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대통령의 게릴라 소탕작전 성공할까… 문제의 근원은 엄청난 빈부격차
8월 초 폭탄테러 속에서 취임한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의 첫번째 국정과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38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부친을 좌파 게릴라의 테러로 잃고 전임정부의 평화협상 실패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며 집권한 그가 비타협적인 반군진압책을 펼칠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취임선서를 끝내자마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게릴라 진압을 위해 군 병력과 경찰 요원의 수를 늘리고 농민 100만명을 무장시키겠다는 초강경책도 발표했다.
비무장지대의 ‘귀족 게릴라’
우리베 대통령은 비타협적인 정책과 함께 좌파 게릴라 집단 내부를 교란시킬 새로운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콜롬비아 시사주간지 <캄비오>(Cambio) 최신호는 새 내각의 국방부와 군대에 근무하는 익명의 제보자들을 통해 신정부가 구상하는 교란책의 전모를 공개했다. 이 정책은 미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게릴라 소탕을 위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탈영하는 게릴라들에게 일정기간 최저임금을 지불하는 것에서부터 일인당 800만콜롬비아페소를 일시불로 지급하는 것까지 여러 대책이 현재 검토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480억페소의 예산을 책정해놓았다. 구체적인 계획이 확정되는 대로 즉시 추진해 초기에 6천명의 게릴라를 대규모로 탈영시키겠다는 야심만만한 목표도 세웠다. 전임 대통령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재임 시절에도 콜롬비아 국방부에선 대규모 소탕책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소탕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릴라들과 평화협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협상의 창구인 ‘평화특사실’에서 근무한 고위관리는 이렇게 밝혔다. 당시 파스트라나 정부는 최대 반군세력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평화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제2반군세력 민족해방군(ELN)과도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소탕책을 펼칠 수는 없었다는 지적이다. 신임정부가 인센티브제를 포함한 회유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데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 내부의 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임 대통령 파스트라나는 당시 평화협상을 벌이며 유화책의 일환으로 콜롬비아 남부지역에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반군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정부군을 철수한 일이 있었다. 그때 설치된 비무장지대가 역설적으로 콜롬비아무장혁명군 내부에 위기를 불러왔다. 콜롬비아 정부군과 반군은 콜롬비아 국토 한가운데 자리잡은 수도 보고타를 빙 둘러싸고 대치하고 있다. 대치전선이 곳곳에 걸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남부지역에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을 때도 다른 전선에선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다른 지역 게릴라들이 정글과 산악에서 정부군에 쫓기면서 기본적인 군수품조차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애먹을 때, 비무장지대의 게릴라들은 특권을 누린 것이었다. 콜롬비아 언론은 이들이 안락한 주택에서 살면서 위스키를 마시고 고급 승합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심지어는 디스코테크까지 드나들었다고 폭로했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 내부의 긴장이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2001년 후반기에 북부 대서양 연안과 콜롬비아 서부의 게릴라들은 자신들이 갖은 고생을 할 때 호의호식한 지도부를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고사령관 마누엘 마룰란다는 이들을 비무장지대로 휴가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내부의 불만이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지도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탈영병을 늘려라
사기저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전임 대통령은 평화협상을 벌이면서도 군사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콜롬비아 군과 경찰은 제2좌파 반군인 민족해방군과 준군사집단 콜롬비아단결자위대보다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을 유독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로 인해 1999년 1월에서 2002년 2월 사이에 1만3448명이 체포되었고, 3782명이 전투 중에 죽었으며 3837명이 탈영했다. 물론 이 자료는 무장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자료지만 그 가운데 대다수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이었다.
여기에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심각한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파스트라나 정부가 비무장지대를 사실상 폐지하고 군사공격을 재개하자 그동안 납치로 벌어들인 수입이 급감했다. “일본인 사업가 치카오 마라마츠의 예를 들어보죠.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2700만 달러를 요구했어요. 액수가 어마어마해서 협상이 잠시 중단되었어요. 그러나 그 뒤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 때문에 일본인 사업가 가족은 얼마 전에 신문에 광고를 냈어요. 콜롬비아무장혁명군 관계자와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죠.” 납치문제를 담당해온 콜롬비아군 장교가 전한다. 즉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비무장지대에서 납치한 인사의 가족과 만나 협상을 벌였는데 정부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반군을 고립시키면서부터 납치인사의 석방을 둘러싼 협상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반군은 그동안 남부의 코카인 재배지역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정부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는 바람에 세금징수도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정부의 강경고립책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무기 및 테러장비 구입비용은 갈수록 늘어가는 형편이다.
