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콘돔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438
등록 : 2002-12-12 00:00 수정 :

크게 작게

Sex of Asia l 필리핀

뱃사나이를 남편으로 둔 필리핀 아내들의 위험한 섹스… 성을 상의하는 일은 ‘범죄’ 취급

사진/ 마리테스 시손(Marites Sison) ㅣ 전 <마닐라타임스> 기자·칼럼니스트
‘아시아의 라티노.’ 별로 달갑잖은 말이긴 한데, 예전부터 필리핀은 늘 이런 이상한 표현으로 규정당해온 기분이 든다. 아마 불교와 이슬람이 판치는 아시아에서 필리핀만 희한하게 가톨릭 사회인데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처럼 축제라면 사족을 못 쓰고 또 낮잠을 즐기는 문화적 행태 같은 것들이 비슷해서 생긴 말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표현 속에는 라티노와 필리피노 사이에 닮은꼴인 ‘성’도 담겨 있다. 필리핀과 라틴아메리카라면 언뜻 보수적인 가톨릭이 지배하는 사회고 성에 대한 관념도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식으로.

성 관념이 헷갈리는 사회


사진/ 필리핀 남성들 가운데 콘돔을 사용하는 이들이 35%미만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SYGMA)
그러나 이 필리피노 성 문제를 따지고 드는 외국인들은 당장 헷갈릴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필리핀 사람들 성 관념이 매우 보수적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개방적이라고도 하는 걸 보면.

양쪽 모두 그럴듯한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방적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가령, 2001년 부정부패 혐의로 쫓겨난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 에스트라다가 일곱명에 이르는 ‘내연의 처’를 두고도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고 또 공직에 있는 동안에도 마음껏 ‘행위’를 벌일 수 있었던 사실을 내세운다. 또 언론들이 내놓고 성 장사를 하는 것도 이들 눈에는 개방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르윈스키가 클린턴 정액이 묻은 드레스를 들고 나왔을 때는 모든 신문들이 찍고 또 찍어내며 판매에 열을 올렸고, 발행부수 최고를 자랑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은 1면 톱을 늘 홀딱 벗긴 여자 이야기로 채울 수 있는 실정이니.

반대로 보수적이라 우기는 이들은 겉보기에 개방적인 듯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성 문제와 맞닥뜨리면 사회통념이 철저하게 성을 억압하는 태도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 토크쇼나 다큐멘터리들이 성을 자유롭게 방송하는 판에, 정작 어른들 사이에도 성을 화제로 삼는 걸 금기로 여기는 상황이다.

이처럼 개방이니 보수니 하는 논란들 속에는 두 가지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수는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필리핀 사회를 연상한 경우고 개방은 세계 곳곳 성 산업 현장을 누비는 필리핀 여성들만을 바라본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작 8천만 인구 가운데 80%가 가톨릭 신자라는 필리핀 사회에서 성 분야 전문가들은 가톨릭과 보수적인 성의 상관관계가 그리 깊지 않다고 여겨왔다. 예컨대 에스트라다와 라모스 두 전직 대통령이 첩이 있다는 이유로 가톨릭 교회가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음에도 둘 다 거뜬히 대통령에 당선된 일이나, 가톨릭이 요구해온 혼전순결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력한 증거로 내세웠다. 실제로 1999년 동서인구보건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결혼한 성인남녀 조사대상자 가운데 37% 남성들과 30% 여성들이 혼전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나타나,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밝힌 바 있다.

감춰진 성이 여성을 파괴한다

사진/ 적어도 성문제에서만큼은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가 필리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수빅만 미 해군기지의 여성들. (GAMMA)
그렇다고 이런 조사 결과들을 놓고 필리핀 성문화가 개방적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아시아 각국 혼전섹스 실태와 비교해보면 여전히 필리핀은 보수적인 지점에 있는 탓이다. 따라서 필리핀 성문화를 외형만 놓고 개방과 보수라는 측면에서 논쟁을 벌이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만다.

오히려 지금 관심을 가질 부분은 섹스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여성’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리핀에 존재하는 억압적인 성문화는 가톨릭 교리보다는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전통을 주범으로 여겨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여성운동이 활발한 나라로, 또 여성 대통령을 둘씩이나 배출한 나라라는 이미지와 달리 필리핀 여성은 가족계획이나 안전한 섹스 그리고 즐기는 섹스와 같은 모든 성적 권리로부터 무시당해왔다. 여성생식건강이라는 주제를 들고 공연 중인 필리핀교육극협회(PETA)에 따르면 대부분 여성들은 일생 동안 ‘자지’나 ‘보지’와 같은 생식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레메디오스 에이즈재단 조세 나르시소 박사는 감춰진 성과 일방적인 성이 결국 여성을 파괴한다고 강조했다. “학교에서는 여성과 성에 대한 교육을, 사회에서는 성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 결과 “임신 여성 여섯 가운데 한명이 불법 낙태수술을 받고, 해마다 그 수는 30만~40만건에 이른다. 섹스에 따른 모든 피해를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특히 소녀들 가운데 낙태로 인한 사망과 장애가 늘어나고 있다”고 로돌포 비아 상원의원은 주장했다. 참고로 비아 상원의원이 제안한 피임과 가족계획을 여성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법안은 현재 가톨릭 교회와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단체에 부딪쳐 고전하고 있다.

