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서 혁명의 길 선택한 무장투쟁 지도자 옹나잉, 기자로 새롭게 태어나다
“버마 정부군으로부터 공격받은 티파도 마을 카렌(Karen)족 159가구 724명이 하롤트카니 몬족 난민촌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몬족 정치기구인 뉴몬스테이트파티(NMSP)는 이들 카렌 난민에게 정부군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정거리에 드는 칼라이손파이라는 매우 위험한 지역을 배정했고, 타이 정부는 난민 수용을 거부해버렸습니다. 현재 먹을거리마저 바닥난 카렌 난민들은 오도가도 못한 채 생존의 위협을 받는 실정입니다. 지금까지, 버마전선에서 < NMG >였습니다.”
피 묻힌 손으로 펜을 잡겠다고
네트워크 미디어 그룹(Network Media Group)인 < NMG >에서 건져올린 전선지역 뉴스는 < BBC > 단파 라디오를 타고 온 세상에 알려졌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버마전선지역 소식은 이렇게 새로 태어난 ‘하찮은’ 뉴스에이전시 하나를 통해 바깥 세상으로 흘러나왔다.
“웃기는 뉴스에이전시인데, 선전에서 언론으로… 아무튼 웃기게 됐어요.” 전혀 웃기지 않는 민중뉴스에이전시를 창작해낸 옹나잉(Aung Naing·36)은 전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에서 가장 덩치 큰 북부 카친 지역 학생군(ABSDF-NB) 580명을 이끈 지도자로서 빛나는 전투력을 발휘한 만큼 탈도 많고 말썽도 많은, 그야말로 버마혁명전선에서 ‘고문관’ 같은 사람이었다. 지난 2000년 버마학생민주전선 제1세대들이 은퇴하면서 조직한 준정치조직 민주개발네트워크(NDD) 선전부를 떠맡은 옹나잉은 동료들 ‘눈치’를 살피다 대뜸 독립언론 < NMG >를 선언해 주변을 황당하게 했다.
“긴가 민가 싶긴 한데, 고집피우는 놈을 당해낼 재간도 없고, 사실은 그런 뉴스에이전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민주개발네트워크 제2대 의장 초초는 결국 전폭적 지원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조직에서 독립했으니 예산지급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전선지역 여성들이 정부군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뉴스를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로 보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던데요. 정치조직에서 보낸 뉴스라고 무슨 정치선전일 것이라 여겼는지.” 분해서 씩씩거리던 옹나잉은 불면증에 시달린 끝에, “정치간판을 달고는 뉴스를 전달할 수 없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고, 그날로 ‘독립군’ 창설을 결심했다.
“똑똑한 놈 몇이면 된다”고 주변을 설득한 동시에 각 전선마을로 파고들어 민중통신원들을 하나둘씩 심어나갔다. 옹나잉은 알고 있는 모든 외신기자들을 쫓아다니며 기사를 어떻게 만드는지 또 어떻게 독립할 수 있는지를 캐물었다.
“피 묻힌 손으로 펜을 잡겠다고” 자격지심 탓에 고민이 많았지만, 이것도 ‘혁명’이라 여기며 ‘재미있게’ 일하자고 다짐, 다짐해왔다는 옹나잉에게 되물었다. “혁명이 재미있다고” “예에(의아해하며), 재미없으면 어떻게 이 짓을 해요 지난 10년간 혁명전선에서 뛰어다닐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시절이었는데요.”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모두가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난 옹나잉은 어린 시절 기억이라고는 ‘때려죽여도’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뿐이라고 했다. “1년만 다녀보고 싫으면 그만두면 되잖아.” 결국 성화에 못 이겨 고집을 꺾고 맨달레이의과대학에 진학한 옹나잉은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과 혐오감 때문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 1988년 ‘민주화의 봄’을 맞자 비밀학생결사조직을 꾸리면서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선마을마다 민중통신원을 심겠다”
“혁명이 날 살려준 셈이지요.” 혁명이 없었으면 ‘술중독’과 ‘술폐인’을 거쳐, 그 무렵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 여긴 ‘술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라며, 혁명이 자신을 치료한 명의라고 소개했다. 옹나잉은 자신이 혁명가 팔자란 사실을 깨달은 건 산악밀림에 도착했을 때부터라고 한다. “먹을 것도 없고 잠잘 곳도 없는 산악밀림을 못 견뎌 수많은 동지들이 떠날 때도 나는 마치 어머니 자궁 속에 들어온 것처럼 포근한 기분이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여보자. 사실 나는 1994년, 혁명 때문에 헤어진 어머니와 아들을 주제로 기사를 만들고 싶어 군사정부에 ‘찍히지’ 않은 미국 기자를 랑군으로 보내 옹나잉 어머니 취재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옹나잉이 잘 있다고 그럼 됐네. 제 갈 길 찾아간 놈, 지만 재미있으면 나야 슬프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몰래 ‘접선’한답시고 조심조심 한 정부병원으로 찾아간 그 동료기자에게 옹 나잉 어머니는 아웅산 수지 사진을 꺼내 매만지며 덤덤하게 말씀하시더라고. “그놈 만나거들랑 밥이나 제때 찾아 먹으라고 전해주세요.”
예나 지금이나 서슬 퍼런 군사독재치하 정부병원에 근무한 의사가 자신의 진료실에 아웅산 수지 사진을 버젓이 갖고 있다는 건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되돌아온 동료는 ‘충격적인 어머니’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한동안 주변에서는 그 어머니로부터 그 아들이 태어난다는 단순한 사실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옹나잉이 다듬어가는 이 ‘웃기는’ 뉴스에이전시는 ‘당돌’하게도 대안매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주류언론을 ‘혁명전선’으로 삼겠다는 노선을 분명히 했다. 옹나잉을 비롯한 독립언론 ‘혁명군’ 6명은 기성언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군자금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걸 깨닫고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1년 만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 BBC > < RFA >(Radio Free Asia) < DVB >(Democratic Voice of Burma) 라디오와 기사 송출 계약을 맺어 작으나마 고정시장을 확보했다. 또한 잡지 < New Era > < Voice of Burma > < Mojo >를 비롯해, 온라인 매체인 < Burma Net > < Burma News Update > < Burma News Weekly >에도 기사를 배급하기 시작했다. 기사 풀어낼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옹나잉은 요즘 전선마을마다 민중통신원을 심겠다는 목표 아래 통신원 교육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뉴스 생산과 판매에 새로운 지평 열어
이렇듯 전선에서 최초로 벌어진 ‘민중뉴스에이전시’ 실험은 기성매체들을 하나둘씩 파고들며 뉴스 생산과 뉴스 판매에 새로운 장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제3세계 많은 지역에서 민중뉴스에이전시를 꿈꾼 실험들이 벌어졌지만 재원부재·시장부재·품질부족 같은 기본적 조건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모두 싹을 틔우기도 전에 전멸당하고 만 사실을 더듬어보면, 1년 동안 기록한 < NMG >의 ‘전투상보’는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총 들고 산악밀림에서 싸우는 일보다 힘든 건 이 세상에 없어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 하는 일이 어렵긴 해도 장난 수준이죠.” “혁명하듯이….” 바로 여기에 ‘전투력’이 담겨 있는 탓이었다. “지금은 초라한 수준이지만 버마 내부에 민주정부를 수립하면, 제대로 된 뉴스에이전시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으로 일하니 신이 날 수밖에요.” 옹나잉은 심각해지면 주로 실실 웃는 편이었고, 이 말을 하는 동안은 더 실실 웃었다.
기성언론이 접근할 수 없는 고립당한 버마전선지역 뉴스가 옹나잉을 비롯한 여섯 혁명기자들 손을 거쳐 지금 세상에 하나둘씩 전해지고 있다. 자본주의 언론이 외면한 전혀 상품성 없는 지역 뉴스가 뉴스로 대접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이건 < NMG >가 승전보를 울리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웃기는 출발. 민중뉴스에이전시는 이렇게 말썽 많은 옹나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났고, 21세기 공룡자본주의 언론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언론혁명 가능성으로 그 기를 키워나가고 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이미 수많은 동지들이 죽었는데 나 하나쯤 더 죽는다고 세상이 원통해할 일도 없을 테고….” 옹나잉은 그렇게 말하며 또 실실 웃었다.
‘죽기 살기로 하는 언론’. 나는 지금껏 이 세상에 죽기 살기로 하는 언론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월급에 몸과 마음을 모두 매단 기자들만 보고 살아온 나로서는 이 혁명기자들을 볼 낯이 없었을 뿐!
매홍손 북부=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asianetwork@news.hani.co.kr

