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와 홍세화, 유럽 톨레랑스의 위선과 한국사회의 반톨레랑스를 이야기하다
홍세화 유럽에서 집권세력이었던 사민주의 세력이 계속 엎어지고 있습니다. 톨레랑스에서는 네덜란드가 프랑스보다 훨씬 앞선 나라로 알고 있는데, 네덜란드마저 5월선거에서 우파가 득세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유럽의 우경화 흐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서유럽 내지 북유럽의 톨레랑스가 결국은 자국민에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노르웨이도 우파가 잡았죠? 이름은 진보당이던데….
유럽의 우경화와 ‘당당한 왼쪽’의 부상
박노자 네 진보당. (웃음) 기만술이 보통이 아닌 당이지요. 노르웨이도 그렇지만 덴마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이미 극우파가 연립내각의 일부가 되어 극단적인 반이민자 정책을 펴고 있거든요. 언론도 아주 심합니다. 이민자가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이민자라는 걸 꼭 명시하고, 그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식으로 논조를 풀어나가고 있지요. 덴마크의 좌익들은 ‘파쇼화’를 걱정할 정도입니다. 사실 노르웨이는 석유가 나는 부자국가라 그런지 아직은 덜합니다. 여러 복지망을 허물기는커녕 오히려 학생들의 대중교통 요금을 내린다든가 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는 터라,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유럽 복지국가의 멸망’은 빈말처럼 들립니다.
홍세화 영국과 독일과 비교해보면 조스팽 정권이 그런 대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저항을 했다고 평가하거든요. 그런데도 이번 총선에서 패배하였는데…. 그렇다면 왜 양극 지지현상이 나타났는가, 다시 말해 극우파인 르펜이 올라가고 반대편에선 또 트로츠키파가 11%까지 득표를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노자 노르웨이의 경우도 아주 비슷한 그림입니다. 중도좌익인 노동당의 지지율이 그 ‘이상한 진보당’보다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지금 진보당 지지율이 25%인데 노동당의 지지율이 18%입니다. 노동당이 사실상 몰락해가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는데, 반면 이른바 신좌익으로 불리는 사회주의좌익당이 급부상하면서 노동당 지지율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투표권이 있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나 대학생들을 보면, 사회주의좌익당 지지율이 약 50% 됩니다. 관료화된 주류 좌익보다는 ‘당당한 왼쪽’을 지지하겠다는 거죠. 이런 신세력들이 자라서 전체 유럽공간에서 좀 네오케인스적인 정책(공공부문에 대한 국가개입과 사회투자를 확대하는 정책)을 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봅니다.
홍세화 저도 처음에는 이번 프랑스 총선에서 좌우동거를 예상했습니다만, 3분의 2를 우파가 먹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좌우동거가 되면 불만이 희석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마치 펄펄 끓는 냄비뚜껑을 덮어놓는 것처럼…. 저는 95년 총파업 상황을 자꾸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때 쥐페가 우파 수상이었는데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3주 동안 지하철과 버스가 한대도 움직이지 않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사민주의의 유효기간은 끝났는가
박노자 같은 생각입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거의 파시스트라고 할 만한 베를루스코니가 정권을 잡고 반노동 정책을 펴다 보니 노동의 결사적 반대에 부딪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결국 우익 세력의 독점이 왼쪽 세력의 연합을 불러오고 노동자의 자발적인 동원을 초래하는 셈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왼쪽 세력에서는 신바람이 불지 않을까 하는 거죠.
홍세화 이민자 문제로 넘어가보죠. 보수는 그렇다 치고 중도 좌익에서도 이민자에 그렇게 친근한 것은 아니거든요. 프랑스는 아직도 이주한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안 주고 있습니다. 트로츠키파나 녹색당이 그렇게 주장을 해도 주류 좌파인 사회당… 이럴 때는 좌파에 따옴표를 쳐야겠지요? (웃음) 하여간 사회당에 먹혀들지 않고 있어요.
