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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뉴스에서도 골 장면 못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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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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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경기는 어디서 봐야 하나”… 독일 월드컵 중계권 따낸 키르흐사의 횡포와 부도 위기

사진/ 베를린 소니센터에서 브라질 대 잉글랜드전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베를린 시민들. 지상파가 중계하지 못하는 경기는 유료방송이나 대형 화면을 통해 볼 수 밖에 없다. (강정수)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 진출을 이뤄낸 순간, 독일에 머무는 한국인들은 승리의 벅찬 감동 속에서도 걱정을 나누어야 했다. “다음 스페인과의 경기는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거야?” 조별예선 한국 대 미국전을 독일 방송에서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걱정은 더해갔다. 결국 수요일이 되어서야 모두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독일 제1공영방송이 한국·스페인전 방영권을 가까스로 따낸 것이다.

이번 월드컵의 백미인 브라질과 영국의 경기 또한 독일 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다. 축구 사랑이라면 유럽의 어느 나라 못지않은 독일에서 하루에 한 경기만 중계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웃나라 프랑스·벨기에·폴란드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전 경기를 볼 수 있는 반면, 매달 약 2만원의 공영방송 시청료를 지불하는 독일 시청자들은 월드컵 총 64개의 경기 중 단지 24개의 경기 중계방송에 만족해야만 하는 처지다.

독일 공영방송의 기발한 아이디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별도의 수신기를 설치하고 요금을 지불해야 볼 수 있는 유료방송(Pay-TV)에서는 월드컵 전 경기를 시청할 수 있다. 이 유료방송사를 소유하고 있는 독일 기업 키르흐 미디어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약 1조원(9억유로)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지불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 중계권을 사들였다. 키르흐는 이를 각국 방송사에 되파는 방식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회사가 독일에서 유료방송 자회사의 고객 확보를 위해 전통적으로 월드컵을 중계해온 2개의 공영방송사들에 중계권을 팔지 않으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공영방송사들은 독일연방 총리까지 개입한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24개 경기의 중계권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것도 약 1310억원(1억1500만유로)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쏟아부으면서. 반쪽짜리 월드컵 경기 중계를 위해 전 세계 중계료의 9분의 1 이상을 독일 공영방송이 홀로 지불한 셈이다.

한·일 월드컵이 시작되자 방송권 중계를 둘러싼 문제는 더욱 복잡해져갔다. 3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취재단을 한국과 일본에 파견한 독일 공영방송들은 뉴스시간에도 방송권을 가진 24개 경기를 제외하고는 득점장면마저도 내보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독일 제2공영방송은 자체 월드컵 스튜디오를 베를린 소니센터에 설치했다. 마침 소니센터에는 월드컵 전 경기를 중계하는 유료방송사의 대형 화면이 설치되어 사람들이 모여서 경기를 관람했다. 제2공영방송은 방영권이 없는 경기의 경우, 골이 터져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면 “밖에 무슨 일이 있어 났는지 알아볼까요?” 하면서 카메라로 슬쩍 대형 화면에서 재생되는 득점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도나면 2라운드 볼 수 있나

이렇게 조별 경기 중계를 간신히 때우고 있던 공영방송들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키르흐가 6월 들어서 최종 부도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내용이다. 키르흐는 월드컵 및 각종 스포츠 경기의 독점중계권을 사들이며 거액의 은행빚을 졌고, 이로 인해 올해 초 이미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최종 부도란 지금까지 맺은 독일 방송사들과의 방송 중계 계약이 백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원은 남은 경기의 중계권을 자산 보존을 위해 다른 방송사에 재판매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지불한 막대한 돈을 날리는 것은 물론 16강 경기부터 방송 중계를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독일 공영방송사 경영진들을 흥분시킨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독일 정치권은 숨죽인 듯 이 문제에 거리를 두었다. 키르흐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대출해준 은행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정부 은행이었고, 결국 국가 재정이 돌고 돌아 자기 살을 뜯어먹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번 한·일 월드컵 중계부터 부분적으로 시작된 디지털 송·수신 방식이 2006년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부터 전면적으로 적용된다고 한다. 암호로 처리된 전파는 중계료를 지불한 각국의 방송사만이 해독할 수 있게 된다. 이로서 월드컵이라는 지구촌 축제는 더욱더 ‘지적재산권 보호’라는 통제의 손아귀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불법’으로 중계한 북한마저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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