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충돌하는 두개의 베네수엘라

446
등록 : 2003-02-12 00:00 수정 :

크게 작게

기나긴 파업사태가 막 내린 베네수엘라 현장을 찾아… 분열로 상처받은 시민들의 삶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동남부 산비탈에 자리잡은 만사나레스 아파트 단지 입구. 밤 8시가 되자 주민들이 냄비를 두드리며 몰려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에서 노인들까지 온 식구가 냄비든 프라이팬이든 숟가락으로 두드려 소리가 나는 요리도구들을 들고 나왔다. 아옌데 좌파정부 시절 칠레 중산층 시민들의 상징적인 시위가 경제위기로 풍비박산이 난 아르헨티나를 거쳐 드디어 베네수엘라에 이른 것이다.

파업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사진/ 냄비를 두드리는 반차베스파 시민들. 빈곤한 중산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위가 되었다.
“우리들은 중산층이지만 갈수록 추락하고 있어요.” 사범대학 지리학 교수 헤르만 미얀(51)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냄비는 음식을 뜻한다며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냄비를 두드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간 퇴직금·실업급여·저축으로 버텨왔지만 빚이 늘고 있어요.” 냄비를 두드리는 초등학교 6학년 딸 옆에서 일리아나 바레토(38)가 윤기 없이 웃어보인다. 2002년 4월까지만 해도 국제적인 패스트푸드업체 웬디스 베네수엘라 본사에서 일하던 그는 실업자로 전락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마이애미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던 그는 이번 크리스마스엔 전통음식 아야카스(빵가루로 반죽하고 고기와 채소로 속을 채우는 음식)를 만들어 주변친구들에게 팔아야 했다.


카라카스 시민들의 아침은 기다림으로 시작된다. 군인이 지키고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선 긴 줄을 선 채 4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지난해 12월2일부터 시작된 전국시민파업에 ‘국가 속의 국가’라는 세계 제2위 석유기업 국영석유회사(PDVSA)의 국장급 간부들과 노동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평상시 300만 배럴에 이르던 석유생산량은 40만 배럴로 크게 줄어들었다.

국영석유회사의 언론홍보국장 라파엘 고메스는 국영석유회사의 파업은 유조선이 석유선적을 거부한 데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몇몇 상층 간부진들이 주도한 이번 석유파업은 석유산업의 민영화와 관련이 있으며 베네수엘라의 국가적 이해보다는 국제자본의 이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 파업은 임금이나 노동조건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석유회사 직원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보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국영석유회사 기획국장이었다가 최근에 해고된 후안 페르난데스는 자신들은 민영화 추진 세력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자신들이 파업에 나선 것은 석유산업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국가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더욱 악화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을 비롯해 현재 2천명이 넘는 석유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강경책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한다.

은행 앞에서도 기다랗게 줄을 서기는 마찬가지다. 12월2일 이래 민간은행들은 하루 세 시간만 영업하는 부분파업, 때론 이틀 동안 문을 닫는 전면파업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17만명의 직원을 반으로 줄여야 했어요. 산업부문의 경기침체가 금융계에 영향을 끼친 것이죠.” 정오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굳게 문을 닫은 방코 프로빈시알 은행의 노조위원장 카를루스 로페스(52)가 말한다. “은행 경영진들도 은행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있어요. 정부가 은행에서 얻은 채무를 휴짓조각과 다를 바 없는 공채로 상환해왔기 때문이죠.”

‘빈민의 정부’에서 늘어나는 빈민

사진/ 카라카스에서 가장 큰 메르카도 데 코체 시장. 옥수숫가루를 사기 위해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파업에 참여한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CTV) 산하 노조는 은행노조만이 아니다. 10만 조합원으로 조직된 교직원 노조연맹의 위원장 하이메 만소는 베네수엘라의 교사노조엔 교사는 물론이고 교장들도 참여한다고 말한다. 한달에 2만5천볼리바르(약 17달러)에 지나지 않는 교장수당이 교사와의 유일한 차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라카스의 300여개 공·사립학교 가운데 약 80%의 교사가 파업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파업엔 베네수엘라 상공인연합회 페데카마라스 소속의 기업가들도 합류했다. 페데카마라스 의장 카를로스 페르난데스는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4년간 국내 총생산이 7%나 하락했으며 2002년 한해 동안 볼리바르화는 83%의 가치를 잃었으며 물가는 31%나 상승했다고 말한다.

정부 발표만 놓고 보더라도 2002년 9월 현재 실업률은 17%며, 비공식부문에 종사하는 인구는 52%에 이른다. 노동인구의 70%가 정부 규제가 미치지 않는 비공식부문에 종사하거나 실업상태에 놓여 있다. 국민 10명 가운데 3명만이 멀쩡한 직장을 가진 노동자다. 한 통계에 의하면 공식부문 노동자의 15%인 150만명이 이번 파업에 참여한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의 조합원이다. 카를로스 페르난데스 의장에 따르면 최근 4년간 4700개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또한 ‘빈민의 정부’라고 자칭한 차베스 정부 아래서도 빈민의 수가 무려 18%나 상승해 2400만 인구 가운데 2070만명이 빈민이라고 말한다.

