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담배천국’의 오명을 지운다

427
등록 : 2002-09-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교실 복도에도 재떨이가 설치된 독일, 이제 금연운동에 앞장선다

사진/ 베를린 중앙역. 이곳도 금연구역으로 설정되었으나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곧잘 눈에 띈다.
전직 독일 총리가 한 방송 대담프로에 나왔다. 그가 연신 피워대는 담배로 자욱한 연기가 화면에 가득하다. 담배연기는 이내 안방의 시청자에게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든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10년 넘게 <차이트>라는 주간지 편집장을 맡아 온 노년의 정치인에게, 담배는 그의 지성을 표현하는 상징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마치 그를 흉내라도 내려는 듯, 대담프로에 출연한 독일 정치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흡연모습을 뽐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저소득층일수록 흡연율 높아

우연히 방문한 독일 인문계 고등학교. 교실 복도에 놓인 재떨이들이 인상적이다. 교사의 흡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첫인상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연기처럼 쉬 사라져버린다. 커다란 원형 재떨이 주변에 모여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이들은 교사가 아닌 학생들이다. 흡연을 시작하는 독일 국민의 평균나이가 13살에서 14살이라는 최근 신문기사가 떠오른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15∼20살에 이르는 청소년 가운데 흡연자 비율은 무려 34%로, 독일 최고치를 기록한다. 베를린 청소년 가운데 여성 29%, 남성 39%가 흡연 경험자가 아닌 일상적 흡연자로 구분된다. 동베를린 한 구청의 조사보고서는 더욱 충격적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관할구역 내 8∼10살의 아동 가운데 8%, 10∼12살 37%, 12∼14살 55%가 흡연자로 분류된다. 이에 비해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서베를린 지역의 청소년 흡연율은 눈에 띄게 낮다. 지난 5년간의 청소년 흡연자 증가비율도 동베를린은 50%에 이르는 반면, 서베를린은 그나마 30%에서 멈췄다. 청소년 흡연뿐 아니라, 사회 저소득층의 흡연비율도 90년대 이후 증가추세를 보인다. 교사들의 흡연비율이 23%라면, 블루칼라로 분류되는 페이트공의 흡연비율은 67%에 이르고 있어, 흡연의 직업별 차이도 뚜렷하다. 저소득층으로 분류되는 외국인 노동자 가정이 독일인 노동자 가정보다 흡연비율이 높게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흡연자의 천국 독일에서도 흡연이 서서히 사회문제로 등장하며, ‘비흡연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지난 6월, 연방정부 주도로 진행된 ‘한달간 담배끊기 행사’에 6만명이 넘는 흡연자들이 참여했다. 이 기간을 넘어서 훌륭하게 담배를 끊은 사람 가운데 몇명에게는 정부가 약 1200만원의 상금을 수여했다. 금연 흐름에 독일 철도공사도 한몫 거들고 나섰다. 지난 9월5일부터 전국적으로 54개의 기차역을 ‘비흡연자를 위한 기차역’으로 탈바꿈시켰다. 승강장을 비롯해 기차역 전역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흡연자들의 권리는, 노란색으로 육각형 테두리가 그려진 공간에 한해 허용되었다. 독일 철도공사 대표는 이참에 스스로 담배를 끊는 용기를 보이면서, 노란선을 벗어나 과감하게 담뱃불을 붙이는 손님에게는 약 2만5천원 상당의 ‘청소비’를 부과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기차역에서도 노란선에 갇힌 흡연자

또한 연방정부는 일터에서 비흡연자가 요구하면 흡연자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법안을 상원에 제출했다. 책상머리를 맞대고 벌어지는 직원들 간의 ‘흡연분쟁’을 회사가 중재할 법적 권한이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마련될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막강한 담배제조회사들의 로비와 연간 담배세 세수규모가 약 13조원에 이르는 독일 재무구조는, 이 법안이 각 주정부 대표로 구성된 상원에서 통과되는 데서 커다란 장애요인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경찰과 대치 중인 무리 속의 한 청소년이 타오르는 바리케이드에 담뱃불을 붙이는 모습과 함께, “Cool! (멋지잖아!)”이라는 자막을 덧붙이는 말보로의 극장광고는, 독일 사회가 흡연 억제를 위해 넘어야 할 높디 높은 장애물인지 모른다.

베를린=글·사진 강정수 전문위원 jskang@web.de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