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시대의 사람들]
익살과 해학으로 무장한 콜린 고, 그는 왜 ‘싱글리시’ 수호운동의 최전선에 섰나
싱가포르, 깨끗하고 효율적인 도시로만 알려졌지만 익살과 해학에 대해서는 별로였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주인공 콜린 고(Colin Goh·31)에 대한 첫 인상을 시민사회의 주창자로 받았다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올해 비할리우드 필름 가운데 폭발적인 인기를 끈 < I not Stupid >라는 황당한 제목의 싱가포르 풍자 코미디라든가, 야후(Yahoo)에서 가장 접속률이 높은 사이트 가운데 하나로 발표한 싱글리시로 쓴 싱가포르 풍자 사이트 TalkingCock.com 같은 것들을 한번 상상해보자. 그리고 자신이 세운 온라인기업 ‘Dot.com’이 파산하자, 뉴욕에 사는 싱가포르인 패거리들과 실컷 한번 웃어나 보자며 TalkingCock(쓰레기 또는 허무맹랑함을 뜻하는 싱글리시)을 만든 토실토실한 콜린을 상상 옆에 붙여보자.
콩글리시·장글리시… 그리고 싱글리시
콜린은 버마민족주의의 상징인 싸우는 수탉(사실은 싸우는 공작임) 대신 불경스런 수다쟁이 수탉을 웹사이트의 상징으로 걸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 콜린은 정부의 검열로부터 싱글리시를 수호하는 비정부 주도운동의 최전선에 최초로 서고 말았다.
싱글리시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겠다. 이것은 한국이나 일본 이빨에 무참히 ‘깨진 영어’인 콩글리시나 장글리시와 같은 계열의 싱가포르식 영어를 일컫는 말인데, 이건 깨진 영어일 뿐만 아니라 말레이어와 호키엔 방언이 어지럽게 섞인 짬뽕영어다 보니 상태가 더 처참한 경우라고 할 만하다.
자, 본론으로 넘어가자. 그러면 콜린이 완벽한 영어를 쓸 줄 몰라 싱글리시를 수호한답시고 날뛰는 걸까? 기막힌 재치와 속깊은 해학이 섞인 매우 고상한 영어로 인터뷰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그를 보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다. 콜린은 은퇴한 의사의 아들로, 내로라 하는 학벌에 풍부한 여행 경험까지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출신이다. 영국의 런던대학을 졸업하고 유명한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3년간 근무한 뒤, 다시 미국의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부도날 회사인 Dot.com을 경영했다.
연애시절 잘 보이려고 무척 공들인 그의 아내는 작가이자 만화가다. 이런저런 연유로, 주로 공부한답시고 제법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콜린은 여전히 ‘싱가포르 보이’임에 틀림없었다. 덜거덕거리는 샌들을 끌고다니는 꼴이나 돼지고기 국수를 즐기는 입맛이나 말끝마다 라아(lah)를 달고 다니는 말투로 보나.
인터뷰를 시작해놓고 보니,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우선은 싱글리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그랬고, 다음은 ‘미들 클래스 보이’들이 눈꼴사나울 정도로 잘난 척하는 게 그에겐 전혀 없었던 탓이다.
콜린은 교양떠는 음탕한 영국 코미디에서부터 홍콩영화의 케케묵은 해학과 막가는 할리우드 영화까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거기에 서양식 해학의 개념을 차용하고 아시아와 유럽의 양식을 절충한 TalkingCock이 어떻게 싱글리시를 쓰는 학생들에게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입담으로 말끔히 정리했다. 농담으로 시작해서 농담으로 끝맺는 그이의 대화법은 결코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천재였다. “사업계획 같은 건 진짜 없다! 유일한 목표는 무조건 싱가포르 시민들의 배꼽을 모조리 빼놓자는 것이고, TalkingCock을 싱가포르판 ‘매드매거진’(Mad Magazine)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전부다.”
Coxford Dictionary를 아십니까
한번 슬쩍 그를 떠보았다. “사람들이 싱가포르 시민들은 해학적인 감각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 일들이 잘 될까요?” 콜린은 턱을 괴고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인데 뭘. 싱가포르에는 해학의 대중적 감각 같은 게 없지. 시민들이 생각을 드러내는 걸 매우 꺼리니까. 뭔가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다는 증거지만, 뿔뿔이 흩어지면 얼마나 잘 지껄이고 잘 웃고 잘 노는데!” 콜린은 갑자기 낄낄대며 혼자 즐거워했다.“익명, 그 익명의 정원에서는 의사도 정부장학생도 공무원도 교사도 얼마나 잘 뛰어노는지, 그건 외국인들이 모를 거야!”
