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국가가 추위를 책임져라

444
등록 : 2003-01-22 00:00 수정 :

크게 작게

동토의 왕국 러시아를 뒤흔든 이상 한파…대책 미비로 곳곳에서 동사자·배관사고 속출

사진/ 날씨가 풀리면서 긴급 도로복구에 나선 차량들. 영하 30도가 넘는 한파는 러시아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동토의 왕국 러시아의 시민들도 올해는 꽁꽁 얼어붙었다. 한겨울에도 아이스크림을 거리에서 먹는가 하면 영하 10℃의 기온에서도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야외풀장을 만들어 건강 냉수욕을 즐기는 등 겨울 낭만을 즐기는 러시아인들도 올해만은 다르다.

지난 연말부터 유럽 전역에 때아닌 홍수가 범람하고 이탈리아에 눈이 내리는 등 유럽에 이상기후가 찾아왔다. 러시아도 예외 없이 이상 한파의 피해를 맛보아야 했다.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등 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10~15℃인 지역에 연 2~3주 동안 영하 25℃를 밑도는 강추위가 급습하면서 거리에서 수백명이 동사하고 곳곳에서 난방용 배관이 파열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얼어죽는 노숙자, 대책은 없나


이미 지난 연말 모스크바 거리 노숙자 가운데 100여명이 동사하는 사태가 벌어져 행정당국의 안일한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으나 때마침 다가오는 새해 연휴 분위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어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1월 초로 접어들면서 이상한파로 300여명의 노숙자가 거리에서 동사하자, 행정당국의 노숙자 월동대책에 근본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내외신에서 제기되었다.

이른바 ‘봄쥐’라고 통상 표현되는 거리 노숙자 문제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의 주요한 사회문제였다. 주거지가 없어 노동권마저 인정되지 않는 노숙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풀리지 않는 도시 행정당국의 과제였다. 게다가 겨울이면 동사자 대부분이 노숙자들이어서 이를 어떻게 예방하느냐로 행정당국은 더욱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다.

사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예프스키 거리. 보도는 꽁꽁 얼어붙었지만 익숙하게 걷는다.
곳곳에서 제기되는 비판에도 거리 노숙자들을 한파에서 보호하기 위한 행정당국의 대책은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다. 처리해야할 봄쥐의 수는 많은데 보호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최근 공식집계에 의하면 러시아 전역에 걸쳐 인구 1천만 도시기준 1만명 정도의 인구가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수도 모스크바에는 각 경찰관서 산하에 임시 노숙자 보호소가 마련돼 있는데 이곳에 하룻밤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인원은 16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보호소는 강추위에도 항상 자리가 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찰이 발견한 노숙자들은 하룻밤 따뜻한 곳에서 밤을 세울 은총을 받는 대가로 다음날이면 다른 지역으로 강제추방되기 때문이다.

행정당국이 거리 노숙자의 동사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경없는의사회’라는 시민자원봉사단체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이 단체는 거리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무료진료하며 일반시민의 동참을 촉구했다. 올 들어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동사자가 속출하자 급기야 지난 1월12일께 이 단체의 대표 라밀 구토프는 동사자 방지대책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모스크바 시장 앞으로 보냈다. 이 서한에서 그는 혹한에서 노숙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용능력이 절대적으로 빈약한 보호소에만 의존하지 말고 야간에 통행과 상주를 금지하는 각 지하철 역을 개방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시 당국이 이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의심스럽지만 이를 수용하더라도 초라한 행색에 악취가 물씬 풍기는 노숙자들로 불편을 겪고 있는 일반시민들이 이 조치를 환영할 것 같지는 않다. 대책의 성과 여부를 떠나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 덕택에 이번 한파가 단순히 기상이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임을 깨닫게 한 셈이다.

