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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일간 새로운 역사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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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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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월드컵 - 일본

도쿄 시내 곳곳을 점령한 붉은 물결… 일본인들도 ‘아시아의 붉은 호랑이’에 환호

사진/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자 재일동포 응원단이 응원구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다. 한국의 승리에 일본인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교토연합)
타향에서 별탈 없이 잘살아가려면 기쁠 때일수록 표정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한국과 이탈리아전처럼 한국은 이기고 일본은 졌을 때, 표정관리는 정말이지 필수다. “어떻게, 운이 좋았지요.” 가족들을 껴안고 난리를 피운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그 같은 대사를 중얼거려보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9시 첫 수업. 학생들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어제 한국전 봤어요?” 그러자 30여명의 학생들이 “네!” 하고 외치며 일제히 큰 박수를 쳐주었다. 의외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려니까 열혈파 학생들이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몇번이나 외쳤다. 어제의 시합이 이들에게 무척이나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메일이 와 있었다. 예전에 나에게 한국어를 배운 적이 있는 일본인 소방대원 아저씨에게서 온 것이었다. 길고 긴 이탈리아전을 보고 난 뒤 눈물이 흘렸다는 내용이었다. 서툰 한국어였지만 글 속의 감동만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참을 수 없는 감격을 전달할 한국사람으로 내가 떠올랐던 것 같다.


심판 문제에서도 한국 편

뒤늦게 그날치 <아사히신문>을 전철 안에서 펼쳐들었다. 시청 앞에 모인 붉은 물결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 대목에선 나 역시 가슴이 짠해졌다. 물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날 내가 만난 한국사람들은 모두 “한국에 가고 싶다”는 얘길 했다. 젊은 후배는 자기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며 머리를 뒤흔들었다. 시청 앞 그 환희의 물결이 주는 향수는 이방인에게는 정말 가슴 아린 것이었다.

아이들의 경우는 또 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딸아이는 이탈리아전이 있던 날, 자기 앞자리의 일본 친구가 토티의 유니폼을 입고 왔다며 이탈리아전을 보는 동안 내내 투덜댔다. 다음날 그 친구는 딸아이에게 “이치오 오메데도”(일단 축하해)라고 했단다. ‘일단’이란 말이 거기 왜 붙냐고 역시 투덜댄다. 이치오 오메데도. 어쩌면 그게 진짜 일본사람들의 속마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스페인까지 이길 줄 누군들 예상했으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 이수현씨가 철로에 떨어진 일본사람을 구하려다 변을 당했던 신오쿠보는 도쿄 안의 작은 코리아타운이다. 역에 내리자 여기저기 넘실대는 붉은 물결. 붉은 티를 입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주고받는 인사는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이다. 밤 12시 신주쿠역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대한민국을 외치는 큰 대열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붉은 물결 일색이 아니었다. 푸른 유니폼을 입은 일본 서포터들과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응원단이 뒤섞여 외치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닛폰 짝짝”을 번갈아 함께 외치는 모습은 마치 붉고 푸른 태극문양이 어우러져 춤추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식민지 시절 이곳을 숨죽이며 지나다녔을 옛 사람들, 혹시나 차별받을까 자신의 한국이름을 감추고 살아왔던 재일동포들. 이렇듯 크게 조국의 이름을 통쾌하게, 일본 젊은 벗들의 축복을 받아가면서 외쳐부르는 게 과연 얼마 만일지. 2·8독립선언 이후 처음은 아니었을지.

일본 신문들의 태도도 16강전이 달랐고 8강전, 4강전이 달랐다. 함께 16강에 진출했을 때까지만 해도 일간지 중앙 컬러판 스포츠면은 늘 일본 관련 기사 일색이었다. 한국 관련 기사를 보려면 가운데에서 한장 앞쪽 흑백 지면을 펼쳐야만 했다. 한국의 이탈리아전에 관해 일본 신문의 지면은 다소 인색했다. 일본이 앞서 터키에 패했기 때문이다. 이어진 한국의 스페인전 승리 때 처음으로 한국 관련 기사들이 스포츠면 중앙을 차지했고, 정치면과 사회면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안정환의 사진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일본의 모든 신문은 한국의 탈락을 아쉬워하는 한편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사회면 머릿기사 제목은 ‘붉은 호랑이’(赤虎). 휴대폰의 액정화면을 불빛신호 삼아 응원하는 붉은 응원단의 사진과 함께 한국은 이제 아시아의 ‘붉은 호랑이’가 된 것이다.

심판문제가 불거져나왔을 때도 일본의 언론들은 대체로 한국 편을 들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불만은 이탈리아 프로리그 방식과 월드컵 운영방식을 혼동한 데 있다고 했고, 독일전을 앞두고 심판을 모두 유럽계로 바꾼 것을 두고도 유럽중심적인 운영체제라고 일침을 놓았다. 일본 TBS 텔레비전 <뉴스23>의 앵커는 만일 아시아가 심판문제를 제기했다면 다음 게임에서 아시아 심판으로 바꿔줄 거냐고 비난했다.

“안정환 머리는 낡은 감 있어”

한국전을 방영한 텔레비전에선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우 윤선아가 경기마다 등장해 한국의 경기장 풍경과 관광지, 음식점 등을 소개했다. 결혼반지에 입맞춤을 하는 안정환 역시 집중 취재대상이다. 그래서 이제 일본의 웬만한 사람들이면 그가 미스코리아 출신의 부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독일전 후반에 그가 등장하자 일본의 해설자는 “다시 결혼반지에 입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멘트를 내보내기도 했다.

안정환의 헤어스타일도 문제가 되었다. 영국의 베컴, 브라질의 호나우두, 일본의 도다의 헤어스타일과 안정환의 헤어스타일을 비교하면서, 안정환의 파마머리는 가운데만 날렵하게 세우거나, 앞머리만 남기고 빡빡 미는 스타일과는 달리 좀 낡은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저씨 파마 스타일’이라느니, “머리카락이 많아 머리가 커보이니 색을 좀 밝게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둥 주문도 많다.

베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이제 일본사람들은 한국선수 한두명의 이름은 외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일본 J리그에서 뛰고 있는 황선홍·유상철 등이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기도 한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는 6천여명의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한국-독일전 중계를 보며 빗속에서 응원하는 이색적인 행사도 열렸다. 그곳에 참석했던 일본의 한 젊은 교수는 “이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일간에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월드컵 공동개최는 너무나 잘된 것”이라면서 “그 붉은 역동이 너무도 부럽다”고 했다.

도쿄=신명직 통신원 mjshin5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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