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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탈리아는 ‘과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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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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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패배 이후 보인 과잉반응…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전가하는 언론의 속셈

사진/ 경기가 끝난 뒤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탈리아 축구팬. 경기 이전까지 이탈리아인들은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AP 연합)
이탈리아 언론은 지금 고집스런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들은 한국과의 경기 결과를 연일 “패배가 아닌 도난”이라 외치고 있다. 한국전이 있기 며칠 전부터 이탈리아 TV는 종일 한국의 경기 장면을 분석하며 급격히 성장한 한국축구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은 게임이 될 것이라는 예측일 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토록 자신한 게임에서 어처구니없이 졌으니 축구강국으로서 이만저만 자존심이 상한 게 아니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16강 진출이 확정된 포르투갈전까지 로마 테르미니역에서는 열띤 응원을 하는 한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삼성에서 제공한 대형TV 앞에 자리잡은 유학생과 배낭여행객들 중에는 일부러 붉은색 상의를 입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언론이 폭력을 부추긴다


지난 우승팀 프랑스의 탈락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포르투갈 등 축구강국들의 잇단 패배는 이탈리아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유럽축구의 자존심 문제도 있겠지만 강력한 라이벌들이 하나둘 알아서 떨어져나갔으니 내심 우승까지 기대한 것이다. 환호하는 한국인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면서 동시에 다음 경기의 패배를 위로하는 그들의 자신감 앞에서 “우리도 잘한다. 어쩌면 당신들을 이길 수도 있다”라고 말해봤자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강호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며칠 앞두고 현지 유학생과 교민들은 경기의 승리를 염원하는 만큼 우리가 이겼을 경우 감당해야 할 살벌한 분위기를 우려했다. 각자 집에서 TV를 시청하거나 여행자들은 숙소에서 조용히 응원을 해야만 했다. 붉은 티셔츠에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재미는 포르투갈을 끝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한테 이번 경기의 결과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6월20일치 이탈리아 주요 일간지는 온통 모레노 심판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사로 도배를 했다. TV를 비롯한 주요 언론매체들은 에콰도르 심판 모레노의 판정을 틀림없는 오판이라고 보도했다. 그것도 실수가 아닌 모종의 계략에 의한 부정판정이라고 추측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은 이미 폭죽을 준비해놓고 있었다는 친절한 설명으로 그럴듯하게 앞뒤를 맞춘다. 세네갈과 더불어 2002 월드컵 최고의 다크호스인 한국대표팀의 체력에 대해서도 도핑 테스트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며 실력으로 제대로 이긴 경기가 아님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경기 직후 트라파토니 감독과 통화한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은 “잘 싸워주었다. 우리뿐 아니라 온 세계가 경기를 지켜보았다. 우리 선수들은 고개를 들고 당당히 돌아와야 한다”고 말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탐파>는 “분노가 지배하는 순간이라서도 아니고 탈락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어서도 아니다”고 논하며 “부질없는 행동으로 우리를 집으로 보낸 안정환은 내일부터 팀을 잃을 것”이라고 해 페루자 구단주의 안정환 방출 발언에 박수를 보냈다.

애초 월드컵이 아시아에서 개최된 것부터가 잘못이라며 흥분하는 그들은 또한, 2002 월드컵은 최악의 대회로 기록될 것이라며 국제축구연맹(FIFA)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1966년의 기적을 재연하자”는 캐치프레이즈 역시 문제삼고 있다. 세계인이 놀라는 혼연일체의 응원전을 “FIFA가 내건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난한 이탈리아 스포츠의 최고기구인 올림픽위원회의 페트루치 회장은 정식으로 항의문을 제출했다고 한다. “축구의 종말이고 이미 쓰여진 조작극이다”라는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언론은 분명히 시민들을 부추기고 있다. 경기가 끝나자 극도의 스트레스로 응급구조 센터에 고통을 호소하는 전화가 빗발쳤다는 기사도 있었다. 격분한 이탈리아인들이 한국 대사관 출입문을 걷어차고 흔들어댔다는 소식과 함께 한국 식품점이 계란 세례를 받고, 테르미니역에서 응원하던 18명의 한국인들이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경찰의 보호 속에서 역 밖으로 나가는 한국인들에게 쫓아가면서까지 폭언을 퍼부었다는 기사를 보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것은 앞으로 혹시 있을지 모를 불행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음모