사실 TalkingCock은 싱가포르의 영어를 가다듬고 싱글리시를 몰아내자는 거국적인 노력이 시작된 지 1년 뒤에 진가를 드러냈다. 그 무렵 고촉통 총리는 싱글리시가 세계 최고의 경제를 목표로 삼은 싱가포르을 망칠 것이라고 발끈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싱가포르 사람들의 영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을 몹시 염려하면서, 특히 방송을 싱글리시 유포의 주범으로 몰았다. 그의 눈에는 싱가포르 아이들이 모조리 시트콤의 캐릭터와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던가 보다.
그 결과 싱가포르 국영방송인 < TCS >는 싱글리시를 쓰지 않을 것이며 모든 배우들은 문법적으로 정확한 영어만을 쓰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엄숙한 방송의 그 ‘위생적’인 영어는 뜻하지 않게 ‘사교’를 창조하고 말았다. 사교? 한달에 300만건의 접속수를 기록하는 TalkingCock은 가히 우상 숭배자들이 드나드는 사원이라고 할 만했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대국인 한국의 ‘사교’ 사이트에 비하면 접속수가 너무 적다고? 싱가포르 인구 전체와 맞먹는 수치인데도? 한달에 한국 인구와 맞먹는 4천만건이 접속되는 한국의 ‘웃기는 사이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어쨌든 이건 해학에 갈증을 느낀 시민들이 마음껏 싱글리시를 즐기며 배꼽을 뺄 수 있는 해방구 같은 곳이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폭넓게 쓰이는 싱글리시 어휘들과 ‘골때리는’ 속어들을 망라한 “Coxford Singlish Dictionary”다.
shiok: delicious, gatal: flirtatious, blur: clueless …….
Coxford 사전에 등록된 전통적인 싱글리시들이다. TalkingCock의 유명세는 콜린이 16만싱가포르달러(약 1억원)를 들여 만든 15분짜리 패러디 영화 < TalkingCock : The Movie >가 싱가포르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극에 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개 불행이라고 표현들은 하는데- TalkingCock이 절정에 오른 2002년 4월은, 정치적 배경이 있는 온당치 못한 바른영어쓰기운동(Speak Good English Movement)이 다시 사업에 착수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검열을 뚫고 수많은 지지자를 얻다
콜린은 자신의 영화가 검열에 걸려들었고, 싱가포르 방송의 검열당국이 이 영화의 15초짜리 방송예고편을 싱글리시 때문에 금지시켰다고 믿었다. “왜 우리보다 불경스런 미국영화들은 손대지 않느냐?” 콜린은 당시 검열당국에 ‘괜히’ 한번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검열당국 왈 “당신 영화가 호키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일 수도….” 그래서 콜린은 이렇게 이해했다고 한다. “당국은 사람과- 아무와도- 관련이 없는 영화만을 원하는구나.”
검열에 봉착한 TalkingCock의 패거리들 머리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고, 개관 4일 전 그들은 자신들의 웹사이트에 SOS(Save Our Singlish) 캠페인을 띄워 ‘장엄한’ 투쟁을 선언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싱글리시 검열에 대한 항의의 상징으로 자신들의 ‘우상’인 수탉의 부리를 묶어버렸다. “검열당국의 이중적인 잣대에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우린 지나친 영어 캠페인이 문제라 보고 싱글리시 구조운동(SOS)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콜린의 패거리들은 영화를 통해, Coxford Singlish Dictionary를 통해, 싱글리시 노래가 담긴 CD를 통해, 싱글리시가 결코 싱가포르의 수치가 아님을 알리기 시작했다. Talkingcock.com을 열어보면 독자들은 아래와 같이 ‘슬픈’ 구호를 만날 것이다. “지금은 당신이 우리 필름이나 CD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따질 문제가 아니다. 이 나라는, 무엇에 대해서도 의사표시를 할 수 없고, 따라서 당신이 우리 영화를 보는 일이야말로 정부의 문화차별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TalkingCock의 ‘도전’에 대해 정부는 ‘무시’라는 대응책을 썼고, 싱가포르 언론도 정부를 따라갔다. 그럼에도 TalkingCock은 수많은 지지자를 얻어- 사실은 상업적으로야 별볼일 없었지만, 그렇게 표현하고들 있다- 개관 첫주에 5위까지 올랐고, 그 ‘희한한’ 사전은 초판이 5천부나 팔렸다.
