 시민의 피켓이 주목을 끈다.

사진/ 뉴욕 거리를 꽉 메운 시민들과 이들의 행진을 막는 뉴욕 경찰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