사진/ 카렌민족진보당(KNPP) 서기장 라이몬 투와 인터뷰하는 '기자' 옹나잉. 최근 옹나잉은 버마전선에 산재해 있는 난민문제에 취재 초점을 맞췄다.

사진/ 카친독립기구(KIO)를 이끈 브랑셍 의장(사진 왼쪽 선글라스)과 버마학생민주전선 북부의장으로서 작전회의를 하던 시절의 '무장투쟁가' 옹나잉(맞은편 선글라스)
“웃기는 뉴스에이전시인데, 선전에서 언론으로… 아무튼 웃기게 됐어요.” 전혀 웃기지 않는 민중뉴스에이전시를 창작해낸 옹나잉(Aung Naing·36)은 전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에서 가장 덩치 큰 북부 카친 지역 학생군(ABSDF-NB) 580명을 이끈 지도자로서 빛나는 전투력을 발휘한 만큼 탈도 많고 말썽도 많은, 그야말로 버마혁명전선에서 ‘고문관’ 같은 사람이었다. 지난 2000년 버마학생민주전선 제1세대들이 은퇴하면서 조직한 준정치조직 민주개발네트워크(NDD) 선전부를 떠맡은 옹나잉은 동료들 ‘눈치’를 살피다 대뜸 독립언론 < NMG >를 선언해 주변을 황당하게 했다.


사진/ 옹나잉은 학생군 최대 병력을 지닌 카친지역의 북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NB)을 이끈 의장으로 무장혁명투쟁의 핵심 노릇을 해왔다. 1992년 모습.

사진/ 옹나잉(왼쪽)이 버마-타이 국경의 소수민족중 하나인 파오족 청년민주기구(PYDO) 조직원들 가운데 현장 통신원을 선발하기 위해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옹나잉은 비선조직을 통해 1988년 버마 '민주화의 봄' 당시 맨달레이 지역항쟁을 주도했다. 이 사진을 통해 외신기자들이 취재하지 못한 맨달레이 항쟁을 14년 만에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