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극물 방류 피해로 고통받는 미군기지 거주민들… “필리핀과 미국 정부에 직접 책임을 묻겠다”
(사진/클라크공군기지애에 지금도 땅속으로 연결된 채 방치돼 있는 파이프공군기지 내에서 빨래를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물을 식수로도 사용하고 있다) 지난 9월28일 오전 9시, 필리핀 팜판가(Pampanga) 지방재판정에서는 인근 수빅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거주했던 주민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관한 역사적인 첫 공판이 시작됐다. 이날 법정에는 소송당사자 주민들뿐만 아니라 필리핀과 일본의 등 주요 언론들이 재판과정을 취재했다. 소송을 제기한 주민들은 1991년 이후 미군기지 내에서 2년에서부터 5년 정도 거주하면서 과거 미군기지에서 폐기처분한 각종 환경오염에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 중 일부인 120명이다.
아이들의 죽음엔 다른 이유가…
눈물이 글썽한 채 어머니 품에서 좀처럼 떨어지길 싫어하는 네살짜리 토렌티노를 안고 온 미란다(36)를 만났다. 아이의 웃옷을 들춰보이자 심장 부근에 굵게 그어진 수술자국이 나타났다. 1994년부터 미군기지 내에서 2년 동안 거주하며 토렌티노를 임신한 미란다는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했다. 이후 인근 지역으로 새로 이주해서 낳은 토렌티노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몇 차례 병원을 옮기고 나서야 아이가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최근에야 당시 미군기지 내에서 함께 살았던 이웃의 아이들이 이와 비슷한 병을 앓거나 죽은 이유가 바로 미군기지 내에서 스며든 폐유로 인해 식수로 사용하는 강물과 지하수가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 시민단체의 끈질긴 노력과 도움으로 필리핀 정부를 대상으로 첫 재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공판은 필리핀 정부가 당시 미군기지 내 거주민을 이주시켰음을 확인하는 사실심리로 끝났다. 주민들은 환경오염피해에 대한 책임에는 필리핀 정부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필리핀의 환경정책 관련 조항뿐 아니라 ‘인간환경에 관한 스톡홀롬 선언’(1972년)과 ‘유엔 리우 환경과 개발선언’(1992년)에 명시된 ‘자국 국민들을 환경오염으로부터 보호할 의무’를 국가가 위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필리핀 정부를 대상으로 520억페소(약 20억원)의 손배소송을 진행중이다. 아울러 환경오염의 진짜 주범인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올해 말에 시작할 국제 재판에서는 1020억달러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요구할 예정이다. 다른 인권변호사 4명과 함께 소송을 맡은 알렉산더(Alexander Lacson)는 “미국 정부는 수많은 필리핀인을 질병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이다. 이는 국제범죄행위에 해당하며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책임과 보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알렉산더 변호사는 “미국 정부는 손해배상뿐 아니라 수빅과 클라크 공군기지의 환경정화에 대한 보상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1991년 6월, 클라크와 수빅의 미군기지 부근에 있는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자 인근지역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기지 내로 이주를 하게 된다. 클라크 공군기지 본부(CABCOM)에만 약 2만여 가족들이 짧게는 2년에서 5년을 살면서 기지 내에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했다. 물을 사용할 때 가끔 냄새가 좋지 않거나 기름기가 보일 때도 있었으나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기지는 이들에게 안전한 보금자리였고 환경오염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2∼3년 뒤 적잖은 아이들이 이름모를 병으로 숨지거나, 병약한 어른들에게 전에 보지 못하던 다양한 질병이 발생하면서 이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파이프라인 통해 버려진 ‘극비 물질’
1995년, 핵무기 저지를 위한 연합활동을 했던 시민단체들이 주민들의 이런 호소에 관심을 갖고 만든 것이 ‘미군기지정화 국민대책위’(PTFBC: 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였다. 