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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시와의 동거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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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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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요 취임 중반을 결산하는 국정연설, 그리고 연설장 밖에 모여든 시위대의 외침

사진/ 아로요가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는 시각, 국회의사당 부근에서는 2만여명의 시위대가 “양키 고홈, 아로요 고홈”을 외쳤다.
“키가 더 자랄 수 없지만 나는 계속해서 더 잘 할 수 있다.” 지난 7월22일, 155cm 단신인 아로요는 대통령 취임 이래 두 번째 맞는 국정연설에서 강한 어조로 국정 중반기 정책을 발표했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씨에 국회의사당에 모인 필리핀의 정치권력 엘리트들은 패션쇼를 열 듯 남부 민다나오의 전통 옷에서부터 여러 색상의 옷을 입고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이날 아로요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국민의 안전과 미래를 위한 ‘강력한 국가’라는 단어를 55분 연설에 무려 79회나 썼다. 또한 실업문제,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와 납치·테러·마약 등 끊임없는 사회문제에 대해 “그 모든 전선에서 싸워 이길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날 자주 쓴 ‘강력한 국가’는 바로 테러와의 전쟁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외무장관 교체한 속내

최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7월 말부터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동남아 10개국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주목하고 있다. 이 포럼에서 논의할 미국과 동남아국가연합의 반테러협약 특별 결의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또한 서해교전 이후 남북한이 함께 이번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더욱 큰 관심거리다.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은 이 기간에 5개국을 순방할 예정이며, 필리핀에는 8월3일에 방문할 예정이다. 테러 방지와 관련된 다양한 외교적 수완으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온 아로요는, 이번 ARF를 통해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는 이미지를 보여주며 동남아시아권에서 경제적·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 한다.


이미 9·11 사태 이후 동남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올 1월 남부 민다나오의 바실란섬에 미군이 투입되면서 시작됐다. 바실란섬에서 활동하는 200여명의 ‘도적떼’ 아부사야프를 뿌리뽑는다는 명목이었다. 6개월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7월 중순에 철수해야 할 미군들은 오히려 필리핀 루손섬 북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10여년 전 집으로 돌려보낸 미군을 다시 불러들이는 데는 정치권 내부에서도 동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통령 겸 외무부 장관인 테오피스토 긴고나(74)는 지난 6월23일 국방부에 보낸 편지에서 “새 군사작전은 (외국군 부대의 필리핀 영토 내 전투행위를 금지한)헌법에 위배되며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로요의 친미외교정책과 마찰을 빚은 긴고나는 지난 7월3일 “외교정책의 주설계자는 대통령이므로” 외무부 장관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아시아의 ‘철의 여인’임을 자처하는 아로요로서는 말 많은 긴고나 대신 외무부 장관직에 자신의 반대파인 오프레 상원의원을 지명했다. 현재 상원의원 24명 가운데서 아로요 정부에 반대하는 11명 가운데 한 사람인 오프레를 외무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친미외교를 유지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부시로서도 아로요의 이 같은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받아들여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을 통제할 유리한 군사적 안전지대를 세운 셈이다.

테러전쟁 지원이 빈곤 해결할까

아로요가 미국과 연대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는 시각, 국회의사당 부근 커먼웰스 거리에서는 2만여명의 시위대가 “양키 고홈, 아로요 고홈”을 외쳤다. 노동·사회·종교단체들이 함께한 연대집회에서 “미국 주도의 반테러협약은 모든 생활전선에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박탈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인구 8천만명에 육박하는 필리핀 국민의 40%인 3200만명이 하루 38페소(약 1천원) 미만을 버는 절대 빈곤층이다. 이 고질적인 빈곤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로요 국정연설 다음 날 필리핀대학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한 토론자들은 “아로요 정부가 미국과 손잡고 테러전쟁에 앞장서서 얻은 경제원조는 정치권력의 부정·부패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마닐라=글·사진 나효우 통신원 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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