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l ‘수카르노 심문한 헌병 책임자’ 수날소 퇴역장군
1945∼46년 중부 자바의 솔로에서 군 첩보요원으로 시작한 수날소의 경력은 수하르토 대통령이 권좌에 오른 67∼68년 사이 수하르토의 정치분야 개인비서를 역임하며 인도네시아 현대사로 깊숙이 빨려들어갔다. “정치 정보를 제공하며 수하르토가 새 정부를 만들어가는 걸 수행했을 뿐이었다”고 말하는 수날소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은사로 아버지로 여겨왔던 수카르노 전 대통령을 심문하게 된 헌병 책임자로.
수카르노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G30S에 당신이 수사를 담당한 까닭은?
단지 수하르토가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그 배경은 모른다. 어쨌든 그 임무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고 너무 고통스러웠다. 군인인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신이 수카르노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탓은 아닌가.
그것도 한 원인일 수는 있겠고… 또 내가 정치분야에 밝았는데다 헌병 책임자였으니…. 어떻게 수카르노를 심문했나. 그에게 내 임무를 비롯해서 모든 걸 밝혔다. 그랬더니 “내게 뭘 심문하겠다는 건가?”라며 수카르노가 놀랐다. 이에 “각하께서 G30S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이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건 당시 정치적 조건이었을 뿐이다”는 한마디 말고는. 심문 결과는 누구에게 보고했나. 수하르토. 그러나 수하르토는 수카르노로부터 아무런 해답도 결과도 얻지 못한 걸 몹시 불만족스러워했다. 얼마 뒤 수하르토가 이른바 ‘3월11일 편지’(수퍼세마르)를 수카르노 대통령에게서 받고는 군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곧장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해산했고, G30S의 주동자로 여겼던 운퉁 중령과 공군사령관 오에말 다니를 체포했다. 자,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당시 상황의 중심에 있었던 당신의 정직한 의견을 들어보자. 당시 나는 대령으로 공식적인 직책은 반둥 참모학교의 안보·정치 분야 책임자였다. 그 무렵 나는 모든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했고, 수카르노의 행위가 비정상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좌익세력 배양을 통해 인도네시아 정치의 자유롭고 활기찬 기운을 차단해버렸다. 또 인도네시아 정치의 기본개념이었던 아시아·아프리카회의의 가치를 저버리고 ‘자카르타-프놈펜-베이징-평양’으로 이어지는 제한된 아시아 사회주의 축으로 변형시켰다. 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쪽으로 그렇게 경도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면서 그건 왜 이해할 수 없나. 아마 수카르노는 시민들을 열성·역동적인 혁명가로 만들고 싶다는 원칙이 있었고, 그런 가운데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그에게 적합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람들은 영리해서 대중심리를 어떻게 장악하는 잘 알고 있었으니. 수카르노도 세뇌당한 게 아니었나 싶다. 내 군 비서 중에 영리했던 이들도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였다. 수카르노를 존경했던 당신이 왜 G30S 이후에는 수하르토 진영에 가담했는가. 군을, 군을 이해해야 내 대답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린 늘 선배 가운데 지도자를 선택해왔다. 당시 헌병 책임자인 나는 부하들과 함께 “어느 장군이 이 배반과 음모로부터 국가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우린 현실 속에서 수하르토를 선택했다. 선배라면, 수카르노가 독립전쟁을 지도했던 군의 최고 선배가 아니었는가.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G30S에 개입돼 있다는 걸 밝힐 수 있나. 확실했다. 난 확신한다. CIA 요원들이 당시 내 사무실로 찾아와서 모든 걸 제공했다. 특히 정보에 관련된….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CIA가 어떻게 관련이 되었는지. 흘러간 역사로… 새삼스레 시끄럽게 굴 생각 없다. 이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로 시민으로서 의무를 진 사람이다. 말해보자. 때가 오겠지. 긴 시간 동안 물고늘어졌으나, 그는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더 이상 자세한 건 밝힐 수 없다”며 끝내 말문을 닫아버렸다.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ㅣ 시사주간지 <템포> 기자

사진/ (아흐마드 타우픽)
그것도 한 원인일 수는 있겠고… 또 내가 정치분야에 밝았는데다 헌병 책임자였으니…. 어떻게 수카르노를 심문했나. 그에게 내 임무를 비롯해서 모든 걸 밝혔다. 그랬더니 “내게 뭘 심문하겠다는 건가?”라며 수카르노가 놀랐다. 이에 “각하께서 G30S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이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건 당시 정치적 조건이었을 뿐이다”는 한마디 말고는. 심문 결과는 누구에게 보고했나. 수하르토. 그러나 수하르토는 수카르노로부터 아무런 해답도 결과도 얻지 못한 걸 몹시 불만족스러워했다. 얼마 뒤 수하르토가 이른바 ‘3월11일 편지’(수퍼세마르)를 수카르노 대통령에게서 받고는 군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곧장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해산했고, G30S의 주동자로 여겼던 운퉁 중령과 공군사령관 오에말 다니를 체포했다. 자,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당시 상황의 중심에 있었던 당신의 정직한 의견을 들어보자. 당시 나는 대령으로 공식적인 직책은 반둥 참모학교의 안보·정치 분야 책임자였다. 그 무렵 나는 모든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했고, 수카르노의 행위가 비정상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좌익세력 배양을 통해 인도네시아 정치의 자유롭고 활기찬 기운을 차단해버렸다. 또 인도네시아 정치의 기본개념이었던 아시아·아프리카회의의 가치를 저버리고 ‘자카르타-프놈펜-베이징-평양’으로 이어지는 제한된 아시아 사회주의 축으로 변형시켰다. 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쪽으로 그렇게 경도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면서 그건 왜 이해할 수 없나. 아마 수카르노는 시민들을 열성·역동적인 혁명가로 만들고 싶다는 원칙이 있었고, 그런 가운데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그에게 적합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람들은 영리해서 대중심리를 어떻게 장악하는 잘 알고 있었으니. 수카르노도 세뇌당한 게 아니었나 싶다. 내 군 비서 중에 영리했던 이들도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였다. 수카르노를 존경했던 당신이 왜 G30S 이후에는 수하르토 진영에 가담했는가. 군을, 군을 이해해야 내 대답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린 늘 선배 가운데 지도자를 선택해왔다. 당시 헌병 책임자인 나는 부하들과 함께 “어느 장군이 이 배반과 음모로부터 국가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우린 현실 속에서 수하르토를 선택했다. 선배라면, 수카르노가 독립전쟁을 지도했던 군의 최고 선배가 아니었는가.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G30S에 개입돼 있다는 걸 밝힐 수 있나. 확실했다. 난 확신한다. CIA 요원들이 당시 내 사무실로 찾아와서 모든 걸 제공했다. 특히 정보에 관련된….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CIA가 어떻게 관련이 되었는지. 흘러간 역사로… 새삼스레 시끄럽게 굴 생각 없다. 이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로 시민으로서 의무를 진 사람이다. 말해보자. 때가 오겠지. 긴 시간 동안 물고늘어졌으나, 그는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더 이상 자세한 건 밝힐 수 없다”며 끝내 말문을 닫아버렸다.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ㅣ 시사주간지 <템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