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미-러 회담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가… 테러와의 전쟁 공조 이면엔 석유에 대한 합의가
11월22일 러시아 북방의 대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남부 10여km쯤에 있는 작은 도시 푸슈킨. 전통적으로 ‘황제마을’이라고 하는 이곳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재임기간 2년 동안 7번째인 푸틴과의 미-러 정상회담이 열렸다. 부시의 이번 방러는 여러 날을 공식일정으로 한 지난 5월 국빈방문과는 달리 몇 시간 동안의 업무성 방문에 한정됐다. 형식적으로 이 방문은 부시의 나토정상회담 참석과 동구권 방문에 이은 연쇄 정상회담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최근 대이라크 응징에 전력을 기울이는 미국이 이 문제에 관한 러시아의 동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마당에, 부시의 러시아 방문이 갖는 의미는 부시가 러시아에 체류하는 시간과는 별개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라크와 체첸을 맞바꾸고…
미-러 정상회담 직전까지 대내외 관측통들은 미국이 당면한 이라크 문제 외에 주요 의제로 나토의 동진에 러시아의 이해를 얻어내는 문제, 반테러리즘에 대한 공동천명, 체첸문제에 대한 숙의와 북한 핵문제까지 주요 공식의제로 예상해왔다. 그러나 막상 2시간이 채 안 되게 진행된 정상회담 결과 두 나라 지도자의 공동성명이 막상 이라크 문제에만 한정되자 외신과 현지 언론의 반응은 “매우 의외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문에 의하면 이번 정상회담이 갑자기 성사된 계기는 이라크 문제였다는 게 중론이다. 즉, 한달여쯤 전에 두 나라 정상의 전화회담 당시 부시가 대이라크 제재 유엔결의에 대한 푸틴의 협조를 타진한 바 있는데, 이 통화에서 푸틴은 부시가 나토정상회담 이후 러시아를 들러줄 것을 권유했다. 이 초청에 부시는 심지어 보좌관과의 어떤 협의도 거치지 않고 선뜻 “가겠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회담의 외관상 성과로 보면 미국은 뜻한 바를 이뤘다. 부시는 푸틴과의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통해 미-러 두 나라는 이라크가 유엔 무기사찰단에 무조건 복종하며 완전한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유엔 안보리의 결의 1441조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심각한 결과”라는 구절이 가장 문제가 된 대목이다. 당초 미국안에 대해 러시아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미국의 단독 군사행동을 의미할 수 있는 이 구절의 삭제를 요구하는 등 프랑스와 함께 반대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이처럼 그간 미국과 이견을 보여온 러시아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극적인 찬성 방향으로 선회한 데는 푸틴이 적절하게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이를테면 회담 다음날 관영 <이즈베스티야>는 정상회담의 성과를 분석하며 그간 크렘린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결국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이 경우 남은 것은 “긴장을 풀고 만족만 취하는” 일뿐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 ‘만족’에 대한 보증을 받기 위해 푸틴은 부시를 나토정상회담 일정 이후 러시아로 불러들였고, 부시는 이때를 놓치지 않을세라 ‘이라크 공격허가’ 성과를 따낸 것으로 풀이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부시의 ‘푸틴 얼르기 작전’이 90년대 초 아버지 부시가 고르비를 구슬러 바르샤바조약 해체, 동독 붕괴와 미국의 1차 걸프전에 대한 동의를 구한 성과와 비교된다는 사실이다. 더 낭만적 분위기에 사로잡힌 고르비와 달리 푸틴은 전형적인 실용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구체적인 실리보따리를 가지고 오면 이라크 문제쯤은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게 푸틴의 기본입장이다. 이라크에 러시아 석유회사 들어가나
부시의 선물공세는 정치적인 면에서 이미 프라하에서 시작됐다. 나토정상회담을 마무리하며 나토 확장이 러시아의 국익과 충돌하지 않을 것을 강력히 시사한 바 있는 부시는 푸틴과의 회담을 80분 남겨놓고 프라하를 떠나는 자리에서, 지난 10월 모스크바 노르드오스트 극장 인질극 사건은 미국의 9·11 테러사건과 똑같은 범주의 테러임을 강조했다. 또한 이에 대한 진압작전은 푸틴의 “결단력 있는 조치”라고 찬사했다. 이로써 부시는 그간 모스크바 인질극 사건을 계기로 체첸문제가 단순한 러시아의 팽창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테러리즘과의 투쟁임을 강조해온 푸틴의 기본테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푸슈킨 회담에서 푸틴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라크 문제에 대한 미-러 공조의 핵심은 경제적인 이유에 있다는 게 회담의 성과를 바라보는 현지 언론의 평가다. 대표적 징후로 거론되는 것이 두 나라 정상이 공동으로 천명한 ‘미-러 두 나라 간 에너지 분야에 대한 협조’ 부분이다. 협상의 막후에서 주요 의제가 된 사항은, 익명의 러시아 고위 외무관리들에 따르면 ‘포스트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서 러시아 석유회사가 참여하는 원유채굴 계약의 문제였다. 그와 함께 막후협상에선 러시아의 주도로 국제유가가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해야 러시아 경제를 위해 적절한지에 대한 진지한 의논이 오갔다고 뒤늦게 알려졌다. 그 적정선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쪽의 협의에 의해 적어도 향후 5년간은 이라크산 석유의 덤핑으로 인해 전 세계 유가가 폭락하는 사태는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 공식통계에 의하면 현재 러시아는 연평균 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6달러 정도 인하되면 이 성장률은 절반 수준으로 감축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 정부예산에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21달러로 책정된 상황에 이 가격이 배럴당 13달러 선에 머물면 러시아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일 수출량 740만배럴을 기록한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의 석유수출국인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라크전이 끝난 뒤 국제유가가 급격히 하락하는 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시나리오인 것이다.
