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프랑스 포도주, 침공당하다

435
등록 : 2002-11-20 00:00 수정 :

크게 작게

11월 보졸레 누보 출시를 계기로 짚어본 프랑스와 ‘새로운 세계’의 포도주 전쟁

일러스트레이션/ 박현미
프랑스에선 11월 셋쨋주 목요일부터 새롭게 맛볼 수 있는 술이 있다. 매년 11월 셋쨋주 목요일부터 “보졸레 누보가 도착했다”는 슬로건과 함께 프랑스의 카페·바·레스토랑·상점 등에서 시판되기 시작하는 적포도주다. 올해는 11월21일이 그날인데, 보졸레 누보가 이날 새벽 0시를 기해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전역에서 일제히 시판되기 시작한다. 이날은 세계적인 포도주 시음 축제날인 셈이다.

품질에 따라 다양한 명칭 붙여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의 중동부 지방 보졸레에서 생산되어 그해에 바로 시판되는 적포도주다. 여러 해 동안 묵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묵은 포도주보다 향이나 맛이 가볍다. ‘보졸레 누보 축제’의 기원은 19세기 보졸레 포도밭 지역 부근, 사온강 근처의 산업지역에서 10월 마지막 일요일마다 노동자들이 바에 모여 그해 생산된 포도주를 시음하던 풍습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단절되기도 했던 이 풍습은 1951년 11월부터 공식적인 행사로 재개되었고, 59년부터 보졸레 포도주 교환전문협회가 생겨 이 행사를 유럽 전역으로 파급시켰다. 그러다 80년대부터는 대륙과 대양을 건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도 퍼져갔다. 69년부터 생겨난 유명한 슬로건 “보졸레 누보가 도착했다”와 함께 이 행사는 현재 유럽은 물론이고 신대륙 및 아시아·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200여개국에서 11월 세 번째 목요일부터 품절되는 그날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포도주의 이미지를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데 앞장서는 이 행사에 힘입어 보졸레 지역은 포도주의 52%를 수출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적인 포도주 시음행사를 주도하는 보졸레지만, 프랑스 전체 포도주 생산의 2.42%, 양질의 포도주(AOC) 중에서는 5.62%를 차지할 뿐이다.

프랑스에서 단연 1위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것은 프랑스 남서쪽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보르도’다. 기후적 이점과 세개의 강을 끼고 있어 지형적 이점까지 있는 보르도 지역은 보졸레의 6배에 해당하는 포도주를 생산한다. 보르도는 보르도 및 근교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적포도주·핑크포도주를 총칭하며, 보르도를 생산해내는 지역은 총 10만5천ha 이상의 포도밭이다. 보르도 지방 다음으로는 발레드론 지역이 생산량 2위를 차지하는데 보르도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포도주를 생산한다. 이외에도 루아르·샹파뉴·부르고뉴 등의 순으로 이어지며, 생산량에서 8위를 차지하는 보졸레 뒤로 동부의 알자스 지방도 포도주 생산으로 유명하다. 포도주 산업은 프랑스 전체 농업경제의 14%를 담당한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만한 포도주의 질에 따른 프랑스식 기호가 있다. 대표적인 네 종류를 알아보면 우선 AOC는 특정한 기준으로 검증되어 정식으로 붙인 명칭이 있는, 원산지가 인증된 포도주다. 다음은 VDQS로 AOC보다는 좀 덜 까다롭게 검증된 양질의 포도주임을 증명하는 기호다. 그리고 ‘지역 포도주’(vin de pays)는 VDQS보다 저급한 포도주로 특정지역에서 생산된 포도주 중에서 일정 규정을 통과한 포도주에 붙는 명칭이다. 지역 포도주보다 저급하지만 대중적인 포도주로 ‘식탁 포도주’(vin de table)가 있다. 이 기호들은 지역적 특성, 농축방법, 알코올농도, 당도 등을 검사하여 부여하는데, AOC는 검사과정이 제일 까다로우며 포도주 재배방법까지 포함한다.

