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각국, 미국과의 대 테러전쟁 통해 정권 유지와 정적 제거에 성공했으나…
그야말로 아수라도(阿修羅道)였다. 동서남북 우두머리 아수라(阿修羅)들은 황급히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걸로 아수라왕(阿修羅王)께 충성을 맹세했다. 여차하면 ‘놈들’로 몰릴 것을 두려워한 조무래기 아수라들은 몸을 사렸고, 아수룩한 중생들은 간이 콩알만해졌다.
“비판자들은 테러리스트와 한패거리고 필리핀 국민이 아니다.” 외국군(미군)에게 맡기지 말고 자력으로 범죄집단 아부 사이얍을 처리하자는 시민들을 향해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국제사회는 정신차리고 테러리스트 박멸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
미국에 미운털이 박힌 독설가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불현듯이 미국이 주도하는 대 테러전쟁에 가장 성실한 원군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정부가 빈곤·부패·마약과 전쟁을 선언한 건 미국의 대 테러전쟁과 같은 의미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으로 자부해온 타이, 그 총리 탁신은 난데없이 전의를 불태워 시민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테러리스트에게 확고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 우리 정부를 협박해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고촉통 싱가포르 총리는 역시 ‘싱가포르답게’ 찍소리도 용납치 않을 만큼 단호했다.
국가보안법, 관뚜껑을 열다 “11일의 공격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행위였다. 인도네시아는 테러리스트 제거를 위해 미국에 협조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재정이 바닥난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부시의 5억3천만달러 지원 약속과 맞바꾼 연설로,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시민들이 지닌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앞다퉈 워싱턴으로 날아가 부시 대통령을 알현했다. “테러 박멸을 외치며 국제 공포를 조장하는 이 분위기는 군사주의자들만 이롭게 할 뿐, 필연적으로 시민사회를 깨트려놓을 것이다.” 차이와트 사타 아난(탐마사트대학 평화정보센터 소장) 같은 이들이 일찌감치 예견한 대로 동남아시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11일의 공격’이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가운데, 곧장 동남아시아에는 테러리스트 검거열풍이 불어닥쳤다. 싱가포르 당국은 지난해 12월,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ISA)을 동원해 미국 대사관 폭파 기도 혐의로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와 한통속이라며 제마아 이슬라미아 조직원 15명을 체포했다. 국가보안법에 따라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뒤질세라 말레이시아 정부도 지난 40년 동안 공산주의자 제압용으로 명성을 떨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105명이 넘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라며 체포했다. 영장도, 재판도 필요 없는 이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간 테러리스트들의 면면은, 소수 시아파 무슬림이었고 또 마하티르 총리의 정적 안와르 전 부총리를 지원하는 이들이었으며, 나머지는 야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청년 지도자들이었다. 무슬림에 뒤집어씌우기
‘어깨를 맞대고’. 이름도 그럴듯한 작전명 아래 660명에 이르는 미군 그린베레는 슬그머니 옛 식민지 필리핀으로 되돌아와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지역에서 필리핀군과 함께 작전을 개시했고, 든든한 뒷심을 업은 아로요 정부는 알카에다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하는 아부 사이얍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20여명에 이르는 테러리스트를 체포했다. 남부지역 폭탄테러 용의자라며 지난 5월 무슬림학당- 경찰은 훈련장이라 표현했고- 에서 체포한 아홉명은 아직까지 뚜렷한 증거도 나온 적이 없지만.
테러의 온상이라 낙인찍힌 인도네시아는 주변국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으로부터도 테러수출 전진기지로 비난받다가 지난 5월 모든 이슬람 민병조직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들은 여전히 메가와티 대통령이 “게으르다”고 난타했다. 미국 정부가 구체적으로 메가와티 정부를 비난하지는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어쨌든 권력기반이 취약한 메가와티 정부는 대 테러전쟁을 벌이는 미국에 전술적 협력과 최대 무슬림 국가로써 대미 적개심을 적당히 섞어가며 열심히 ‘벼랑타기’를 해왔다.