나르시소 박사에 따르면 필리핀 시민들 가운데 콘돔을 사용하는 이들이 35% 미만이라고 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제의하기 힘든 탓인데, 이게 남성중심 가부장제 필리핀 문화-사회-심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본보기다.”

이처럼 폐쇄적인 성 질서 아래, 여성이 성적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현실은 여성 에이즈 바이러스(HIV-AIDS) 감염률을 증대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19~29살 여성들이 HIV-AIDS의 최대 희생자 집단이라는 사실을 이미 유엔개발계획(UNDP) 보고서가 밝힌 바 있듯이. 현재 성인 1만명당 7명이 HIV-AIDS 감염자라는 통계가 있는 필리핀이 아직 타이나 버마를 비롯한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들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보건부 자료를 보면 점차 감염 속도와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감염자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더 깨끗하고 안전한 질’을 찾는 남성들 요구에 따라 소녀들이 팔려나가고, 이 소녀들은 닫힌 성문화로 인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HIV-AIDS에 쉽게 노출되고 마는 탓이다.

이런 일방적인 남성중심주의 환경 속에서 비타협적 섹스, 제공하는 성만 경험해온 필리핀 여성들은 마치 자살행위와 같은 위태로운 섹스를 하고 있다.

“신의 가호를.” 선원을 남편으로 둔 에스페르(43·선원용역회사 사무원)는 몇달에 한번씩 돌아오는 남편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기도를 올린다고 털어놓았다. “어쩌다 돌아오는 남편에게 콘돔을 사용하자고 말할 엄두를 낼 수 없다. 그이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매우 불쾌해하기 때문에. 그이가 바다로 떠날 때마다 가정을 위해 안전한 섹스를 하라고 신신당부하지만….”

이런 사정은 에스페르만이 아니다. 필리핀에는 등록된 선원 수만도 50만명에 이르고, 이건 이 세상 바다에 떠다니는 선원 5명 가운데 1명꼴이 필리핀 남성일 만큼 방대한 수다. 선원 아내들의 AIDS 취약성을 연구해온 리자 파이스 이바네즈는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대부분 선원 아내들은 남편들이 외지 항구에 상륙하면 어김없이 매매춘을 한다고 믿는다.”

섹시하지도 않고 기교도 없다?

그럼에도 아내들은 이런 남편을 거친 바다와 싸우는 뱃사나이들 전통이라 인정해왔고, 특히 가족 생계가 남편에게 달려 있는 상태에서 아내들은 성적 권리를 주장할 엄두도 낼 수 없는 현실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부디 콘돔이라도 꼭 사용하세요. 그게 싫으면 오럴섹스를 하든지.” 선원 아내 주리에는 바다로 떠나는 남편에게 늘 이렇게 당부한다고 했다. 얼마나 일방적인 성이며, 무지한 성인가 그러나 이건 필리핀 여성 대다수가 처한 성 질서의 현실이다. 기다리는 아내에게 이런 당부를 하고 떠나는 남편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결코 없다. 농담이라도 맞아죽을 소리일 뿐.

기다리는 아내의 성이 무시당하는 건 그렇다 치고, 주리에의 경우는 각종 성병이 입을 통해서도 전염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인데, 이게 또 대다수 여성들의 무지한 성 실태다. 대신 바다에서 돌아온 - 외국 선창가에서 섹시한 여성들과 전문적인 섹스를 나누었던- 남편들은, 아내를 타박하기 일쑤란다. “섹시하지도 않으면서 기교도 없다”고. 이게 어디 뱃사나이를 남편으로 둔 아내들만의 이야기일까

필리핀에 살고 있는 대다수 아내들은 HIV-AIDS나 성병을 두려워하면서도 남편에게 터놓고 이야기 한번 제대로 붙여볼 수 없는 실정이다. 성 연구자들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성병 검사를 받아보도록 권할 수 있는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필리핀 여성들에게는 성을 상의하는 일이 ‘범죄’나 ‘불신’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뜻이다.

“섹스를 즐겨라.” 성 의학자들의 충고가 적어도 필리핀 일반 여성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남성 섹스만 존재하는 필리핀에서는 말이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