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그 마지막 기회]
미국의 반격으로 궁지에 몰린 슈뢰더 반전 정책…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인파가 ‘평화의 축’ 만들어
지난 2월14일 저녁, 생방송으로 보도된 유엔 안보리 회의 중계방송이 독일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동시통역으로 전달된 방송에선 지루한 논쟁이 계속됐지만, 채널을 쉽게 돌리게 하지는 못했다. 파월 미 국무장관의 발언 중에 전쟁 개시를 직접 언급하는 말이 행여 나오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낡은 유럽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추진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동의를 얻은, 유엔 이라크 무기사찰단의 활동시간 연장 및 사찰단 규모 확대 요구가 과연 안보리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던 까닭이다.
“Do you buy a german car”
2002년 여름부터 독일사회에 일어나기 시작한 이라크 전쟁 찬반 논쟁은 신문과 방송에서 이미 가능한 모든 소재와 토론이 진행되어 더는 다룰 만한 내용도 초대할 만한 전문가도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전쟁 반대’는 마치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독일인들의 목소리로 형성돼갔다. 그러나 반전 기운이 확산될수록, 도대체 평화적 해결이 가능한가라는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도 높아졌다.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미국과 영국 정부의 이라크 정책에 반대하는 프랑스와 독일을 ‘낡은 유럽’이라 지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평화에 대한 의구심은 때로는 격한 감정으로, 때로는 불안감으로 이어져나갔다. 독일 언론들은 연일 미국 정치인과 언론의 믿기 어려운 말과 보도들을 전달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피 흘린 미국인들에 대해 고마워할 줄 모르는 프랑스”, “미국이 없었다면 독일은 지금도 소비에트연방에 속해 있을 것이다”, “리비아·쿠바처럼 독일은 현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라”라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미국쪽의 반응은 독일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 한 극우 종교단체가 “Do you buy a german car”라는 독일자동차 불매광고를 방송에 내보내자, 독일 경제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2002년 수출 부문을 제외하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독일경제에 미국시장은 생명줄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의 전쟁반대 정책에 대한 경제계의 반발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2월2일 있었던 두곳의 주정부 선거에서 참패한 독일 사민당은 창당 140년 이래 최악의 여론 지지도를 보이면서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안으로는 경제정책이 실패했다는 비판과 밖으로는 이라크를 둘러싸고 미국 정부와 날카로운 각을 세우면서 결국 국제적 고립을 낳았다는 비난들이 쏟아져나왔다. 미국 국방부는 때를 맞추어 독일 주둔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하면서 독일 정부를 더욱더 궁지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어느덧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정부 퇴진과 재선거를 상황 타개책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현 독일 정부 임기 동안 관계회복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전달된 것은 물론이다.
지난 2월9일 <슈피겔>은 독일 정치권과 미국 정부를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상징인 ‘파란 헬멧’의 표지사진과 함께 보도된 “전쟁 대신 유엔을 통한 이라크 통제”라는 특종 기사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정부가 1월부터 공동으로 비밀리에 작업해온 이라크 사태에 대한 평화적 해결안이 공개된 것이다. 이라크 무기사찰단의 규모를 두배로 늘리고, 사찰단에 무장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동행하며, 이라크 전체를 항공금지구역으로 설정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이 방안은 이라크에 무장해제의 압력과 속도를 더욱 높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프랑스·독일 양국 정부는 평화유지군에 자국 군인들을 참여시키는 것뿐 아니라, 프랑스의 미라지 정찰기 등 기술적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독일-프랑스 평화안도 시들어갔으나…
그러나 문제는, 미국·영국과 기조를 달리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복안이 아니라, 그 내용이 발표되는 방식과 시기였다. 같은 날인 2월9일, 독일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은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을 만나고 있었고, 이들 모두에게 이 내용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기자들의 질문에 <슈피겔> 애독자인 독일 국방장관은 “하나의 제안으로 고민되고 있다”고 사실 확인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는 과거에도 정부정책을 각료들이 알기도 전 <슈피겔>에 터뜨리곤 한, 슈뢰더 독일 총리의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미국 관료들은 공식 외교채널이 아닌 언론을 통한 독일 정부의 공세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월요일 독일 방송과 언론들은 일제히 <슈피겔>의 특종을 앞다퉈 보도했다. 그러나 새로운 해결책에 대한 본격적인 찬반 논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국방장관과 외무장관이 사전에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과 이로 인해 녹색당 출신의 피셔 외무장관과 슈뢰더 총리 사이에 커다란 언쟁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독일 정부가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현실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가 질문의 주를 이루었다.