복잡하고 거만한 포도주

이렇듯 전통과 품질에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프랑스 포도주 산업이 최근 들어 고민에 빠졌다. 시장성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전체 포도주 소비의 20%를 수입에 의존하는 미국 포도주 시장의 경우 고급 포도주 부문은 프랑스가 늘 장악한다 하더라도, 전체 판매량에서 지난해 이탈리아(37%)에 이어 2위(20%)를 차지했으며, 올해는 이탈리아·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3위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 시장에서 이탈리아 포도주의 성공은 미국 내 이탈리아계 공동체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이외에도 미국에서 프랑스산 포도주의 소비량이 줄어드는 대표적 이유는 소규모 생산자들의 마케팅 한계와 언어적 장애를 꼽는다. 다시 말해 미국인들에게 프랑스 포도주의 이름은 너무 복잡하고 발음하기 어려우며 감별도 까다롭다는 얘기다. 이는 미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산 포도주 소비량이 늘어가는 현상으로도 해명이 된다. 지난 10월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뉴욕의 포도주 세계박람회(Vinexpo)에서 전문가들도 외국인 소비자들에게 프랑스 포도주는 “복잡하고 거만하고 강압적”이라 좀더 단순해져야 한다고 평했다.

이탈리아는 미국 시장에서뿐 아니라 포도주 산업에서 프랑스의 가장 강한 적수이다. 포도주 총생산량에서는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앞서지만, 프랑스는 국내 소비가 이탈리아보다 많다. 대신 이탈리아는 포도주 수출량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포도주는 세계 시장에서 종류 및 질, 가격이 잘 부합된다는 평판을 듣는다. 이는 곧 세계 시장에서 이탈리아의 포도주 마케팅이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프랑스를 부쩍 긴장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포도주 농지 면적이 유럽에서 가장 넓지만, 생산량에서는 유럽 3위를 차지하는 나라가 스페인인데, 세계 시장 점유율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에는 뒤지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포도주 생산은 전 세계 포도주 생산량의 60%를 담당하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포도주만으로도 전 세계 총생산량의 40%(2000년)를 차지한다.

유럽연합 외에도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의 포도주가 특히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최근 세계 포도주 시장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미국·오스트레일리아·칠레산 포도주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프랑스 포도주의 아성을 넘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산 포도주는 매년 성장세를 보인다. 가격과 품질에서 부담이 없다고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산 포도주의 성공은 앵글로색슨 언어 및 문화에도 힘입은 바 크다는 분석이다.

자존심이냐 생존이냐

이런 포도주 시장의 동향 속에서 프랑스의 포도주 관계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미국·칠레 등 새롭게 부각되는 포도주 생산국들을 기존의 생산국과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라고 부른다. 새로운 세계의 포도주들이 현대적 마케팅에 성공하여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는 와중이라, 이 표현은 오히려 기존 생산국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어감을 준다는 비판적 의견도 있다. 그래서 부르고뉴산 포도주를 전문으로 다루는 한 잡지는 지난 가을부터 ‘새로운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포도주 전쟁에서 국내 및 국제 포도주 시장을 장악해온 자존심 강한 프랑스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제적 감각에 눈떠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여기에 대해 단기적으로 그때그때 변화하는 시장상황에 발맞추자는 의견과 장기적인 시각으로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어쨌든 보들레르의 시구절과 함께 마시는 프랑스 포도주의 맛은 그래도 일품이다.

“…난 알지 그 뜨거운 언덕에서

내게 삶을 선사하기 위해 또한 내게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

얼마만큼의 고통과 얼마만큼의 땀과 또 얼마만큼의 뜨거운 태양이 필요한지를

하지만 난 배은망덕하지도, 고약하지도 않아.

왜냐면 내가 노동으로 지친 인간의 식도로

떨어질 때, 무한한 환희를 느끼거든

그리고 그의 따뜻한 가슴으로 떨어져 내리면

바로 거기서 난 그 차디찬 지하실에서 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지지….”

-보들레르 ‘포도주의 영혼’ 중에서

파리=이선주 전문위원 seoulparis@tiscali.f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