이들은 이 사안이 미국과 필리핀 정부간에 얽힌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상황과 기술적인 문제가 관련돼 있어 쉽지 않은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초기에는 피해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벤젠, 톨루엔 등 각종 독극물이 신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아야 했다. 1996년 2월부터 캐나다의 병리역학 전문의인 로살리 베르텔과 독극물 전문가 등을 초청해 지역 주민들의 건강진단 조사를 실시했고,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 13개 지역에서 761명의 여성을 조사한 결과 많은 이들이 독극물의 피해자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클라트 공군기지본부(CABCOM)에 거주했던 아이들이나 태아의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병, 암 등으로 고생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조사대상자 중에만 여러 가지 암으로 현재까지 88명이 숨졌고 1999년에만 25명의 어린이들이 중추신경 마비, 선천적 심장병, 언어장애 등 희귀병에 걸려 있으며, 8명의 여성이 폐암, 낭종(囊腫), 자연유산, 사산 또는 유아 사망 경험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미군이 폐기 방치한 독극물은 벤젠, 톨루엔 등 단순한 발암물질이 아니라 복합적인 증세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이 치명적인 독극물의 폐해는 몇 세대에 거쳐서 나타날 수 있다. 해군기지가 있었던 수빅에는 백혈구 과다증세(Leukemia)를 보이는 환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지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조사한 자료에만 390명이 발병했으며, 1천여명 이상은 수빅 해군기지 군함에서 일하면서 석면에 노출되었다. 조사대상자 중 이미 100여명이 이러한 환경오염에 의해 숨졌으며 조사대상에 누락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1973년부터 엔지니어 일을 했던 파풀로는 “1985년에만 기지 내 병원에서의 쓰레기를 포함해 매일 5t의 쓰레기 6트럭분이 인근 강으로 버려졌다. 지하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버려진 것들도 많다. 당시에 미군들이 왜 이런 파이프를 통해 쓰레기를 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후에는 이를 흙으로 다시 덮어 겉보기에는 아주 깨끗한 처리를 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일이 문서에 기록된 적이 없으며, 쓰레기에는 화학물질이 함께 있었는데, 특히 우리가 마시는 강물에 버려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지난 1999년 7월 4일, 필리핀과 미국의 우호의 날, 퀘존 시내에서 ‘클라크 독극물 희생자를 위한 행진’이 열렸다. 이날 미군기지정화 국민대책위 사무총장 발도나도(46)는 이러한 충격적인 조사보고를 발표하며 국민들의 관심을 호소하였다. 이 행진에는 국회의원들이 함께 동참해 적극적인 지원활동을 약속했다. 지난 5년간 조사활동과 흩어져 있는 주민들을 다시 모으는 일을 마친 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미군기지 환경오염피해에 대한 책임규명과 보상을 위한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도 피해자, 동참합시다!”
처음부터 이 일에 참여했던 국민대책위의 발도나도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몇년간 조사를 했지만 저희들의 조사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말도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희귀병에 걸렸을 때 어머니들은 그저 자신들의 탓으로만 생각해왔습니다. 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그러한 피해를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군이 주둔했고, 최근에는 수년간 미군이 폐유를 식수원인 한강에 방류했음이 밝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함께 힘을 합하기를 희망합니다.”
클라크 공군기지를 지역주민과 환경단체 실무자와 현장조사를 마치고 돌아설 때 누군가 쪽지를 가방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서 메모를 펼쳐보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곱살 난 제 아들은 선천적 심장병에 걸려 있습니다”라고 적힌 애절한 어머니의 쪽지였다. 그리고 이날 한국에서 보내온 한 신문은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두달 전 용산기지에서 독극물을 한강에 무단 방류했을 때도 주한미군 당국은 한국민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수준은 아니라고 하며 사과성명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얼마 전 원주에 있는 주한미군기지에서 지난 10년 동안 항공폐유를 몰래 버린 사실이 폭로되었다. 벤젠과 톨루엔 등 발암물질이 섞여 있는 항공기 폐유를 10년 동안 식수원에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심각한 환경오염피해를 입었을 때 “미안하다”는 사과로 덮어둘 문제가 아님을 우리도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글·사진 필리핀=나효우 통신원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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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군기지정화국민대책위의 발도나도 사무총장)

(사진/손해배상 소송을 맡고 있는 알렉산더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