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기행(2)
코소보 분단도시 미트로비차의 상처… 지척에 보이는 고향집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이바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갈린 분단의 도시 미트로비차. 50m 정도 되는 다리의 양쪽 입구에는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의 검문소와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고 완전무장을 한 영국 병사들이 24시간 엄격한 검문을 통해 알바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다리의 남쪽 입구에서 보면 맞은편의 세르비아 지역의 건물뿐만 아니라 벤치에 앉아 있는 세르비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깝게 있다. 이들은 매일 벤치에 앉아 강 건너편에 두고 온 집들을 바라보며 다시 돌아갈 날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호위를 받을 수 있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코소보 세르비아인들은 50m도 되지 않는 다리를 3년 동안 단 한번도 건널 수 없었다. 다리를 건너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건널 수 없었던 다리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 폭격 뒤 모두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돼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번호조차도 달라졌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돼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쪽에서는 강북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여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날따라 알바니아 해방군기를 앞세운 차량시위로 도로가 소음과 정체로 일대 혼란을 겪었다. “알바니아 무장조직의 테러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벌써 2600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살인과 납치로 목숨을 잃었다”고 아르테미예 대주교는 밝혔다. 미트로비차 강북의 토박이로 ‘마당발’로 통하는 이스코 무리츠(49·상업)는 강남에 수많은 알바니아 친구들을 두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삼년 동안 한번도 어릴 적 친구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지금은 병이 날 정도로 이들이 그립다고 한다. 휴대폰을 들어보이면서 “물론 전화로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통화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한잔 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지…” 하는 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글썽하게 맺혀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팔순의 노인도 강 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자신의 집이 강 건너편에 있다고 했다. 피난할 때는 며칠 내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벌써 삼년이나 지나버렸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그의 집에 알바니아인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뒤로는 밤잠조차 설치기 일쑤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다리를 건너 프리스티나로 귀가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저녁 8시30분께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끊어진 상태였다. 11시30분이 돼서야 겨우 지나가는 앰뷸런스의 도움으로 프리스티나의 변두리까지 갈 수 있었는데, 이때 코소보 전체는 전기공급이 중단되어 칠흑 같은 암흑의 밤으로 변해 있었다. 발전소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전기공급이 완전히 중단됐지만 많은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테러’로 인해 전기가 끊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코소보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용감한 세르비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마을을 보통 인클레브라고 부른다. 프리스티나에서 7km 떨어진 곳에 있는 그라차니차가 가장 유명한 인클레브다. 이곳에는 13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 아직도 건재해 있고 코소보 세르비아인들의 최고 지도자인 아르테미예 대주교가 지내고 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을 두려워한 세르비아인들은 이곳에서 아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경 4km 남짓한 곳이 2천명 세르비아인들의 삶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프리스티나로 가려면 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의 특별호위를 받아야 한다. 지금도 세르비아인들의 목숨을 노리는 알바니아 해방군 세력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병이 나도 진료를 받기가 어렵다. 무장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알바니아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무자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코소보 세르비아 마을에 강금된 사람들
그라차니차는 그래도 프리스티나 근방에 있기에 다른 인클레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프리스티나에서 100km가량 떨어진 페츠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전쟁 전 이 도시에는 2만명가량의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듯 단 한명도 남아 있지 않다. 페츠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한 인클레브에서 생활하는 세르비아인들은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 입구의 검문소에 주둔하는 이탈리아 병사들이 이들을 위해 주로 하는 일은 생활필수품을 사다주는 일이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병사들에게 붙여진 별명은 다름 아닌 ‘쇼핑 군인’이다.
한달 전에 마을 처녀와 결혼한 미하일 데니치(26)는 3년 동안 이 작은 마을에서 한번도 나간 적이 없다. 전쟁 전 그의 형과 모친은 이곳을 빠져나가 베오그라드에 정착했고, 현재 시골집에는 그의 부친과 할머니, 여동생(18)이 함께 살고 있다. 다행히 그가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이 마을에 들어와 있는 국제구호조직에서 통역일을 하며 가족들을 먹여살린다. 마을의 다른 가족들은 외부의 구호품에 목숨을 거는 형편이지만 지금은 구호품도 거의 중단된 실정이다. “전쟁 직후부터 2년 동안 전화나 TV가 완전히 차단되는 바람에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 때가 가장 힘들었다.” 미하일에게서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절망감이 배어나온다. 이런 상태에서 살다 보니 마을 주민들 중 70% 정도가 신경과 관련된 병을 앓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알바니아인들의 테러가 두려워 들판에 나가 농사일을 할 수도 없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마을 사람들의 땅은 모두 알바니아인들의 차지가 돼버렸다. 이제는 피난간 이웃 사람들이 돌아오리라고 누구도 믿지 않는다. 단지 유엔안보리 결의안 1244조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날 저녁, 삶의 고통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벤치에 모여앉아 신비한 노을빛에 감탄하고 있었다.
미트로비차=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otenet.gr

사진/ 코소보 해방군 조직원이 살인혐의로 체포되자 거리시위를 벌이는 알바니아인들. 이들은 미트로비차 북쪽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 폭격 뒤 모두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돼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번호조차도 달라졌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돼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쪽에서는 강북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여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날따라 알바니아 해방군기를 앞세운 차량시위로 도로가 소음과 정체로 일대 혼란을 겪었다. “알바니아 무장조직의 테러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벌써 2600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살인과 납치로 목숨을 잃었다”고 아르테미예 대주교는 밝혔다. 미트로비차 강북의 토박이로 ‘마당발’로 통하는 이스코 무리츠(49·상업)는 강남에 수많은 알바니아 친구들을 두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삼년 동안 한번도 어릴 적 친구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지금은 병이 날 정도로 이들이 그립다고 한다. 휴대폰을 들어보이면서 “물론 전화로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통화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한잔 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지…” 하는 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글썽하게 맺혀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팔순의 노인도 강 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자신의 집이 강 건너편에 있다고 했다. 피난할 때는 며칠 내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벌써 삼년이나 지나버렸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그의 집에 알바니아인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뒤로는 밤잠조차 설치기 일쑤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다리를 건너 프리스티나로 귀가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저녁 8시30분께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끊어진 상태였다. 11시30분이 돼서야 겨우 지나가는 앰뷸런스의 도움으로 프리스티나의 변두리까지 갈 수 있었는데, 이때 코소보 전체는 전기공급이 중단되어 칠흑 같은 암흑의 밤으로 변해 있었다. 발전소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전기공급이 완전히 중단됐지만 많은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테러’로 인해 전기가 끊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코소보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용감한 세르비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마을을 보통 인클레브라고 부른다. 프리스티나에서 7km 떨어진 곳에 있는 그라차니차가 가장 유명한 인클레브다. 이곳에는 13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 아직도 건재해 있고 코소보 세르비아인들의 최고 지도자인 아르테미예 대주교가 지내고 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을 두려워한 세르비아인들은 이곳에서 아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경 4km 남짓한 곳이 2천명 세르비아인들의 삶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프리스티나로 가려면 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의 특별호위를 받아야 한다. 지금도 세르비아인들의 목숨을 노리는 알바니아 해방군 세력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병이 나도 진료를 받기가 어렵다. 무장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알바니아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무자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코소보 세르비아 마을에 강금된 사람들

사진/ 페츠 지역에 있는 작은 세르비아 시골마을에 사는 미하일의 할머니. 구호기구의 통역일로 먹고사는 손자가 돌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