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두고 ‘마일리지 스캔들’ 폭로하며 사민·녹색 연립정권을 때리는 <빌트>
여름 휴가철을 앞둔 7월 중순, 독일연방의원회관의 모든 사무실에 한 언론사로부터 발송된 설문지가 날아들었다. 거기엔 “이번 여름휴가를 위해 구입한 비행기표는 의원님들의 자비로 구입하신 겁니까”라고 질문하는 문항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들은 설문지를 비서관들에게 맡긴 채 가벼운 마음으로 휴갓길에 올랐다. 아무도 이 설문지를, <빌트>가 집권 사민·녹색당에 보내는 선전포고문이라고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하루에 한명꼴로 정치인 이름 1면 장식
설문지를 발송한 언론사는 다름 아닌 우익 황색지 <빌트>였다. <빌트> 스스로도 ‘우익 황색저널’이라는 사회적 평가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빌트>는 일간으로 발행되지만, 판매 부수는 독일 통계청의 일간신문 판매 부수 통계조항에 포함되지 못한다. 빨갛고 파랗고 대문짝만한 글씨로 쓰인 머릿기사, 1면에 담긴 성인광고, 첫장을 넘기면 언제나 마스코트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성 연예인의 미끈한 몸매, ‘모든 기사 제목은 3단어로’라는 선명한 편집 지침 등, <빌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빌트>에 대한 수식어 두 가지! ‘독일 최대의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신문’과 ‘노동자가 가장 즐겨읽는 신문’이 그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하루 판매 부수도 무려 410만부에 이른다. 단연 유럽 최고치를 자랑하는 수준이다. 독일 최대 일간신문인 <쥐트도이체차이퉁> 판매 부수가 하루 30만부를 겨우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빌트>의 ‘최대 정치적 영향력’이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설문지가 배포된 지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은 지난 7월26일, 녹색당의 차세대 주자인 30대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8주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공무로 얻는 보너스 마일리지를 개인적 용도에 사용한 ‘치명적 실수’가 사퇴의 이유였다. 그의 고백을 통해 설문지는 순식간에 정치적 뇌관으로 변해버렸다. 주말을 쉬고 7월28일 월요일자 <빌트>는 베를린 주정부 경제장관이며 전직 민사당 대표인 그레고르 기지도 사적으로 마일리지를 한 차례 이용했다고 보도했다. 기지 의원은 이를 곧 시인했고, 7월31일 장관직 사퇴와 정치 은퇴를 선언했다. <빌트>의 폭로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루에 한명꼴로 관련 정치인들의 이름이 1면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녹색당 출신의 연방 환경부 장관과 외무부 차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녹색당 원내총무도 <빌트>의 사격권으로 들어왔다. 이쯤되자 독일 정치인들의 여름휴가는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각 정당별로 비상회의가 소집됐고, 심지어 각 언론·방송사의 정치부 기자들도 휴가지에서 베를린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다급해진 사민당, 방어선 구축
다급해진 슈뢰더 총리가 먼저 1차 방어선을 구축했다. 공무로 얻은 마일리지를 사적으로 이용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이를 폭로하는 <빌트>의 방식은 문제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빌트>가 어떠한 경로로 의원들의 마일리지 사용정보를 입수했다면 마일리지를 부당하게 쓴 의원들의 명단을 일괄적으로 공개해야 할 것이라며, 하루에 한명씩 “물방울 떨어지는 것처럼” 공개하는 방식은 정치적 캠페인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빌트> 기자 출신인 슈뢰더 총리의 부인도 <빌트>가 우파 기민·기사연합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그러나 <빌트>는 한 우파 야당의원의 혐의를 3면 하단 상자기사로 처리함으로써 휴전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사민당 사무총장은 <빌트>를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 고발을 언론자유 침해로 해석한 11명에 이르는 독일 언론인들의 서명이 다시 전면광고 형식으로 <빌트>에 개재됐다. 여기에는 <슈피겔> 편집장을 비롯해 비판적 좌파 언론의 편집장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지난 8월7일 <빌트>는 검찰에 접수된 사민당의 고발장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공문서 공개는 현행법상 최고 징역 1년까지 구형할 수 있는 명백한 법률위반 사항임에도, <빌트>는 자신에 대한 고발장까지 입수해 공개할 수 있는 뛰어난 정보력을 과시한 것이다.
