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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과바구니 전체가 썩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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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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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회계부정으로 불안감 휩싸인 미국… 구조적인 개혁과 규제강화 요구하는 목소리 높아

사진/ 대기업들의 회계부정 사태가 일어난 뒤 미국 증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증권거래소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개인들. (GAMMA)
미국의 7월은 숱한 정치이슈와 테러와의 전쟁 등 국제적 이슈에 가려 있던 경제이슈가 전면에 등장하여 언론을 장식한 달이었다. 지난해 12월에 터진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의 부도 이후 계속된 대기업의 스캔들은 얼마 전 미국 역사상 최대의 부도사태를 낳은 월드컴과 퀘스트의 회계부정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주가가 급속히 하락하면서 미국 기업의 투명성과 신뢰의 문제는 모든 이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기업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의 원칙을 고수하던 부시 대통령도 급기야 7월 초 기자회견을 열어 기업들의 회계부정에 대한 감독과 처벌 강화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방안 없이 도덕적 설교 수준에 그친 부시의 회견 이후 주가는 계속 곤두박질쳤고 여기저기서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과 미국의 기업문화에 대한 비판이 증폭되기만 했다.

기업윤리법으로 치유될까


많은 미국의 진보적 매체들은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1930년 대공황의 상황과 비교했다. 소비자보호운동가이자 지난 대선에서 녹색당 후보로 나섰던 랠프 네이더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윤은 사유화하면서 경제적 위험부담과 부정은 사회화하는 기업 사회주의(corporate socialism)가 합리적 자본주의를 대체하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주가하락을 통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던 일반 투자자들이나 기업의 부도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연금기금을 날려버린 시민들이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편법으로 주가 상승을 유도하여 배를 불려가는 소수 기업 임원진들을 곱게 볼 리 없다. 이에 더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들마저 현 경제위기를 무차별적 탈규제가 부른 필연적인 결과로 규정함에 따라 결국 기업규제법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던 공화·민주 양당도 기업을 규제하기 위한 새로운 법안 마련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7월30일 기업윤리법에 서명함으로써 일단은 문제해결을 위한 첫 실타래가 풀렸다.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강화를 요체로 한 기업윤리법의 내용은 크게 두 축을 이룬다. 하나는 기업과 회계를 감시하는 독립적 감독기관의 설립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 회계와 관련해 정부 규제의 폭과 수위를 넓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감시의 폭은 기업을 넘어 기업에 대한 회계감사를 시행하는 기관에까지 넓혀졌고, 감독기관은 부정의 혐의가 있을 경우 누구든지 소환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회계부정과 문서파기 행위에 대해서는 최고 20년형까지 언도할 수 있게 되는 등 처벌도 강화되었다.

기업윤리법에 서명하면서 부시는 기업인들을 향해 “(이 법안은) 정직하지 못한 기업인들을 폭로하고 엄벌할 것”이며 “저급한 기업활동과 그릇된 이윤추구의 시대는 끝났다”고 천명했으나, 이 법안의 실제적 효력과 관련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부시 행정부와 의회, 기업인들은 새 법안이 미국의 경제를 다시 살려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새 법안이 위기의 돌파구를 협소한 회계영역에서만 찾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과 논쟁’은 이와 같은 대립구도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 자유시장의 옹호자들은 이번 위기가 몇개의 썩은 사과 때문에 빚어졌다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회계의 투명성 확보를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경제위기가 단지 몇개의 썩은 사과 때문이 아니라, 사과를 담는 바구니가 썩었기 때문이라며 좀더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 네이션> 최근호에 실린 버몬트 주의원 버니 샌더스의 입장은 후자를 대변한다. 기업의 위기가 단지 회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샌더스 의원은 문제의 핵심이 “오늘날 미국의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기업들을 통해 막대한 캠페인 자금을 조달하는 의회 구성원들이 그 기업들한테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에 있다고 본다. 기업부정이 뿌리깊은 정경유착의 관행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진단이다.

