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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전쟁? 우리 이름으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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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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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연상시키는 반전시위, 미국을 휩쓸다… 언론은 소극적 보도태도로 일관

사진/ (GAMMA)
“No more killing, no more war, no more violence anymore.” (더 이상 살해도, 전쟁도, 폭력도 싫다.)

지난 10월6일(현지시각). 로스앤젤레스(LA)의 연방청사 앞에는 수많은 군중이 집결해 있었다. “스포츠가 아니고는 더 이상 군중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나라”라고 묘사되던 미국에서 다수의 군중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각종 구호가 적힌 피켓이나 성조기를 들고 ‘노 워’(No War!)라는 구호와 함께 다운타운으로 행진을 벌였다. 대형 성조기를 든 채 시위에 참여한 잔 스캇필드(28)는 “시민들이 다가와 격려를 해줬고 일부는 차를 세우고 직접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집회 주최쪽도 이날의 집회가 성공적이라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지역 노동·인권단체 등이 주축이 된 시위 주최쪽은 이날 5천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밝혔지만 경찰쪽은 참가인원이 수백명에 그쳤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수백명이 됐건 수천명이 됐건 LA에서 반전시위는 예전처럼 “별 볼일 없는” 사안으로 치부할 단계는 지나버린 것 같다. 반전열기는 이미 맹렬한 기세로 미 전역을 흔들고 있다.

이날 LA를 비롯해 워싱턴·뉴욕·샌프란시스코·포틀랜드 등 최소한 40개 도시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최대 2만명(뉴욕)의 인파가 모인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추산했다. 반전평화 시위로는 베트남전 이래 최대 규모다. 몇몇 지역에서는 연방청사 진입 등 격렬한 시위로 일부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할리우드 스타부터 실업인들까지

9월 말부터 대학가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연일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지난 9월29일 수도 워싱턴에서는 시위대가 딕 체니 부통령의 관저 앞까지 진출해 “No blood for Oil”(석유를 위한 피는 안 된다)을 외쳤다. 미국의 반전운동 열기는 더 이상 ‘소수 극렬분자들에 의한 몸부림’ 차원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언론에서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요사이의 흐름을 비교하는 논조들이 선을 보인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최근의 미국 내 반전운동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이다. 우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나오고 있다. 제시카 랭, 올리버 스톤, 제인 폰다 등이 반전시위 장소에 나타나거나 다른 유명인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반전 성명이 담긴 광고를 내는 등 할리우드 스타들도 반전대열에 참가했다. 지난주에는 유명 아이스크림 회사의 창립자를 대표로 하는 수백명의 실업인들이 나서 <뉴욕타임스> 등에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모르몬교 중앙본부 등 각종 사회·종교단체들에서도 전쟁에 반대한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역시 관심의 초점은 이런 미국 내의 반전무드가 베트남전의 운명을 결정한 것처럼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미 현 상황이 베트남전 당시와 닮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에 전개되는 전국 규모 시위들은 뉴욕에 근거지를 둔 ‘Not in Our Name’(우리 이름으로는 안 되오)이라는 반전연대 그룹에 의해 조직되고 있다. 이 조직에는 ‘Refuse and Resist Project’(거부와 저항) 등 다수의 전국 그룹들이 참여하고 있다. ‘Not in our name’이 주도한 지난 10월6일의 시위에는 전국적으로 약 40여곳에서 10만명가량의 군중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밖에도 미국 우호 서비스 위원회(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같은 단체들이 지방의 크고 작은 각종 단체들과 행사를 통해 연대를 도모하고 있다.

매파들, 반발 고려해 ‘속전속결’ 전략으로

사진/ 10월8일 LA에서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는 시민들. 이날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AP연합)
반전운동 관련 단체들도 조직화의 속도에 내심 놀라는 모습들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학생운동의 부활이다. 전국 각지의 대학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조직화되고 점차 활동의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Not in Our Name’의 한 관계자는 “(의회의) 이라크 침공 결의안은 놀랄 일이 아니다. 폭격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전국에 걸쳐 본격적인 조직 시위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반전열기가 베트남전 반대시위와 같은 수위로 발전해나가는 데는 몇 가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언론들의 여전한 소극적 보도 태도다. <워싱턴포스트> 같은 한두개 주류 언론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대다수의 대중적 신문·잡지들과 전파매체들은 반전운동에 결코 개방적이질 않다. 베트남전의 뼈아픈 과거를 기억하는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반전운동의 흐름이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경우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겪어야 할 위상 실추와 불이익이 너무나 크다는 묵시적인 공감대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아서 기는 언론’의 미국판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는 더 이상 언론들이 무조건 외면할 수만은 없도록 몰아가고 있다. 적극적이진 않아도 적어도 사실보도만큼은 피해서는 안 될 상황이다.

국내의 반전열기가 예상외로 빨리 가속화되자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쪽은 역시 부시 행정부 내의 매파 핵심세력. 반전시위가 거세진 지난 주말 직후,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전쟁을 수행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외교노력이 실패했을 경우 공격대상 국가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조기에, 그리고 위험하기 전에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럼즈펠드 가이드라인’이라고 불리는 이 럼즈펠드의 비망록은 원래 지난해 3월에 작성된 것인데 최근 유엔에서의 고전과 반전열풍이 함께 겹치는 시점에서 다시 경신되어 매파들 사이에 회람되고 있다고 일부 언론들은 보도했다. 물론 이라크전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을 경우 세계와 국내 여론에 밀릴 경우를 감안한 것이다. “미국의 지도부는 절대로 대중과 의회, 유엔이나 동맹국들로부터 벙어리가 되어 주저앉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미국의 현대전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속전속결로 나간다는 원칙,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 그 골격이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여론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쟁도 돌입하기 전에 이 정도의 반전열기가 확산된다면 향후 베트남전을 능가할 수다. 이를 의식한 매파 핵심세력은 결코 장기전을 추구하지는 않을 분위기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집중적인 타격을 가해 상대를 괴멸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전략에도 한계는 있다. 걸프전에서 이미 시도해봤지만 여태껏 후세인 정권은 건재하고 미국은 대리정권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10월26일 전국적 반전시위 예정

이 점에서 본다면 최근 부시 행정부의 전쟁전략은 이미 일정부분은 실기한 듯한 모습이다. 외교전에서나 국내 여론 무마에서나 행정부의 뜻대로 제대로 일이 풀려나가지 않고 있다. 베트남전 초기보다 더 거센 국내 여론의 반발이라는 돌발변수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를 무시하고 강공일변도로 나갈 경우 또다시 국내 여론의 저항에 부딪쳐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생명이 걸린 일대의 정치도박이 진행 중이다.

미국 내 반전운동 세력들은 오는 10월26일을 기해 전국적인 차원의 대규모 반전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이 이라크전 반전열기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반전 평화시위가 앞으로 베트남전 반전운동처럼 걷잡을 수 없는 단계로 발전해나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지금 미국 내 반전열풍은 이미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권자들이 장막 안에서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는 변수다. 거리로 나선 미국 시민들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무력주의 노선을 꺾을 수 있을까

LA=박귀용 전문위원 rinaldy@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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