총매장량이 2640억배럴을 기록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1120억배럴 정도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라크에 안정된 정권이 들어서고, 투자가 촉진돼 석유채굴의 주요 기반이 조성되는 5~7년 내 이라크는 1일 700만~800만배럴을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석유대자본, 이를테면 국영 루코일 같은 그룹이 이라크 최대 유전지역인 서부 쿠르나 지역에 투자할 권리를 얻어내는 등의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에너지 회담
이번 정상회담 결과 아직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라크에서의 러시아 지분 확보를 미국이 인정한 것으로 예상한다. 러시아의 이익확보에 더 구체적인 조건을 보장받는 등 미국이 후속조치를 하느냐에 따라 러시아가 얼마만큼 정치·군사면에서 친미적 성향을 유지할 것인가가 결정된다. 어쨌든 최근 푸틴의 주요 대외정책의 면면을 주의깊게 보면 전체적으로는 ‘테러리즘과의 투쟁’이라는 구호 아래서 유효적절하게 자국의 실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집중돼 있다. 극명한 예가 이날 미-러 정상회담 이후 푸틴이 정상회담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지난해 9·11 미 테러 주범 19명 가운데서 16명이 사우디아라비아인임을 강조하고 “이 점을 절대 잊지 말 것”을 당부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이라크 제재를 둘러싼 ‘에너지 회담’ 이후 언젠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목표로 한 에너지 회담’이 예견된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전문위원 parkhb_spb@yahoo.com

사진/ 11월22일 푸슈킨에서 만난 부시와 푸틴. 푸틴은 미국의 단독 공격엔 반대했으나 유엔결의안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GAMMA)
그러나 후문에 의하면 이번 정상회담이 갑자기 성사된 계기는 이라크 문제였다는 게 중론이다. 즉, 한달여쯤 전에 두 나라 정상의 전화회담 당시 부시가 대이라크 제재 유엔결의에 대한 푸틴의 협조를 타진한 바 있는데, 이 통화에서 푸틴은 부시가 나토정상회담 이후 러시아를 들러줄 것을 권유했다. 이 초청에 부시는 심지어 보좌관과의 어떤 협의도 거치지 않고 선뜻 “가겠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회담의 외관상 성과로 보면 미국은 뜻한 바를 이뤘다. 부시는 푸틴과의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통해 미-러 두 나라는 이라크가 유엔 무기사찰단에 무조건 복종하며 완전한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유엔 안보리의 결의 1441조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심각한 결과”라는 구절이 가장 문제가 된 대목이다. 당초 미국안에 대해 러시아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미국의 단독 군사행동을 의미할 수 있는 이 구절의 삭제를 요구하는 등 프랑스와 함께 반대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이처럼 그간 미국과 이견을 보여온 러시아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극적인 찬성 방향으로 선회한 데는 푸틴이 적절하게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이를테면 회담 다음날 관영 <이즈베스티야>는 정상회담의 성과를 분석하며 그간 크렘린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결국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이 경우 남은 것은 “긴장을 풀고 만족만 취하는” 일뿐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 ‘만족’에 대한 보증을 받기 위해 푸틴은 부시를 나토정상회담 일정 이후 러시아로 불러들였고, 부시는 이때를 놓치지 않을세라 ‘이라크 공격허가’ 성과를 따낸 것으로 풀이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부시의 ‘푸틴 얼르기 작전’이 90년대 초 아버지 부시가 고르비를 구슬러 바르샤바조약 해체, 동독 붕괴와 미국의 1차 걸프전에 대한 동의를 구한 성과와 비교된다는 사실이다. 더 낭만적 분위기에 사로잡힌 고르비와 달리 푸틴은 전형적인 실용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구체적인 실리보따리를 가지고 오면 이라크 문제쯤은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게 푸틴의 기본입장이다. 이라크에 러시아 석유회사 들어가나

사진/ 지난 10월26일 모스크바의 한 극장에서 일어난 체첸 반군의 인질사건을 진압하고 있는 러시아 특수부대. 부시는 푸틴의 조처를 지지했다. (GAM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