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기행(5·끝)
나치에 동조해 80만명을 학살한 크로아티아의 상처… 성인으로 추앙받는 대주교의 감춰진 죄악
발칸국가들은 지금도 지뢰문제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 전투지, 비전투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게 지뢰를 매설한 결과 인명피해가 속출하는 것은 물론, 토지의 이용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그 정도가 심한 보스니아에는 수백만개의 지뢰가 국토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바람에 국토개발이 전면 중단상태에 있다. 크로아티아도 예외는 아니다. 기차를 타고 자그레브를 벗어나 보스니아의 국경지대에 가까워지면 넓고 기름진 평야는 완전히 버려진 상태로 놓여 있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오랫동안 미치지 않았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어느 날 끌려오던 세르비아인·유대인·집시
자그레브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놉스카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의 철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동쪽으로 향하는 기찻길은 세르비아로, 남쪽으로 향하는 기찻길은 보스니아로 향한다. 여기서 남향하는 기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시골 역사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긴 하지만 한 사람의 역무원도 찾아볼 수 없다. 곳곳에 늘어선 흉가들은 20세기에 두번의 전쟁이 지나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이 바로 그 야세노바츠, 죽음의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마을을 지나 2km 정도 걷다 보면 먼 곳에 꽃모양을 형상화한 거대한 위령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탑은 2차대전 뒤 20년이 지난 1965년, 학살된 희생자 가족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조각가인 보그다노비츠가 제작했다. 수용소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진 지금 이 위령탑마저 없었더라면 야세노바츠는 단지 소문으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야세노바츠가 해방되기 전 나치에 동조하는 우스타시 정권은 이곳에서 학살 흔적을 없애기 위해 건물들을 파괴하고 남아 있던 서류들을 소각했다. 또한 티토 정부는 “유고민족은 하나”라는 선전선동 정책으로 야세노바츠의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했다. 학살자와 피해자가 같은 국기 아래에서 동거하고 있었지만 피해자들은 한번도 그 당시의 악몽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만약 티토 정부가 당시 야세노바츠의 역사적 문제를 제대로 해결만 했더라도 발칸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바강변을 따라 놓인 철길 위에는 당시 희생자들을 실어나른 고물기관차 한대가 멈춰서 있다. 그리고 시선을 왼편으로 돌리면 단출하게 지어진 작은 기념박물관이 보인다. 박물관 뒤편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에는 많은 학들이 진혼굿을 펼치듯 수용소 자리 바로 위의 하늘로 치솟았다 내려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운 좋게 야세노바츠 수용소를 탈출한 생존자들에 따르면 당시 사바강은 떠다니는 시체와 피로 가득 찼고 심지어는 수백km 떨어진 베오그라드의 강 하구까지 시체와 피가 떠내려왔다고 전한다. 전후 크로아티아민족위원회도 인정했듯이 이곳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만 60만에서 7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유대인들, 집시들이 죽어갔다.