미란다 주 로스 나랑호스 산업단지에서 비닐봉투를 생산하는 산타크루스사의 판매국장 세닛 아길라르는 회사 경영진의 결정으로 파업에 참여하고 있다며 말문을 연다. 총 180명의 노동자들이 24시간 일하는 이 공장의 원료는 석유에서 추출된다. 석유부문 파업은 곧 공장가동 중단을 뜻한다. 회사 경영진은 파업이 2주 정도 진행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파업이 장기화하자 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시작한 파업이 회사의 목을 조르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빈민을 위한 ‘특별 민중시장’

사진/ 엘팔리토 정유소의 파업 노동자들의 집회. 장기간의 파업은 베네수엘라 시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공장 가동은 중단되었지만 서너명의 노동자들은 공장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들 가운데 파업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거예요.” 최저임금이 120달러도 안 되는 베네수엘라에서 한달에 약 40만볼리바르(약 265달러)의 월급을 받는 자기 공장 노동자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일을 그만두려 했겠느냐는 것이다. 저임금 생산직 노동자들의 처지는 또 다른 셈이다.

한편 카라카스 중심가 볼리바르 공원에서 만난 차베스 지지자들은 파업을 주도하는 쿠데타 세력과 파시스트 세력이 네개의 민영방송과 주류언론과 결탁해 ‘가상의 진실’을 만들어 국민을 현혹한다며 비난한다. 그 진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차베스를 지지하는 국민은 20%의 골수분자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정부가 나눠준 무기로 무장한 폭력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들 시민들이 대체로 거주하는 서부지역에선 일부 품귀현상이 있긴 하지만 생활필수품을 구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동부지역에서 파업에 참가한 대형 쇼핑센터들도 슈퍼마켓은 오전에 문을 열어 식료품을 팔고 있었다.

“달동네에서 사람들이 내려온다!” 이 말은 카라카스에서 불길한 예언이다. 1980년대 카라카스의 빈민들은 기름값 인상과 물가상승에 폭동과 약탈로 맞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차베스 정부는 집권 이래 빈민들이 식료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카라카스 네곳에 ‘민중시장’을 설치했다. 파업 초기 도로를 점령한 반정부시민들로 인해 유통망이 교란되었을 때는 군을 동원해 시를 가로지르는 볼리바르 대로에 ‘특별 민중시장’을 설치해 농수산물을 비롯한 식료품을 판매하도록 했다. 브라질·파라과이 등지에서 석유를 수입해 내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며 1ℓ에 채 100원이 되지 않는 가솔린 가격을 한 차례도 인상하지 않았다. 또한 주식 옥수숫가루를 저렴하게 시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재정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구할 수 없는 물건들도 있다.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맥주는 금이에요.” 카라카스 중심가 슈퍼마켓에서 화장지를 사던 시민 호르헤는 맥주 없는 크리스마스는 내 생에 처음 보냈다며 웃는다. 슈퍼마켓의 판매대 군데군데는 휑뎅하게 비어 있는 곳이 많았다. 특히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코카콜라를 비롯한 청량음료, 과일음료, 맥주, 우유 등 마실거리를 생산하는 공장이 파업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1월 하순께 정부는 군을 동원해 코카콜라 베네수엘라 공장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시민들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에 반정부세력 지도자들은 사유재산에 대한 명백한 침해라고 반박했다.

파업은 막을 내렸으나…

사진/ 카라카스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은 볼리바르 공원에서 차베스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차베스는 사랑, 정의, 평화”라는 피켓이 눈에 띈다.
석유수급문제로 인해 세계를 긴장시킨 베네수엘라 반정부세력의 두달간의 파업은 2월2일 400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국민청원투표행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베네수엘라 국민의 약 17%에 이르는 400만 시민들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법률적 효력은 없지만 반정부세력의 정치적 힘을 여실히 보여준 행사였다. 반대파는 이를 “시민들의 자발적인 서명공격”이라고 했다. 행사 이틀 뒤 2월4일엔 친정부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11년 전의 그날 공수부대 우고 차베스 중령이 군사반란을 기도한 날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차베스 대통령은 반정부세력의 패배를 주장하고 정부의 승리를 선언했다. 정부의 자신감은 국영석유회사가 100만 배럴의 생산량을 넘기며 정상화돼고 있고 군이 동요하지 않고 정부를 지지해온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파업기간에 시민들이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도 반대하는 시민도 죽거나 다치는 일이 빈번했다.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두 동강났어요! 심지어 애들까지도 나뉘었어요.” 카라카스 중심가의 안드레스 베요 공립학교에서 밤색 하의와 하늘색 상의를 입은 몇몇 중고교생들이 교장과 교사의 파업으로 굳게 닫힌 교문 너머로 돌멩이를 던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카라카스 시민 호세는 탄식한다.

“차베스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어요. 지금은 반대예요. 그렇다고 반대파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베네수엘라를 통합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길 바랍니다.” 호세의 바람이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빈민들을 룸펜으로, 대통령을 심지어 사탄이라고 하며 저주하는 반정부 지도자들은 그의 바람을 알까 수십만 중산층 시민들이 밤마다 냄비를 두드리는데도 그들을 쿠데타 지지자들, 파시스트들이라고 모욕하는 대통령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카라카스=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yahoo.co.kr

이 기사는 한국방송의 <세계는 지금> 베네수엘라 특별취재팀과 공동으로 취재한 것입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