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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테네에서 ‘코레아’ 외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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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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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월드컵 - 그리스

“그리스 이민 역사상 이런 날은 없었다”… 한국에 ‘축구강국’이라는 명예로운 이름표 붙어

사진/ 길거리 카페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한국 교민들.
“한국 사람이죠?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스페인과의 경기가 끝난 뒤 전혀 모르는 그리스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 내용이다. 그는 나에게 한국이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진출한 것을 축하한다면서 식사 초대를 해왔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다. 한국이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진출한 뒤 한국인으로서의 값어치가 갑자기 치솟은 느낌이었다. 이외에도 그리스인들의 축하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스인들의 축하전화

한국팀의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아테네의 작은 한국 교민사회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변했다. 한국팀이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을 연달아 격파해나가면서 현지 교민들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거리로 뛰쳐나갔다. 매번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교민들의 차량이 경적을 누르면서 아테네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한번도 ‘대한민국’을 마음껏 외쳐보지 못한 그리스의 한국 교민들은 한국팀이 경기에서 이길 때마다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모든 교민들이 한국팀의 선전에 신바람이 났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한인회 전 회장 한종엽 화백에게 한국팀의 승리가 주는 감회는 남다르다. 언어와 풍습이 특이한 그리스에서, 더구나 도움을 받을 만한 한국사람들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리스 땅에 뿌리를 내린 그는 이민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화가였던 그가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로 전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의 고뇌를 유추해볼 수 있다. 27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그는 한국 교민들이 한번도 제대로 기를 펴고 ‘코레아’를 외쳐본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 이민 역사상 한번도 이런 경사는 없었어요. 아테네 중심가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나의 조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더 이상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국팀이 계속 승리하면서 그는 축화전화 받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을 정도였다고.

한국-독일의 경기가 벌어지던 날 그는 한국 교민들이 입을 수십벌의 붉은 티셔츠를 자비로 마련했다. 응원장으로 가는 길에 그는 이날의 경기 결과에 대해 내내 조바심어린 마음을 드러냈다. “6·25에 독일 전차군단이라… 별로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하면서 혼자서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길거리 카페는 임시 응원장

사진/ 한국-독일전에서 한국팀이 패배할 기색이 짙자 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길거리 카페가 한국 교민들을 위한 임시 응원장으로 바뀌었다. 대형 스크린 맞은편 벽면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붉은 띠로 머리를 동여맨 교민들과 한국을 응원하기 위해 나온 그리스인들, 그리스의 모든 방송사에서 취재나온 TV 카메라들, 카 퍼레이드를 대비해 에스코트하기 위해 나온 경찰차 등, 한국이 꼭 이기기를 바라는 교민들과 그리스인들의 염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리랑이 합창되고 응원박수에다 구호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면서 응원은 열기를 더해갔다. 그러나 독일에 졌다. 경기 시작 전에는 독일에 이기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면서도 “막상 지고 나니까 마음이 안됐다”면서 한종엽 화백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응원하던 그리스 사람들도 모두 맥이 빠진 듯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경기 시작 때의 열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애국가는 교민들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이제 그리스 사람들은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전에 한국은 자동차나 전자제품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축구강국’이라는 유명상표가 하나 더 늘었다. 그러나 한종엽 화백은 “자랑스런 한국인이 진정으로 자랑스러워질 수 있고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질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바로 민족통일”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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