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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목민의 팔다리를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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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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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방부의 오랜 침묵을 깬 케냐 마사이·삼부루 부족민들의 끈질긴 투쟁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하던 영국 국방부가 마침내 부분적 책임을 인정하고 마사이족과 삼부루족 사상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을 하기로 합의했다. 영국군은 지난 50년 동안 영국과 케냐 양국 정부 간 협정에 따라 케냐의 아처스 포스트와 돌돌에 소재한 2곳의 군사훈련장을 이용해왔다. 그런데 훈련을 마친 뒤 불발탄 등을 제대로 수거하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불발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해 훈련장 일대에 사는 마사이족과 삼부루족 유목민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건이 빈발했다. 피해자 수가 정확하게 산출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50여년간 약 500명이 여러 유형의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영국 국방부의 피해보상을 받는 부족민은 228명이다. 모두 450만파운드를 지불받기로 최종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피해 정도에 따라 배상액이 차등 지급된다.

불발탄으로 목숨 잃은 어린이들

사진/ 도로변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파는 마사이 부족민들. 영국군은 대부분 문맹인 이들을 보호할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영국군이 사용하는 아처스 포스트 소재 훈련장은 삼부루족이, 돌돌훈련장은 마사이족이 방목지로도 사용해왔다. 문제는 훈련장 경계에 철책이 세워지지 않았고 훈련장을 넘나드는 부족민들의 대부분이 문맹인데도 이를 고려한 경고표시를 제대로 해놓지 않아 안전사고의 요인이 상존해왔다는 점이다. 불발탄을 잘못 건드려 즉사하거나 혹은 사지가 절단되고 실명당하는 등 피해자가 속출했는데, 이들 중 90% 이상이 어린이들이었다. 어린이들이 소를 몰고 가던 중 반짝이는 금속성 물체를 주워 장식물처럼 소의 목에 걸었다가 폭사당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인명과 동물 피해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마사이족과 삼부루족의 피해실태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구호기구인 액션 에이드(Action Aid)가 영국의 법률회사에 배상 여부를 타진하면서부터였다. 의뢰를 받은 레이·데이 합동법률법인은 보츠와나의 석면광산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성공적으로 받아내는 등 대인손해배상, 의료과실 등을 전문적으로 수임해온 법률회사로 명망이 높다. 지난해 3월부터 케냐에 전문가를 파견해 구체적 피해사례를 모으고 소송에 사용할 자료를 수집하면서 영국 국방부를 상대로 한 마사이족과 삼부루족의 3년간의 권리찾기를 주도하였다.

사진/ 야생동물 보호구역 인근에 위치한 마사이족 마을. 농경을 위주로 하는 반투계 부족과는 달리 마사이족과 삼부루족은 목축을 주업으로 한다.
영국 국방부는 훈련장의 안전은 전적으로 케냐 정부의 책임이라고 전가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자체적으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뒤늦은 진화작업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영국 국방부는 케냐 내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케냐의 법정으로 소송을 이전하려고 신청했으나 마사이족 피해자 쪽의 변호사들은 영국에서 소송이 진행되도록 하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국방부가 소송을 케냐로 이전하려고 시도한 배경에는 영국 내에서 소송이 진행될 경우 비판적 여론 때문에 재판이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97년 영국 상원은 영국계 회사나 영국 정부가 관련된 사건의 경우 해당 사건이 발생한 국가에서 실질적인 법적용을 받는 것이 불가할 경우 영국 법정에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마련한 바 있어 이번 마사이족과 삼부루족의 소송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케냐에서 진행할 경우 전문적 법률자문 등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7월17일 마사이족 대표자 4명, 피해자 2명이 런던에 입국하여 영국 국방부와 이틀간의 의견조정과 협의 끝에 법정소송으로 비화되지 않고 타결을 이끌어냈다.

비슷한 소송 봇물 이룰듯

이런 획기적인 협상타결로 영국 정부가 식민통치 기간 중 케냐 원주민들에게 입힌 피해에 대한 소송이 봇물처럼 밀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케냐에서 키쿠유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마우마우 무장항쟁 당시 영국군이 ‘앤빌작전’을 펼쳐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유목민이 불구가 된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뒤늦은 감이 있지만 영국 국방부의 결정으로 마사이족과 삼부루족 피해자들은 절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헨트=글·사진 양철준 통신원 YANG.chuljoon@wanad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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