새 정부는 이런 반군 내부의 어려운 현실을 역이용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콜롬비아 국방부의 한 관리는 “우리의 목적은 게릴라 사령관들이 제대로 잠을 못 자게 하는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병사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탈영한 병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동안 콜롬비아군은 탈영병을 군사작전의 길라잡이로 이용했다. 지긋지긋한 전선을 이탈한 농민들은 불행히도 또 다시 전장으로 나서야 했다. 이들을 이용한 다음 ‘처리할’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탈영병은 어느새 짐이 됩니다. 데리고 있어봐야 돈이거든요.” 콜롬비아 북부에서 탈영병을 담당한 군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콜롬비아 검찰의 태도도 문제였다. 대 테러담당 부서의 한 검사는 2년 동안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 탈영한 소년을 취조했다. “네 번인가 다섯번 경찰서를 공격하는 일에 참가했죠.” 검찰을 믿고 자백한 그 소년은 곧 체포되었고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쟁터에서 간신히 벗어났나 했더니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다.
현재 콜롬비아 국방부는 위와 같은 사실을 고려해 검찰이 유연하게 탈영병을 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의 한 관리는 “특별한 절차를 거치는 게릴라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게릴라는 간단한 확인과정을 거친 뒤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할 것입니다”라고 전한다. 또한 전 정부와는 달리 모든 국가기관이 일관된 목표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농민 게릴라는 도시의 빈곤 받아들일까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한 뒤에는 어떻게 될까? 전임 정부에서 탈영병의 재활을 책임진 글로리아 키세노는 탈영병들이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하거나 도시에서 작은 가게를 차릴 사업자금을 지원 받아왔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탈영병의 85%가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서 이탈한 병사들이라고 전하면서 “좀더 많은 재정과 지원이 있으면 2006년에는 두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이 정책으로 내전은 종식될 것인가? 콜롬비아 국민 열명 가운데 여섯명이 하루에 2달러도 벌지 못하는 빈민인데다 다섯명 가운데 한명은 실업자다. 일하는 국민의 반 이상은 밀수 등 비공식부문에서 일을 하는 반면 상류층 20%가 전체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1%를 조금 넘는 지주들이 전 국토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무장투쟁이 38년간 지속되어온 이유를 알려준다.
과연 무기를 든 과거의 농민들은 도시의 빈곤을 받아들일까? 지난 64년 46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 출발한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이 라틴아메리카의 최대 반군으로 성장한 이유를 신임정부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까? 콜롬비아의 미래는 거기에 달려 있다.
멕시코시티=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hotmail.com

사진/ 콜롬비아의 여성 게릴라들. 내전의 출발점은 극심한 빈부격차다. (GAMMA)
탈영하는 게릴라들에게 일정기간 최저임금을 지불하는 것에서부터 일인당 800만콜롬비아페소를 일시불로 지급하는 것까지 여러 대책이 현재 검토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480억페소의 예산을 책정해놓았다. 구체적인 계획이 확정되는 대로 즉시 추진해 초기에 6천명의 게릴라를 대규모로 탈영시키겠다는 야심만만한 목표도 세웠다. 전임 대통령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재임 시절에도 콜롬비아 국방부에선 대규모 소탕책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소탕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릴라들과 평화협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협상의 창구인 ‘평화특사실’에서 근무한 고위관리는 이렇게 밝혔다. 당시 파스트라나 정부는 최대 반군세력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평화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제2반군세력 민족해방군(ELN)과도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소탕책을 펼칠 수는 없었다는 지적이다. 신임정부가 인센티브제를 포함한 회유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데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 내부의 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임 대통령 파스트라나는 당시 평화협상을 벌이며 유화책의 일환으로 콜롬비아 남부지역에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반군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정부군을 철수한 일이 있었다. 그때 설치된 비무장지대가 역설적으로 콜롬비아무장혁명군 내부에 위기를 불러왔다. 콜롬비아 정부군과 반군은 콜롬비아 국토 한가운데 자리잡은 수도 보고타를 빙 둘러싸고 대치하고 있다. 대치전선이 곳곳에 걸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남부지역에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을 때도 다른 전선에선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다른 지역 게릴라들이 정글과 산악에서 정부군에 쫓기면서 기본적인 군수품조차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애먹을 때, 비무장지대의 게릴라들은 특권을 누린 것이었다. 콜롬비아 언론은 이들이 안락한 주택에서 살면서 위스키를 마시고 고급 승합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심지어는 디스코테크까지 드나들었다고 폭로했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 내부의 긴장이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2001년 후반기에 북부 대서양 연안과 콜롬비아 서부의 게릴라들은 자신들이 갖은 고생을 할 때 호의호식한 지도부를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고사령관 마누엘 마룰란다는 이들을 비무장지대로 휴가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내부의 불만이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지도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탈영병을 늘려라

사진/ 우리베 대통령 취임식에서 폭탄이 터지자 관계자들이 급히 대피하고 있다. 우리베는 취임선서를 끝내고 곧바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AP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