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동남아 군부들 살판났네

432
등록 : 2002-10-3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연쇄 테러 배후는 미궁 속으로 …테러와의 전쟁 이용해 권위주의 강화하는 각국 정권

사진/ 10월20일 삼보앙가 시내를 무장경찰이 순찰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아래 시민들의 기본권마저 위협하고 있다. (AP연합)
연속되는 동남아시아 폭탄테러 범행 배후와 범인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동남아시아 각국 정부는 반테러 공동전선을 이루려고 한다.

지난 10월12일 인도네시아 발리 참사가 일어난 뒤, 17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끝자락에 있는 삼보앙가 시내 상점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고 뒤이어 18일 밤, 케손시 북부를 달리던 버스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3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0월20일 삼보앙가 성당 부근에서 또 다른 폭탄이 터졌다. 가히 공포의 폭탄테러 행진이라 할 만하다. 이보다 앞서 지난 10월2일과 10일에도 민다나오섬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 10월에만 전국에서 5차례의 크고 작은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범인 지목 수시로 바뀐다


특히 10월18일 케손시에서 일어난 버스 폭탄테러는 수도권 시민들 역시 폭탄테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줘 공포심을 더하고 있다. 시민들은 주변에 이상한 물건이 보이기만 해도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폭탄테러가 일어난 지 불과 며칠 사이에 경찰청에 신고된 폭탄신고만 25건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잠시 물건을 놓고 자리를 비우거나 쓰레기를 주택가에 버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찌 보면 일상화되다시피 한 필리핀의 폭탄테러는 무슬림 또는 일부 과격좌익 단체뿐 아니라 다양한 정치목적으로 행해진다. 1986년 코리 아키노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일어난 군사 쿠데타 기도만 해도 6차례, 정국이 불안할 때마다 폭탄테러가 터졌다. 아로요 현 정부가 집권하기 전 에랍(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탄핵소추를 당했을 때도 지하철 부근에서 폭탄이 터졌고, 아로요쪽은 에랍쪽이 장기집권을 획책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 수도권에서 일어난 폭탄테러에 대해서도 정권 타도를 노리는 세력이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아로요 정부가 떨어진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연속 테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다양한 말이 나온다.

테러 범인 색출에는 미국의 정보력과 입김이 작용한다. 이번 연쇄 폭탄테러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국제 테러단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그룹이 지목되었다. 10월 초순 일어난 두 차례의 폭탄테러 범인에는 이미 미국에 의해 알카에다와 연관이 있다고 낙인찍힌 이슬람 과격단체 ‘아부사야프’가 지목됐다. 그러나 발리 폭탄테러 이후 일어난 10월17일, 20일의 삼보앙가 폭탄테러 범인은 제마 이슬라미야(JI)의 필리핀 지부로 바뀌었다. 10월21일 삼보앙가 시장 마리아 클라라 로브레가트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연속 테러범행 배후에는 국제테러와 관련이 있는 외국인 전문 테러리스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10월23일, 삼보앙가시 빈민지역에서 폭탄테러범으로 잡혀온 18~27살 젊은이 5명은 모두 필리핀인들이었으며, 이들의 범행 동기도 아직은 불분명하다. 경찰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들이 아부사야프와 관련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을 아는 현지 주민들은 지역 불량배들이라고 말한다.

수도권 지역에서 발생한 버스 폭탄테러에 대해 정부는, 처음엔 공산당 계열 무장투쟁 그룹인 신인민군(NPA) 소행으로 발표했으나 꿰어맞추기식 범인 지목이라는 비판이 일자 다시 제마 이슬라미야로 바꿨다. 제마 이슬라미야의 필리핀 지부는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외국인 2명과 필리핀 2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소규모 조직이다. 현재 경찰이 추정하는 범인은 필리핀 최대 규모의 무슬림 그룹인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ILF)의 회원인 요나스. 필리핀 정부가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이 요나스를 비호해 범인 검거가 어렵다고 발표하자, 이 단체 부사령관인 알하지 무라드가 요나스를 색출하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적어도 무슬림 모두가 폭탄테러와 관련되어 있지 않음을 밝혔다. 현재 요나스는 또 다른 무슬림 그룹인 알고지(Al-Ghozi)와 연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남아 전체를 반테러 협정으로

