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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펄펄 살아있는 특별한 싱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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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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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시대의 사람들]

표준 영어의 효율성과 지역영어의 다양성 사이에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사진/ 리처드 파웰(Richard Powell),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일본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중국어에 능통한 비교언어연구자. 현재 니혼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일본판 편집장이기도 하다.

안전한 길, 멋진 쇼핑, 맛있는 먹을거리, 흐드러진 열대식물을 좇아 해마다 상주인구의 배가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 그리고 높은 교육수준에 별탈 없이 굴러가는 정치적 안정감 탓에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 행선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 그럼에도 싱가포르는 방문객들에게 창의성이나 자발성 같은 것들로 감동을 주지는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싱가포르를 들여다보면, 싱가포르가 얼마나 재미있는 사회인지를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백미가 바로 호키엔 방언과 말레이어를 뒤섞은 싱가포르식 영어 싱글리시다. 아시아의 여러 언어 가운데 가장 역동성이 있는, 지금도 계속해서 살을 붙여나가는 펄펄 살아 있는 아주 특별한 언어라고 할 만하다.


불완전하고 비문법적인 몹쓸 짓?

사진/ 싱글리시가 싱카포르시민들 사이에선 매우 자연스런 통용어일수밖에 없다는게 언어 문화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SYGMA)
그러나 3년 전 싱가포르 교육부 보고서는 싱글리시 탓으로 학생들이 영어 배우기를 걷어치웠다고 주장했고, 싱가포르국립대학의 언어학자 앤느 파킬은 더 폭넓게 해외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표준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싱가포르인 스스로가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교육부의 뒤를 받쳤다. 한술 더 뜬 고촉통 총리는 싱글리시를 불완전하고 비문법적인 ‘몹쓸 것’으로 규정했고, 리관유 선임장관은 싱가포르인들이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될 ‘불구어’라고 불렀다.

싱가포르의 정치풍자가 콜린 고는 이에 대해 “허튼소리”라고 맞받아친다. “싱글리시는 불구어가 아니라 싱가포르인들에게 상황에 어울리는 언어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놓았다.” 콜린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녔다.

아무도 공식적인 편지에 싱글리시를 쓰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일자리를 찾는 신청서에 “Give me a job, leh!” 같은 싱글리시를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식당에서 맛있는 국수가 나왔을 때 시민들은 주저없이 “Wha, damn solid!”라는 싱글리시를 토해낸다. 이건 표준영어의 “Mmm, very tasty!”라는 표현으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싱가포르 현지인들만의 감정표현 방식이고, 이게 바로 싱글리시의 효용가치인 셈이다.

싱글리시는 간결하고 경제적인 언어이기도 하다는 것이 애호가들의 주장이다. 즉 무엇 때문에 공항에서 가방을 찾을 때 구질구질하게 긴 영어를 쓰냐는 것이 이들의 언어경제성 논리다. “Take bag go where, ah?”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싱글리시라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주민분포는 중국계 75%, 말레이계 15% 그리고 인도계 8%로 대부분의 시민들이 2개 이상의 언어를 쓰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생활환경 속에서 싱글리시가 싱가포르 시민들 사이에서는 매우 자연스런 통용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언어문화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진단이다. 비록 정부가 사회통합이나 국제경쟁력을 위해 표준영어교육을 강조하고 있지만, 다양한 언어환경이 있는 시민들의 언어생활을 본질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렵다는 것 또한 일치된 분석이다.

아시아인들끼리 절묘하게 통용

그렇다면 표준영어의 효율성과 지역영어의 다양성 사이에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적어도 하와이대학의 연구자 래리 스미스에 따르면 그 필요성은 희박해진다. “아시아 영어의 다양성은 아시아인들 사이에 영국이나 미국사람들 더 폭넓게 잘 이해되어 왔다.”(??) 실제로 수많은 언어를 쓰는 아시아의 영어 사용자들이 대부분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영국이나 북미의 영어 사용자들 수를 이미 뛰어넘었으며, 아시아인들끼리의 영어는 비과학적으로 보이면서도 아시아인들끼리는 절묘하게 통용되는 게 현실이다. 일본·한국·싱가포르·타이의 친구들 틈에 낀 영국인만 바보가 되는 게 현실이라는 뜻이다.

자, 정통영어란 아시아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싱글리시를 박멸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약 <한겨레21> 독자들이 싱가포르의 간이음식점에서 어여쁜 아가씨가 햄버거를 건네주며 “Put some chill sambal also better!”라고 하더라도 놀라지 말고, 싱글리시를 함께 즐기기를 기대해본다. 아시아인들 사이에는 아시아 영어가 더 쉽게 이해될 테니!

*sambal이란 말레이-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먹는 고추로 버무린 소스쯤 되고, 표준영어에서 also better 같은 표현방식은 없다. 문법이 파괴된 영어에 현지어와 조합된 싱글리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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