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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왕실까지 선을 댄 ‘다닌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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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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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이 꼽은 25번째 재벌 다닌 치아라와논드, 신비감의 탈에 숨은 그의 진면목

해마다 ‘세계 최고 갑부 500명’을 꼽는 <포춘>에 여러 번 이름을 걸었고, 또 거부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 흠모해온 인물은 누구인가

대답은 다닌 치아라와논드(Dhanin Chiaravanond) CP그룹(찰로엔 폭판) 회장이다. 1941년 중국계 상인 가문의 아들로 방콕에서 태어난 다닌은 중국과 홍콩에서 공부한 뒤, 1960년대 닭을 길러 수출하면서부터 ‘사육제국’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1970년 양계사업을 인도네시아·대만·싱가포르·말레이시아로 넓힌 다닌은 다음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CP그룹 이른바 ‘동물공장’을 건설했다. 이렇게 짐승을 길러 고기를 팔아 세운 CP그룹은 자동차·부동산·금융·케이블텔레비전·전화·보험쪽으로 무제한 발을 뻗어 현재 300여개 회사를 거느리며, 한해 매출 1250억바트(약 29억달러)를 올리는 타이 최대 재벌로 자리잡았다. 이런 다닌을 1994년 <포춘>은 세계에서 25번째 돈 많은 인물로 기록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한다


갑부로 쌍벽을 이루는 탁신 시나와트라 총리가 여기저기 뻔질나게 나서는 인물이라면, 다닌은 동선을 최소로 좁혀 특수층 안에서만 움직여온 인물이다. 이러니 다닌 주변에는 잡음도 스캔들도 별로 새나올 구석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다닌은 늘 온화한 미소를 짓는 재벌총수라는 정도가 다다. 겉만 놓고 따지면, 다닌을 추악한 졸부반열에 올리는 게 오히려 어색할 정도다. 그러나 신비감마저 드는 다닌을 한 꺼풀만 까보면 실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상징조작, 그 영원한 성공은 없다고 했는가

다닌이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깨트리며 어떻게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를 놓고 사회운동가들이나 환경운동가들을 비롯해 인간다운 세상을 염원하는 시민들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박한 ‘다닌자본주의’ 정체를 하나씩 폭로했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먼저 다닌의 ‘양계공장’이 집중타를 맞았다. 세계 제5위 닭고기 수출가 다닌이 수백만마리에 이르는 닭들을 야만적인 환경에서 사육한다고 국제동물보호운동가들로부터 쉴새 없이 두들겨맞았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 강제로 먹이를 주입해 기르는 다닌의 닭들은 불임장치 아래 오직 몸무게만 늘리다가 ‘수출용품’으로 일생을 마친다는 게 비판자들의 요지였다. 닭 못지않게, 다닌의 새우양식용 사료사업 역시 환경운동가들로부터 직격탄을 맞아왔다. 망그로브(열대지방 강 어구나 해변에 자라는 숲)를 발가벗겨버리고 수자원을 오염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라고.

사진/ 늘 온화한 재벌총수의 이미지를 지녀온 다닌. 그러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악한 자본주의의 상징.” 거침없는 말발의 최고 사회비평가 수락 시와락사는 다닌의 CP그룹을 늘 이렇게 불러왔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한다.” 다닌의 진면목은 미국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영국 초대형 슈퍼마켓 ‘테스코’를 동시에 끌어들인 데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국적으로 2천여개에 이르는 ‘세븐일레븐’은 지역 잡화상들 밥줄을 위협하며, 한편으로는 동네가게를 광장삼아 인정을 주고받고 정보를 나누는 문화양식마저 심각하게 훼손해버렸다. 그런가 하면, 테스코는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며 타이 현실과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불필요한 대규모 소비문화를 확산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했다.

피묻은 손을 명예회장으로

다닌의 가공할 만한 사업능력은 역시, 가공할 만한 정치결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CP그룹은 모든 정당과 정치인을 ‘친구’로 삼았다. 특히 1992년 5월민주항쟁으로 쫓겨난 군인독재자 수친다 크라프라윤 총리를 CP그룹 계열사가 명예회장으로 초대한 일은 대표적 사례다. 100여명이 넘는 시민을 살해하고 민주주의에 먹칠을 한 수친다를 다닌이 끌어안고 명예회장 자리까지 올린 까닭은 간단했다. 돈 때문이었다! 수친다가 총리일 때 새로 까는 300만 회선 전화사업을 CP그룹에게 독점으로 준 데 대한 보은이었다. “이익을 준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익을 돌려준다.” 이렇게 소문난 다닌에게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CP그룹 조력자 명단에는 프렘 틴나수라논드 전 총리 같은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관과 심지어 헌법재판관까지 올라 있다. 사회비평가 수락은 다닌과 CP그룹이 사업 차원에서 왕과 왕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선을 대고 비위를 맞춰왔다는 사실을 시사한 적이 있다. 그린 슈퍼마트 사업을 CP그룹과 왕실이 조인트 벤처로 함께 벌였다는 사실은 눈여겨봄직하다.

다닌, 그가 사업판을 벌이면서 타이 사회에 남긴 선물은 뻔뻔스러운 족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천박한 자본주의의 폐악뿐이었다. 그에게 붙은 최고갑부라는 이름은 반사회적 자본가의 별명에 지나지 않는다.

프라윗 로자나프룩(Pravit Rojanapruk)/ <더 네이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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