사민당 출신의 연방 국회의장이 2차 방어선 구축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료유출 진원지라는 혐의를 받는 루프트한자 항공사에, 의원들의 마일리지 관련자료를 24시간 이내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90년대 초 민영화된 루프트한자는 이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의원들 모두의 동의서 없이 마일리지 정보를 국회 사무처에 넘기는 것은 정보보호법 위반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여기에 “의원들 스스로 잘못을 공개하라”라는 따끔한 충고도 곁들였다. 각 정당 자체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의원 가운데 3분의 2가 공무로 얻은 마일리지를 사적으로 쓴 적이 있다는 보도가 뒤를 이으면서, 의원들 사이에는 집단적 ‘마녀사냥’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다. <빌트>의 주요 표적으로 떠오른 좌파 정당들의 급격한 지지율 하락을 내심 즐기는 야당도 사퇴나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사실 공무로 얻은 마일리지를 사적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처벌 대상은 아니다. 의원들의 마일리지 사적 사용을 규제하는 것은 1997년 통과된 의원 윤리강령에 의거한다. 의원 윤리강령 준수는 의원 개인의 도덕적 책임 아래 있다. 따라서 이를 위반했을 경우, 강제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다. 사민·녹색 연립정부 아래에서는 윤리조항이 전체 공무원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그레고르 기지 전 민사당 대표는 정치 은퇴의 변을 통해 공무로 얻은 마일리지의 사적인 사용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는 어느새 특권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나를 지지한 유권자들에게서 멀어진 것을 뜻한다”고 고백했다. 마일리지의 사적 사용은 자신이 그렇게도 원치 않았던 모습이라고 밝히면서, 스스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두렵기 때문에 정치 은퇴를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독일 현대 정치사에서 최고의 달변가요 선동가 가운데 한명인 기지 전 민사당 대표는 이렇게 정치 무대에서 물러났다.
정치 혐오 확산에 우익은 즐거워라
물론 그의 사퇴의 변이 아무런 의구심 없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행적에 관한 논란이나 민사당 내부의 갈등이 사퇴의 진정한 이유일 것이라는 등 여러 추측과 정치 공세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은퇴가 민사당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는 독일 대다수 언론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통일 이후 사실상 몰락해가던 옛 동독 공산당을 현재의 민사당으로 탈바꿈하면서, 민사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하는 데서 기지 전 대표는 단연 1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민사당을, 사민당과 녹색당에서 이탈하는 좌파 지지 유권자들을 흡수할 수 있는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고자 한 그의 시도는 당 강경파의 저항에 부딪혀 좌절되기도 했다. 그 대가로 그는 10년간 유지한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만약 ‘기지 없는 민사당’이 이번 총선에서 5% 지지율 장벽을 넘지 못하고 연방의회 진출에 실패하면, 이는 우파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이 의석수 배분법에 따라 더 손쉽게 현 집권 사민·녹색당을 정권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일리지 파문’이 갖는 또 다른 정치적 파괴력인 셈이다.
사민·녹색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 <빌트>의 마일리지 폭로 연재물은 정치인의 일반적 도덕성 문제를 경제회복이나 실업 등의 주요 선거쟁점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듯하다. 이를 증명하듯 독일 제1공영방송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투표하지 않겠다’는 유권자가 선거를 6주 앞둔 상황임에도 급속히 증가했다. 유권자의 정치 혐오현상은 사민·녹색당, 민사당의 지지율 하락과 맞물려 뚜렷해지고 있다.
베를린=글·사진 강정수 전문위원 jskang@web.de
‘움직이는 세계’의 고정필진 명칭을 ‘통신원’에서 ‘전문위원’으로 바꿉니다. 해외 14개국의 필진들이 모두 지역전문가들로,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시각으로 지구촌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따른 것입니다.

사진/ 처음으로 의원직에서 물러나면서 마일리지 파문의 시작을 알린 녹색당의 외츠드미어 전 의원.
설문지가 배포된 지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은 지난 7월26일, 녹색당의 차세대 주자인 30대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8주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공무로 얻는 보너스 마일리지를 개인적 용도에 사용한 ‘치명적 실수’가 사퇴의 이유였다. 그의 고백을 통해 설문지는 순식간에 정치적 뇌관으로 변해버렸다. 주말을 쉬고 7월28일 월요일자 <빌트>는 베를린 주정부 경제장관이며 전직 민사당 대표인 그레고르 기지도 사적으로 마일리지를 한 차례 이용했다고 보도했다. 기지 의원은 이를 곧 시인했고, 7월31일 장관직 사퇴와 정치 은퇴를 선언했다. <빌트>의 폭로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루에 한명꼴로 관련 정치인들의 이름이 1면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녹색당 출신의 연방 환경부 장관과 외무부 차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녹색당 원내총무도 <빌트>의 사격권으로 들어왔다. 이쯤되자 독일 정치인들의 여름휴가는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각 정당별로 비상회의가 소집됐고, 심지어 각 언론·방송사의 정치부 기자들도 휴가지에서 베를린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다급해진 사민당, 방어선 구축

사진/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정치 은퇴를 선언한 그레고르 기지 전 민사당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