평화적 해결에 대한 기대는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깊은 경제·군사적 상호연관성으로 인해, 또 다른 한편으로 외교능력의 현실적 한계에 부닥치면서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무기사찰단 활동기한 연장안은 러시아와 중국의 지지를 얻어냈지만, 미국과 영국의 완강한 거부를 극복할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이 오늘내일로 가까워졌다는 보도들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이를 반영한 듯, 2월15일 베를린의 반전 시위를 준비하는 주최쪽도 참여 예상인원을 8만명 수준으로 발표했다. 베를린 경찰은 새로 깐 잔디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며 국회의사당 앞 집회를 불허했다. 손발을 에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데모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걱정에 더해졌다.
그러나 2월14일 금요일 밤부터 하나둘씩 낭보가 날아들었다. 지루하게 끌던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파월 미 국무장관이 3월1일에 이라크 결의안을 상정하기 때문에 유엔 무기사찰단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소식이 시작이었다. 2월14일 밤이 되면서 시위 참여를 위해 베를린으로 올라오는 관광버스가 500대를 넘어섰다는 시위 주최쪽의 집계발표가 이어졌다. 시위 참여 예상인원도 10만명으로 수정되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슈뢰더 총리는 정부 장관들에게 시위 참여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2월14일, 총 3명의 장관이 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연방국회의장도 참여의사를 주최쪽에 통보해왔다.
50만명의 합창 “우린 해낼 수 있다”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를 시작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평화행진 소식을 전하는 아침뉴스로 2월15일은 시작되었다. 주최쪽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이날 베를린의 중심거리들은 전후 최대의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경찰 공식 통계 참여인원만 50만명 이상을 기록하였다. 낮 12시부터 시작된 행진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춰버렸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인파가 모인 것이다. 70대 노인들부터 아이들까지, 아랍사람에서부터 미국사람들까지, 정부 장관부터 종교계 인사들까지, 노래하는 가수에서부터 거리의 노숙자까지 ‘평화의 축’이 만들어졌다. 따스한 차를 함께 나누는 보온병이 서로의 손을 잡게 하였고, 70대 노인들이 부르는 평화의 노래가 서로의 어깨를 두르게 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외침에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얼굴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한반도에도 평화”라는 한 연사의 말 한마디에도 50만이 넘는 사람들은 박수와 휘파람으로 대답해주었다. 반세계화 단체인 아탁(Attac)의 연사로 무대에 오른 팔레스타인 여성 활동가의 “우리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마지막 말은, 역사에 기록될 2월15일 ‘국제 반전의 날’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보여주는 듯했다. 평화적 해결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은 일단 3월1일까지 그 생명이 연장되었다.
베를린=글·사진 강정수 전문위원 jskang@web.de
“Do you buy a german car”

사진/ 2월15일 시위에 참여한 슈뢰더 정부 각료들. 맨 왼쪽이 개발원조부 장관. 그 뒤 검은 모자를 쓴 노인이 독일 연방국회 의장.

사진/ 프랑스와 독일 정부가 1월부터 공동으로 비밀리에 작업해온 평화적 해결안을 특종 보도한 <슈피겔>. 이로 인해 독일 행정부 안에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진/ 2월15일 시위는 주최쪽도 예상인원을 8만명 정도로 발표할 만큼 사전에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당일 참여인원만 50만여명을 기록했다. (GAM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