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나잉옹의 고백II- 버마 민주화투쟁 어디로 가는가
1988년 9월 나는 무장투쟁을 위해 학생들보다 다소 일찍 버마-타이국경에 도착했다. 그 국경밀림지대는 1947년 버마 독립 뒤부터 평등과 자결을 요구하며 중앙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해방구였다.
그 무렵 버마 내부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며 시민·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고, 이들을 무력진압하던 군부는 결국 1988년 9월18일 유혈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청년·학생들은 무리지어 국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장투쟁을 결심한 까닭은 군사정부가 중무장군인들을 투입해 평화적인 시위를 유혈진압했던 탓이고,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는 비무장투쟁 전략으로는 전망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년·학생들은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으면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재건했고 산하에 학생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밀림의 땅바닥에서 자던 시절
그러나 버마 각지에서 몰려 온 서로 얼굴도 모르던 3만여명의 청년·학생들을 조직해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이 넘는 이들이 국경 밀림의 고통스런 생활을 견디지 못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부모님들의 품에서 안락한 생활을 해왔던 학생들에게 생존을 위한 밀림의 삶은 마치 달콤한 꿈에서 갑자기 깬 것 같은 무거운 현실이었다.
이불도 없이 땅바닥에서 잠을 잤고, 모닥불을 피우고 거친 삼베를 뒤집어 쓴 채 산악밀림의 혹한을 견뎌내야 했다. 먹을거리라곤 콩죽과 버무린 물고기반죽이 다였고, 만연하는 말라리아에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갔다. 이런 가운데 다행스럽게 몇몇 이들이 오두막 만드는 재주를 지녀 집단별로 서로 상의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이를 계기로 각 지역 단위의 운영조직을 마련할 수 있었고 마침내 선거를 통해 중앙 단위의 지휘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모두 힘이 부쳤지만 강한 결심과 역동성을 밑천삼아 불굴의 의지로 일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도착했던 국경지역에도 학생조직이 만들어지면서 나는 캠프를 총괄하고 간이진료소를 책임지는 캠프 리더로 선출되었다. 캠프를 이끄는 책무가 힘든 만큼 진료소는 또 내게 기쁨을 주었다. 적어도 나는 이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에게 내가 챙길 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이 간이진료소를 입원실까지 갖춘 작은 규모의 밀림병원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히자, 점점 요구가 확대돼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국경으로 온 이들 가운데 의과대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일부 학생들에게 의료교육을 실시해 위생병 역할을 맡겼다.
이런 가운데 1천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캠프를 이끌어야 하는 지휘부는 내남없이 탈진했다. 지휘부로서, 우리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희생과 인내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이나 반대쪽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에 시달려야 했다. 갖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용기와 결심을 시험당한 시절이기도 했다. 총구를 들이댄 한 젊은 승려에게 칼로 목구멍을 서너 차례 찔리는 일도 있었고, 술에 취해 찾아와 욕설을 해대는 이들을 상대하는 일쯤은 그저 일상이었다. 어쨌든 나는 인내하고 아량을 보여야 했다. 이들 모두가 동지들이고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투쟁의식의 토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뒤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도 처음 국경에 도착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각자의 정치적 의식은 크게 성숙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 소총을 껴안고…
우리가 처음 국경에 도착했을 때를 회상해보면, 품고 온 무장투쟁의 꿈과 달리 우리의 손에는 단 한 자루의 총도 없었다. 물론 누구도 무기를 주지 않았다. 다만 재외 버마망명단체들과 국제단체들의 일부 인도적인 차원의 지원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군사정부의 폭압에 맞서 무장항쟁의 뜻을 안고 국경에 도착한 시점은 국제적으로 냉전이 와해되기 시작하는 들머리쯤이었다. 1년 뒤엔, 중국공산당의 지원이 약화된 버마공산당(CPB) 내부에서 소수민족과 연계된 일부가 쿠데타를 감행했고, 이에 따라 버마공산당의 고위지도부가 중국으로 도피하면서 이들의 무장투쟁도 급격히 붕괴되던 때였다. 