심지어 콜린의 강력한 맞상대이며 고등학교 선배인 ‘바른영어쓰기운동’의 대표 데이비드 옹(David Wong·45·퇴역대령)도 TalkingCock 캠페인 현장을 다녀갈 정도였다. 데이비드 옹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콜린을 “매우 창조적이고 지적이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솔직히 SOS 캠페인은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인 것으로 본다”며 상반된 감상을 털어놓았다. 결점 없이 순결한 영어를 구사하는 영국 유학파인 데이비드 옹은 바른영어쓰기운동이 결코 싱글리시를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도 덧붙였다.
어느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콜린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싱가포르 시민, 우리에겐 문화적 확신 같은 게 없다. 우린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식별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표준에 맞추려고 애쓸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코 싱가포르에서 존재할 수 없는 방식이다.” 흥분하여 목소리가 높아지는 콜린의 태도에 카페의 분위기가 주의를 주었다. 갑자기 음악이 멈췄고, 찻잔과 숟가락 닦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인터뷰 내내, 변호사로 단련된 콜린은 아무리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도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으나,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시민들의 영혼을 억압하는지를 묻자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듯 보였다.
“싱가포르 시민들은 합리적으로 사물을 보는 데는 모두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것말고, 사물의 배경을 보는 데는 먹통이다.”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올바른 영어를 쓰자는 데 반대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고 싱글리시를 악마로 여기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싱글리시는 우리 문화와 민족사의 일부다. 문법적으로나 언어체계상 성숙한 건 아니지만, 모든 싱가포르 시민들은 이해할 수 있는 통용어다. 싱가포르 시민이라면 누구나 해외에서 우연히 만난 싱가포르 사람들과 싱글리시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 혈족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그거다. 그래도 싱글리시를 박멸해야 하나?”
흥분한 그는 TalkingCock 영화 검열건도 다시 화제에 올렸다. “내가 화가 난 건, 당국자들에게 뿌리박혀 있는 묘한 정서를 발견하고부터다. 그이들이 내게 한 말 가운데, ‘해외에 팔 수 있게 반드시 외국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뚜껑이 열렸다. 이건 장사나 하고 세계화의 표준에 맞추자는 것일 뿐, 싱가포르 시민들에게 필요한 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콜린은 결국 싱가포르의 진짜 아픈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 2년 전 한 조사 보고서의 내용 가운데 대부분의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충격적인 부분을 상기시키며 말을 이었다. “싱가포르 시민으로 태어나는 게 ‘쪽팔린다’는 뜻인데,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콜린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촌스럽게’ 애국심을 바탕에 깐 계몽운동가가 되고 말았다는 걸 매우 비관적으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맞는 말이라고 나는 맞장구치면서도 속이 허전해졌다. 애국주의, 민족주의, 게다가 계몽주의까지? 세계 최고의 교육제도와 세계 최고의 국제비즈니스 도시라는 개명천지 싱가포르에서! “나는 정치적 직관력 같은 건 없다. TalkingCock은 모조리 게을러빠진 잡종들이다!” 배시시 웃으며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진 콜린이 갑자기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수다쟁이 닭이 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도 신경을 긁었다. 콜린은, 나는, 또 데이비드 옹은, 검열관들은, 영화 관람자들은, 접속자들은 과연 어느 나라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랄까?
본문과 상기기사중 굵은 영어활자는 전형적인 싱글리시 표현법이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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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네트워크’는 다가오는 ‘아시아 시대’를 예감하며 아시아의 사람들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이번 주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기획 연재 ‘아시아 시대의 사람들’은 앞서 출발한 또 다른 기획 연재 ‘뒤집어본 아시아’와 더불어 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함께 조망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쌍안경 노릇을 할 것이다. 새롭게 출발하는 두 기획물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풍성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기를 거듭 기대한다. 편집자 |

사진/ 유니스 라오(Eunice Lau) l 전 <스트레이츠타임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