마을에 들어서자 두 할머니와 자전거를 탄 어린이들이 보였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내게 갑자기 독일말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으로 작은 키를 재는 시늉을 하면서 “어린아이들까지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봤고 70만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고 울먹였다. 그리고 폐허가 된 집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두번의 전쟁이 지나간 뒤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보아라. 난 2차대전, 발칸전쟁 등 두 차례의 전쟁을 모두 다 겪었다”며 하소연했다. 선대 때부터 이곳에서만 살아온 토박이 세르비아인 할머니 마야(가명)는 야세노바츠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941년 11살인 마야는 집 안에서 창 너머로 우스타시 군인들과 강제로 끌려오는 세르비아인들과 유대인, 집시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보았다. 이들은 수용소 건물을 짓는 강제노동에 혹사당했다. 당시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마야의 어머니는 어린 마야와 함께 친척이 살고 있던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로 재빨리 피난하여 목숨을 건졌고 2차대전이 끝난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야가 몰래 지켜봤던 골목길은 매일 크로아티아 전국에서 끌려온 세르비아인들과 유대인들, 집시로 가득 찼다 한다.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죠.” 당시 크로아티아에는 200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법정에 선 진짜 이유
자그레브 중심가의 언덕에 위치한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교회의 제단에는 한 사람의 시체가 방부처리된 상태로 유리관에 안치돼 있다. 이곳은 가톨릭교인들의 순례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자그레브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나 종교인들은 누구나 제단에 잠든 스테피나츠 대주교의 관 주위로 와서 존경의 예를 갖춘다. 그는 성인이 되기 직전의 단계에 있다. 그의 거대한 석상은 교회 옆의 신학대학교 교정에도 세워져 있다. 한 신학생에게 석상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우리의 성인인 스테피나츠 대주교”라고 대답했다. 3년 전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된 상태여서 바티칸에서 성인으로 추대하는 마지막 의식만 남겨놓은 상태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그를 이미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공산당 정권(티토 정권)으로부터 가혹한 종교박해를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박해를 이겨냈다”는 것이 성인으로 추대된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그가 유고법정에 선 이유는 나치 정권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국민은 그가 공산당 정권을 비판하고 반대해서 옥살이한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다.
‘3분의 1 개종, 3분의 1 추방, 3분의 1 학살’이라는 우스타시 정권의 정책은 70만∼80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당시 조직적인 학살을 진두지휘한 많은 전범들이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 협력자로 수배되었고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해 독일 나치들조차 전율하게 한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시스카수도회의 수도승인 밀로슬라브 마지스토로비치였다. 그리고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책임을 지고 있다. 또한 종전 뒤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탈출시킨, 이른바 ‘ratline’으로 불리는 탈출로를 만든 인물이다. 따라서 당시 이들의 지도자인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대학살과 연루됐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인이 돼 있었다.
성급한 예단? 현장을 보라!
지난해 6월께 바티칸의 금 반환 청구소송을 기사화하면서 발칸의 대학살과 야세노바츠 수용소를 언급한 적이 있다. 수십만명이 죽어간 야세노바츠는 세르비아 민족에게는 뼈아픈 상처였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그 이유는 현장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가서 체험하고 싶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단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간 그곳에서 조금이나마 그들을 위로하고 나도 위로받고 싶었다.
학살은 진실이다. 지금도 필자가 보관하고 있는 이메일이 하나 있다. “귀하의 기사에서 나오듯이 한 사건을 두고 정반대의 인물 평가가 있습니다. 예컨대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한편에서는 성인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잔인무도한 학살자로 규정하는데, 당신께서 한편의 입장을 진실이라고 예단하는 듯한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재판의 양 당사자들이 재판을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펼치고 있는 상태인데 너무 성급하게 어떤 결론을 독자에게 주입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것도 기관총을 든 성직자 운운하면서.” 지난해 6월에 게재된 바티칸 금 반환 청구소송에 대한 기사를 비판하며 한국의 모 가톨릭신학대학교 교수가 내게 보낸 것이다.
야세노바츠=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otenet.gr
자그레브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놉스카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의 철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동쪽으로 향하는 기찻길은 세르비아로, 남쪽으로 향하는 기찻길은 보스니아로 향한다. 여기서 남향하는 기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시골 역사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긴 하지만 한 사람의 역무원도 찾아볼 수 없다. 곳곳에 늘어선 흉가들은 20세기에 두번의 전쟁이 지나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이 바로 그 야세노바츠, 죽음의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사진/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위령탑. 이 탑을 제외하곤 당시 학살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사진/ 희생자들을 실어나르던 기관차. 이 기관차를 타고 수십만명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이 사라졌다.

사진/ 야세노바츠 수용소 근처에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 농부. 야세노바츠 학살은 피해자들에게 지금도 악몽으로 남아 있다.

사진/ 유고 법정에서 재판받는 스테피나츠 대주교. 그의 진짜 죄명은 공산정권 비판이 아니라 학살 전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