지역적으로는 강대국들이 캄보디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내걸고 개입하기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운 개념과 용어들이 국제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평화적 결속’이니 ‘상호주의’ 같은 말에다가 ‘정치적 문제는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한다’는 개념들이 나돌았고, 특히 자유무역을 내세운 ‘세계화’라는 말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말하자면 반대쪽 이데올로기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일 자체가 명분을 얻기 힘든 시기였다. 우리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급변기 한복판에서 총을 들 꿈을 꾸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강력한 자결에 대해 태만하지 않았다. 그 첫걸음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소수민족들을 지원했다. 물론 소수민족들로부터 ‘믿음’의 신호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우리가 바로 그들을 억압했던 버마의 중심부에서 온 버마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와 같은 버마인 억압자들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압박감을 이 국경의 소수민족들이 똑같이 느끼며 업악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소수민족들과 똑같은 미래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소수민족들이 볼 수 있게 노력했다. 우리는 소수민족들이 잠자는 대로 똑같이 잠을 잤고 그들이 먹는 대로 함께 따라 먹는 일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소수민족들의 무장투쟁을 돕겠다며 탄약과 먹을거리를 지고 그들이 싸우는 전선으로 함께 따라 나섰고, 전선에서 부상당한 소수민족 전사들을 본부로 옮겨다 주는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민족들의 정치적 지혜와 우리의 연대의식을 통해 마침내 우리는 소수민족들에 ‘민주혁명세력’과 ‘소수민족해방세력’들 사이에 정치적 목적과 목표를 통일하자는 정치적인 제의를 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소수민족해방군들로부터 무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장투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기의 ‘무’자도 몰랐던 우리는 스스로 모든 과정을 하나씩 익혀 나갔다. 버마인들의 해방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한다는 우리의 과업과 결의를 명예로 여기며. 군부가 우리의 강력한 신념과 결의를 보고 더이상 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우리의 무장항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무장항쟁을 지탱하기 힘든 수많은 현실들과 부딪혔다. 무엇보다 우리는 말만 무장항쟁이었지, 버마정부군이 지닌 화력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악한 무기를 지녔음을 깨달았다. 버마정부군이 비오듯이 포탄을 쏘아대는 동안 우리는 소총을 껴안고 숨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항은 계속된다
정의를 위해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국내외의 민주화와 관련된 여러 조직들로부터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공격적인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전쟁을 수행한다고 믿고 있던 우리로서는 이들의 지원이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기를 바라기까지 하면서. 그러나 이 희망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버마의 시민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모든 노력은 냉전의 종식을 선언한 국제정치의 변화, 말하자면 강대국들이 정의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는 발상에 가로막혀 헛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결코 억압된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무장항쟁은 버마 내부와 국제사회로부터 강력한 지원 없이는 더이상 발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20세기 초, 대영국 반식민지·독립투쟁을 벌이던 때와 현재 우리의 반군사독재투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민중에 기반을 두고 민중 사이에서 발전시키는 무장항쟁.’ 이 전통적인 전략이 오늘날의 시민들에게는 더이상 유효한 대답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대다수 소수민족해방세력들이 생존을 찾아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압박을 강요하는 주변국들에 눌려 버마군사정권과 휴전협정을 조인해버린 상황 속에서, 현재 우리는 심각하게 현실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무장항쟁의 역할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적들을 물리칠 것인지, 어떻게 시민들의 열망을 실행시켜낼 것인지…. 우리에게 넘겨진 새로운 질문들에 대해 이제 우린 대답을 해야 할 시간 앞에 서 있다. <329호에 계속>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사진/버마-타이국경의 버마학생전선 무장진지.이제 무장투쟁을 지탱하기 힘든 현실과 부딪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