난방 개선하기 위해 거액 예산 배정

사진/ 러시아인들은 백설이 쌓인 한 겨울에 승마는 물론 스키 등으로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한파 영향으로 겨울 나들이 객이 대폭 줄었다.
또한 이번 한파는 곳곳에서 대규모 난방 체제 마비를 초래해 러시아의 월동대책이 부실함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수은주가 영하 30℃까지 급강하한 1월6일, 러시아 정교회 성탄전야에 들떠 있는 시내 곳곳에서 온수공급 배관이 파열되는 등의 사고로 20여개 대형 아파트 주민들이 추위에 떨었다. 피해 규모로 보면 모스크바는 그나마 약과다. 이번 강추위의 여파로 피해가 집중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브고로트, 발다이, 카렐자치공화국 등 러시아 북서유럽 지역과 19개 도시에서 2만7천명 이상의 주민들이 난방시설 마비로 냉장고 같은 집에서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도시 곳곳에는 터진 배관에서 더운물이 터져나와 한겨울에 때아닌 홍수사태를 겪기도 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1월13일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각료회의를 주재해 피해상황을 일일이 확인하고 연방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모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또한 정부 특별예산에서 긴급히 5천만루블(약 160십만달러 상당)을 배정해 파괴된 난방장치 복구비용으로 긴급히 쓸 것을 지시하는 등 사태해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통령이 직접 한파대책을 논의하는 등 연방정부 차원에서 뒤늦게나마 월동대책 강구 소동을 벌이고 있음에도 일반시민들의 몸과 마음은 더욱 춥기만 하다. 여기에는 비상대책본부가 앞으로 2월 말까지 몇번이고 강추위가 찾아올 것이고 이르쿠츠크 등 일부 지역에는 영하 50℃까지도 예상된다고 발표하면서 다가올 추위에 대한 공포도 한몫했다. 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기온이 예년과 비슷한 수준을 회복했는데도 시민들은 더욱 몸을 움츠리고 있다. 러시아 전역에 깔린 난방체제가 낙후될 때로 낙후돼 아직까지 난방혜택을 받고 있는 지역주민들도 언제 자기 지역이 피해 대상이 될지 모를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부 관계자는 러시아 전체에 깔린 총연장길이 13만6천km의 난방용 배관 가운데 1만km가량이 파열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전한다. 나머지 배관도 3분의 1 정도가 심하게 부식돼 근본적인 수리가 필요하다. 건설부가 내놓은 분석에 의하면 낙후된 배관의 현대화에는 적어도 8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41억5천만달러 상당의 천문학적 수리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공사를 지금이라도 착수하지 않으면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소도시들은 2010년이면 난방시설이 마비돼 도시 전체가 꽁꽁 얼어붙게 될 것”이라는 울란 우데 주거경영담당 부시장 알렉산드르 돌바크의 경고는 사안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이 막대한 돈을 어디에서 구해오느냐다. 현재 연방정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조처는 현저히 낮은 아파트 관리비 징수율을 100%로 끌어올리는 강력한 행정조치를 마련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가장 싼 아파트라 할지라도, 대략 월 50달러 내외의 비용을 일반서민들이 매월 밀리지 않고 낸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나마 100% 징수하더라도 이 예산으론 겨우 인건비 등 소모비를 충당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최근 한파 피해를 접하면서 정부에서는 턱없는 예산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기부자 공개모집이나 국영전기회사 소유 난방체제 관리를 민영화하여 민영자본을 끌어들이는 방안 등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의회 두마의 봄 회기 때 민영화 안이 검토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민영화가 쉽게 이루어질지는 불투명하다.

도시 구조상 배관 보수 쉽지 않아

공사자금을 확보하더라도 공사기술상 또 다른 난제가 걸려 있다. 모스크바 도시경제연구소 도시경영재단 이사장 세르게이 시바예프는 “도심지 지하배관 교체나 보수공사를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일시에 도심지 전체 지면을 파헤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분적인 공사가 단순한 땜질밖에 되지 못하는 데는 사회주의 시절 대형 배관들을 도심지 지하에 깔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월 말까지 여러번 있을 강추위 속에서 정부의 근본적인 월동대책에 대한 러시아 시민들의 반응은 강추위만큼이나 차갑기만 하다. 어떤 시민은 해마다 일어나는 배관 파열 사고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빈번히 발생했음을 강조하고 정부의 늑장 대응을 비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글·사진 박현봉 전문위원 parkhb_spb@yahoo.com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