이런 가운데 타이 정부는 눈엣가시로 여겨온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자 싹을 잘라버릴 수 있는 호기로 여겨, 빈발한 폭발사건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슬림 짓’이라 뒤집어씌우며 사회 분위기를 경직시켜왔다. 그러면서 타이-미국 합동군사훈련인 ‘코브라골드’를 대 테러전쟁 훈련용으로 전환해 주변 아시아 14개국이 참관하도록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지역안보 환경을 긴장상태로 몰아가며 미국 앞에 ‘줄세우기’를 시킨 게임이었다. 대 테러전쟁은, 그동안 미국으로부터 경제봉쇄를 당해온 군사독재정부 버마 쪽에도 불똥이 튀었다. “통일와족군(UWSA)은 국제 테러리스트와 연계된 조직이다.” 지난 3월 뜬금없이 미국 국무성에서 흘러나온 정보로 버마와 타이 쪽은 발칵 뒤집혔다. 미국이 대 테러전쟁을 버마쪽으로 확전할 의도라는 추측이 나돌면서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방콕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례적으로 이틀 만에 서둘러 발뺌했다. “미국 정부는 그런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발표한 적도 없다. 다만 UWSA가 국제마약 생산기지라는 데 주목하고 있다.” 가슴이 철렁한 버마 군부는 이내 반독재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지 진영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대 테러전쟁의 위력은 지난 7월 말 브루나이에서 개최한 아세안(ASEAN)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대 테러전쟁은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면서 아세안 회의장은 미국에 대한 충성심 경연장이 되다시피 했다. “테러가 세계적 위협임을 인정한다.” 새삼스레 아세안 외무장관회의는 성명서를 통해 대 테러전쟁을 강조하며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함께 반테러합동선언을 하며 극에 달했다.
지난 1년 동안 미국의 대 테러전쟁에 휩쓸려다닌 동남아시아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일까? 동남아시아 각국 정부는 대 테러전쟁을 통해 사회적 긴장을 유발하며 정권 유지와 정적 제거라는 정치적 잇속을 챙겼고, 동시에 ‘테러 박멸’이라는 용어를 모든 내부 모순과 불만을 잠재우는 도구로 활용했다. 동남아시아 각국 정부는 그 대가로 미국에게 중대한 선물을 했다. 그러잖아도 정체마저 불분명한 각종 동맹이 덕지덕지 쌓여 있는 참에, 또 ‘대 테러지역동맹’까지 덧붙여 결국은 미국이 ‘잠재적 적’으로 규정한 중국을 남쪽에서 포위하는 노릇까지 자임하고 나섰으니. 따지고 보면 대 테러전쟁으로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룩한 셈이다. 한국·일본이 버티고 있는 동북아시아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중앙아시아를 얻었고, 인도·파키스탄의 경쟁심을 자극해 남아시아를, 그리고 이제 동남아시아를 포획했으니, 그야말로 중국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꼴이다.
미국에 휩쓸려다니다 골병만 들었네
당장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한 지역안보환경은 각국의 군비를 크게 증강시키는 빌미를 제공했고, 냉전 와해로 가슴앓이를 해온 무기장사꾼 미국은 공산주의 카드 대신 테러 카드를 내밀고 끗발이 한창 오른 상태다. 그 사이 동남아시아 시민사회는 ‘테러’라는 한마디 말 앞에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었다. 시민 입장에서 내린 결론은, 얻고 잃고 자시고도 따질 것 없이 골병만 들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사랑했고, 그 미국이 주도하는 대 테러전쟁을 존경했고, 그 미국에 휩쓸려다닌 결과다.
정문태 l 국제분쟁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사진/ 미군과 필리핀군의 합동작전으로 체포된 아부사야프 용의자들. 작전 이름은 '어깨를 맞대고'였다. (GAMMA)
국가보안법, 관뚜껑을 열다 “11일의 공격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행위였다. 인도네시아는 테러리스트 제거를 위해 미국에 협조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재정이 바닥난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부시의 5억3천만달러 지원 약속과 맞바꾼 연설로,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시민들이 지닌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앞다퉈 워싱턴으로 날아가 부시 대통령을 알현했다. “테러 박멸을 외치며 국제 공포를 조장하는 이 분위기는 군사주의자들만 이롭게 할 뿐, 필연적으로 시민사회를 깨트려놓을 것이다.” 차이와트 사타 아난(탐마사트대학 평화정보센터 소장) 같은 이들이 일찌감치 예견한 대로 동남아시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11일의 공격’이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가운데, 곧장 동남아시아에는 테러리스트 검거열풍이 불어닥쳤다. 싱가포르 당국은 지난해 12월,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ISA)을 동원해 미국 대사관 폭파 기도 혐의로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와 한통속이라며 제마아 이슬라미아 조직원 15명을 체포했다. 국가보안법에 따라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뒤질세라 말레이시아 정부도 지난 40년 동안 공산주의자 제압용으로 명성을 떨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105명이 넘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라며 체포했다. 영장도, 재판도 필요 없는 이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간 테러리스트들의 면면은, 소수 시아파 무슬림이었고 또 마하티르 총리의 정적 안와르 전 부총리를 지원하는 이들이었으며, 나머지는 야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청년 지도자들이었다. 무슬림에 뒤집어씌우기

사진/ 동남아시아 정상들이 만나는 아세안 + 3국 회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테러 박멸'을 명분으로 내부 모순과 불만을 잠재우고 있다. (한겨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