얽히고 얽힌 부정의 사슬

사진/ 엔론 사태 이후 일련의 회계부정이 계속 드러났다.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의 로고. (GAMMA)
실제로 새 법안의 주창자들이 모두 정경유착의 당사자들이자 기업부정의 수혜자라는 점은 법안의 효력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일부 의원들이 대기업과의 재정의존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의원들은 8월 의회 휴관을 앞두고 앞다투어 기금마련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적게는 1천달러짜리 아침식사에서부터 많게는 5만달러짜리 골프모임에 이르기까지 의회 의원들의 기금마련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기업의 임원이거나 로비스트임은 당연하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부정한 기업인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어제의 기업가 부시와 부통령 딕 체니도 각종 부정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부시는 과거 스텍트럼7이라는 석유회사의 경영자로 있을 때 소로스 등이 소유하고 있던 하켄과의 합병과정에서 주식을 세 차례 매입하면서 거래상황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내부거래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은 것이 구설수에 올랐다. 체니도 그가 최고 경영자로 있을 당시 할리버튼사의 회계부정 문제와 내부자 거래 문제로 이미 조사를 받고 있거나 의혹을 사고 있다.

사진/ 월드컴의 파산으로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절정에 달했다. 부시 대통령은 급기야 회계부정에 대한 감독과 처벌 강화를 천명했다. (GAMMA)
흥미로운 것은 부시의 의혹들에 대해 과거에도 증권거래위원회가 별다른 조사를 벌이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정부와 기업들 간의 연줄망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사건을 담당한 증권거래위원장은 아버지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그의 법률고문을 맡은 사람이고, 당시 증권거래위원회 법률고문은 부시가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중개를 한 이였다. 더 나아가 당시 증권거래소의 수사관이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인 엔론의 회장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고 있으니, 기업을 감시하고 감독해야 할 정부기관들과 대기업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단지 몇몇 썩은 사과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사이의 유착 같은 사과 바구니가 오늘날 미국의 경제위기의 주된 원인이라는 진단은 기업규제의 수위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기도 한다. 미 의회와 행정부가 자신 있게 내세우는 기업윤리법은 시장을 왜곡시키는 특정한 요소(회계)에 국한되어, 구조적 개혁으로까지 확장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윤리법이 주식시장의 투명성 확보를 통해 투자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개혁의 단맛을 줄 수 있다 치더라도, 노동자나 다수 소비자들에게까지 그 과실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정적이다.

오히려 많은 미국의 시민운동단체들과 진보적 언론들은 70년대 이후부터 줄기차게 진행되어온 탈규제의 흐름이 멈칫하고 더 많은 미국인들이 정부의 규제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참에, 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반 주주들의 가치증식 대신 소수 고위 임원들의 배만 불리는 기업의 스톡옵션을 회계상 기업비용으로 처리할 것, 기업들의 부정으로 인해 손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기업뿐만 아니라 기업과 공모관계에 있는 회계사나 변호사, 은행 등을 상대로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끔 법제를 마련할 것, 주(州)법이 아닌 연방법을 통해 법인설립과 내부 경영에 대한 규제를 확립할 것 등이 주된 요구사항이다.

깨져버린 미신 ‘시장만능주의’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비판 외에도 새로 통과된 기업윤리법은 여전히 몇몇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주식시장의 혼란과 상관없이 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부시가 무색하게, 2·4분기 경제성장률이 1.1%로 기대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해 또 다른 불안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부시가 경영자로, 그리고 텍사스 주지사로 있을 당시의 비공개 문서들도 곧 공개를 앞두고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이러한 변수들은 기업윤리법을 넘어서는 경제개혁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현재 미국은 70년대 후반 이래 강고하게 형성되었던 탈규제의 흐름을 역행하는 규제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고 있다. 이는 시장만능주의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전 지구가 시장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굳게 무장되고 있는 시기에 가장 발전되고 강력한 자본주의 체제인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변화는 이후 다른 나라들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뉴욕=김선철 통신원 jollary@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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