사진/ 지난 10월17일 삼보앙가에서 일어난 폭탄테러 현장.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제마 이슬라미야 필리핀 지부는 세력이 극히 미약하다. (AP연합)
최근 폭탄테러 혐의자가 자주 뒤바뀌는 데 대해 경찰 내부에서도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필리핀 경찰청장 헤르모게네스는 “요나스를 포함해서 누구도 섣부르게 범인으로 단정하거나 어떤 특정단체와 연관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다나오섬에서 일어나는 폭탄테러를 무조건 아부사야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단정하거나 뚜렷한 증거 없이 수도권 일대에 강한 조직력이 있는 신인민군에게 죄를 묻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아부사야프는 금품을 목적으로 한 많은 범죄와 연관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필리핀 이슬람 단체에서도 인정을 못 받고 궤멸 위기에 놓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삼보앙가에만 260명의 미군과 1천여명의 필리핀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다. 초기에는 200여명으로 알려진 아부샤아프가 지난 8개월간의 작전으로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지난 6월21일 이 단체의 대변인이면서 미국이 100만달러의 현상금을 건 아부사바야가 다른 3명의 대원과 함께 살해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다. 이후 미군은 작전을 필리핀 공산당 계열인 신인민군과의 전쟁으로 넓히며 메트로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으로 작전지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최근 아로요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캄보디아를 함께 엮는 반테러 협정을 제안하고 나섰다. 11월 중에 반테러 동남아시아 포럼을 개최하고 반테러 협정을 맺을 예정이다. 발리 참사 일주일 만에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10월18일 특별내각회의를 통해 테러 용의자를 재판 없이 구금,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포고령 내용을 공표한 바 있다. 아로요가 메가와티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제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캄보디아를 엮어 반테러 공동협약을 만들 때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조만간 타이까지 포함해 동남아시아 정권들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정권안보와 정권재창출을 기도하고 있다.

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 프란시스 리치아르돈은 최근 모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맥아더 장군이 여러분과 맺은 친교 이상으로 다시 여러분들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동남아시아 전략도 안착돼가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시민사회단체들은 필리핀 정부가 미국의 군사력이 확대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른다고 비판한다. 또한 언제든 혐의만으로 체포·구금할 수 있는, 일반 시민들의 기본적 인권마저 무시하는 악법이 횡행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0월20일 저녁 8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발리 참사 추모집회에는 1천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참사로 죽은 이들을 추모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해 다시 고개를 드는 군부의 세력화에 커다란 우려를 나타냈다. “9·11을 전후로 전 세계에서 미국의 힘이 팽창하면 아시아는 10·12 발리 참사를 전후로 정권을 안정시킨다는 명분 아래 정부와 군부가 다양한 인권침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날 참석한 인도네시아 인권시민단체의 아리프 파잘은 이렇게 전한다.

발리 테러 이후 인권침해 가속화

또한 필리핀 정부는 새로운 주민등록제를 실시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테러 방지를 이유로 시민들의 개인 정보를 모두 데이터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필리핀 각종 인권단체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필리핀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조카스는 “이미 사회보험 카드 등 3종류의 주민증이 있는데도 다시 카드를 만들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개인의 정보를 부패한 정부가 어떻게 사용·유출할지 모르며 각종 인권침해와 남용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우리 모두 잠정적 테러 용의 혐의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있다. 개인 사생활을 유린하는 것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테러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동남아시아에서 부는 테러와의 전쟁 바람은 정권안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테러하는 또 다른 전쟁인 셈이다.

마닐라=나효우 전문위원 nahyowoo@hotmail.com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