사진/ 오프사이드 판정이 부정하다며 분노하는 이탈리아의 트라파토니 감독. 경기 이후 이탈리아의 모든 언론들은 패배의 원인을 심판인 모레노에게 돌렸다.(AP 연합)
그러나 시민들을 부추기는 언론과 대조적으로 피부로 느끼는 거리의 반응은 견딜 만하다. 실제로 결과에 대해 인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심판 판정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트라파토니 감독의 전략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게 일고 있다. 한국을 얕잡아보고 브라질과 싸우듯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며 안일한 정신상태를 꼬집기도 하고, 소수의 시민은 선수들의 지나치게 높은 연봉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며 한번쯤 호되게 당해볼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쯤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필요가 있다. 여론을 부추기는 언론보도는 분명히 지나치다. 축구강국 이탈리아가 듣도 보도 못한 동양팀(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럽인들은 한국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에 패배한 사실은 분명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다. 자국의 축구경기에서도 기차 레일 위에 드러눕거나 기차를 부숴버릴 정도로 흥분하는 그들이니 이번 패배의 실망과 충격이 어떨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8강 진출을 확신하던 그들이기에 결과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고 언론의 과격한 문장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아니 언론이 이번 경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광분하는 이유를 단순히 그들의 광적인 축구 사랑으로 이해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강력한 비난으로 시민들을 부추기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배후에는 정치가 베를루스코니가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의 최대 미디어재벌이자 스포츠재벌로 이번 사태에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비난과 혹평으로 일관하는 언론과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탈세와 부패, 범죄조직 연루 혐의로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집권 255일 만에 사임했던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소유한 매스컴의 파워를 교묘히 이용해 6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러한 전력은 이번 사태에도 유감 없이 발휘되어 다시 한번 이탈리아 반도를 광분으로 몰아넣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금 커다란 과녁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발빠른 베를루스코니는 일단 비난의 화살을 피하는 방법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탈리아 국민이 움켜쥔 화살을 받아낼 과녁은 모레노를 중심으로 ‘꼬레아’와 FIFA가 당첨됐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실제 적지 않은 이탈리아인이 한국이 FIFA에 검은 돈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기다렸다는 듯 FIFA와 한국을 몰아세운 이탈리아 언론 덕분에 치욕스런 결과에 대한 분노는 고스란히 월드컵 개최국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정리해고제 합법화와 외국인 유학생

사진/ 골든골을 넣고 환호하는 안정환 선수. 페루자 구단주는 안정환을 방출하겠다며 극언을 퍼부었으나 이튿날 그의 아들은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한 듯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한겨레)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단순히 비난의 화살 앞에 그럴듯한 과녁을 제시한 것일 뿐인가. 정리해고제 합법화를 추진 중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왔다. 실제 지난 3월부터 까다로워진 체류허가 문제로 많은 유학생들이 적지 않은 불편을 겪고 있기도 하다.

정리해고제가 국회에서 통과되기란 쉽지 않다. 야당의 반대가 첫 번째 걸림돌이고 그 뒤엔 유권자들이 버티고 있다. 이번 월드컵 사태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다시없는 기회일 수 있다. 안정환은 이탈리아에 적을 둔 외국인 선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안정환의 골든골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계획에 윤활유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일 오후 5시. 로마에 도착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토마토 세례 대신 꽃다발을 안았다.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패하고도 당당히 돌아올 수 있었던 그들은 오랫동안 언론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로마=박혜윤/ 자유기고가 anywhereyo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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