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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로코는 힐러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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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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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깨고 컴퓨터 전문가를 왕비로 택한 모로코 국왕… 국가 발전에 여성 역할의 중요성 인식

사진/ 모하메드 6세와 그의 부인 살마 베나니. 모로코는 전통을 깨고 능력 있는 여성을 왕비로 선택했다. (GAMMA)
38살 노총각인 모로코 모하메드 6세 국왕의 마음을 설레게 한 14살 연하의 당돌한 컴퓨터공학 전문가인 살마 베나니. 모로코에서 왕족에 관한 모든 소식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 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에 새로 왕비가 될 여인의 사진과 이력이 발표되었을 때 모로코인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잠시 망설였다. 모로코의 알라위트 왕조가 시작된 1664년 이래로 왕비의 모습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모로코에서 왕비는 언제 결혼식을 올렸는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발표되지 않았고, 왕비라는 이름도 갖지 못한 채 단지 ‘왕자들의 어머니’란 호칭으로 불린다. 왕의 해외순방에서도 제외되는 음지 속에 숨은 존재였다.

부족동맹 수단으로 이용한 왕가 결혼

사진/ 결혼식 행사 중 하나인 기마 총검술 시범. (GAMMA)
새로 왕비(알라위트 왕조 전통에서는 왕비라는 명칭이 없기 때문에 단지 ‘빛나는 진주 랄라 살마’로 불린다. 랄라의 의미는 공주다)가 될 살마 공주는 이와는 달리 젊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신세대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중세의 하람(왕의 빈들의 거처) 속 폐쇄적인 분위기를 벗어 던지고, 국가원수의 배우자(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준비를 한다.


살마 베나니는 왕족이 아닌 평범한 대학교수의 딸로서 3살에 모친을 여의고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수도 라바트에 있는 컴퓨터 공학 전문대학원(ENSIAS)을 수석졸업한 뒤 모로코의 최대기업인 ONA에 컴퓨터 전문가로 들어갔다. 왕과 만난 뒤 3년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지만 과거의 신데렐라가 가련청순형이었다면 모로코의 신데렐라는 미모와 능력으로 왕의 마음을 휘어잡은 현대판 신데렐라다.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은 사랑이지만, 전통적으로 모로코에서 왕의 결혼은 상대부족을 내 편으로 만드는 정략적 목적으로 이용되어왔기 때문에(왕의 신붓감은 주로 베르베르족에서 선택했다) 수세기에 걸친 전통을 버리고 도시 출신의 컴퓨터 전문가를 왕비로 고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로코는 전통적으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의 동맹 정도에 따라 정치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왕의 주요 역할은 어떻게 하면 베르베르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정부와 좋은 협조관계를 이룰 수 있는가에 모아진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가장 유력한 베르베르족 가운데서 왕의 배우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중세기적인 사고방식으론 더 이상 나라를 이끌수 없게 됐다. 선왕인 하산 2세는 경제가 발달하면 국민이 왕조에 대해 반감을 가질까봐 나라를 그냥 후진상태에 머물게 했다는 설이 있다.

스페인과의 분쟁으로 열기 식어

보통 1주일 동안 열린 결혼식 축제가 이번 결혼에서는 3일로 준 점에서도 사고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번 결혼식 축제는 7월12∼14일 3일간 열렸는데, 결혼식 축제 바로 전날인 7월11일 모로코군이 모로코 근처의 스페인령 페레힐섬을 점령한 뒤 긴장상태가 고조되어 축제분위기가 많이 사그라진 느낌이 있다.

결혼식의 첫 절차인 지난 3월의 혼인신고식에는 가족만 참석하였다. 원래 결혼축제는 4월 마라케시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유혈사태로 인해 연기되었다가 결국 7월에 열리게 되었다.

결혼축제 ‘알아르스’에서 모하메드 6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서민들과 유리되지 않은 왕의 이미지다. 왕은 결혼식 날 전국에서 모인 200쌍의 커플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친근한 이미지를 심으려고 노력했다.

페레힐섬 점령을 둘러싼 모로코와 스페인 간의 긴장상태 때문이었는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제외하곤 국가원수가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왕가는 모로코 왕족과 절친한 친분을 자랑하는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불참한 것에 대해 특히 섭섭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결혼축제를 더 화려하게 하기 위해 섬 점령을 결혼축제 전날로 잡고 강행했지만, 유럽연합은 결국 스페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젊은 왕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진리를 결혼축젯날 배운 셈이다.

튀니스(튀니지)=김병국 통신원 ibn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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