박노자 노르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집권한 노동당 내에서 약간 왼쪽에 있는 사람들과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반대를 해도 결국 이민자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정책을 변함없이 펴고 있습니다.
홍세화 프랑스에는 ‘정신의 르펜화’라는 말을 씁니다. 우파인 시라크도 극우파인 르펜과 분명한 선을 긋고 있지만, 사회 구성원들은 좀 왔다갔다하죠. 그것을 사회당에서도 알기 때문에 무시하지 못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거지요.
박노자 노르웨이 유전(油田)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폴란드나 러시아계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노동조합 가입권한도 없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건 세계 경제지배 구조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르웨이 국부의 원천이 무엇이냐면 국영 석유기금이거든요. 이 석유기금이 제3세계 착취공장을 통해 투자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또 그 돈 중 상당부분이 미국의 군산복합체로 들어갑니다. 결국 노르웨이 안에서는 시민들 간에 평등하고 빈민층이 별로 없지만 전체 국가로서의 노르웨이는 사실 세계적 차원에서 하나의 착취자로서 기능한다는 말도 맞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세계 사회경제적 구조에서의 위치는 노르웨이 사회구성원으로 하여금 인종주의적 편견을 고수하게 하는 것이고요.
홍세화 프랑스의 경우에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니 하는 말이 나오면서 경쟁 시스템에 대한 위기감이 있거든요. 그런 속에서 투표권이 있는 시민층보다 아래쪽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 조금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걸 이용한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박노자 이를테면 ‘사회적 불안의 전가’라고 할 수 있겠죠.
홍세화 결국 지금까지 집권해온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에는 기대할 게 별로 없는 것일까요?
박노자 글쎄… 유럽에서는 사민주의의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홍세화 따옴표를 칠 필요 없는 좌익은 아직 약체니까… 그런 면에서 또 그 존재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계급의식보다 ‘벌’이 쏘는 사회
박노자 그래도 요즘 한국에서는 사민주의가 갓 화두가 됐는데, 제가 기대하는 것은 울산에서나마 한 자리라도 얻었으면 하는 겁니다.
홍세화 울산 얘기가 나왔으니 한국 상황으로 넘어가죠.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겠죠. 우리의 정치의식이 그렇지 못한 게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요.
박노자 한국을 보면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 너무 계급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분명히 한국의 사회구조에서는 노동자로서 잘살 수 없는 상황임에도, 노동자의 집단적 이익을 표방하는 정당에 표를 주는 행태를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홍세화 우리가 흔히 1400만 노동자라고 하는데 과연 그 중에서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사회가 교육·언론 문제에 주안점을 둬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유럽에서는 교육이나 언론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맞는 정치의식을 갖게끔 순작용을 하거든요. 여기서는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겠죠.
박노자 가령 울산에 사는 남성 노동자는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남아, 경상도 사나이로 생각하지요. 그 다음엔 누구누구의 친구로서 관계망을 떠올립니다. 그게 비극입니다. 사실 국가도 민족도 다른 관계망도 다 노동자라는 사실에 비해서는 허위의식 아니겠습니까?
홍세화 제가 우스갯소리로 “한국은 ‘벌’이 난무하는 사회”라고 말하곤 합니다. 학벌, 재벌, 족벌, 땅 지자 써서 지벌, 파벌…. 봉건성이 온존하는 셈인데, 결국 우리 사회가 유럽 여러 나라들이 근대성을 획득했던 부르주아 혁명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은 아닌가 하는 거지요. 여기다가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들이 연대의식이나 노동자의식을 억압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정규직이라면 자기 공장 안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 반 이하의 봉급을 받는 비정규직의 상황에 눈감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인간적으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보거든요. 근데 그런 것을 막는 것이 결국 장래에 대한 불안이 아닌가 하는 거죠.
박노자 맞습니다. 미래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과 온갖 ‘벌’로 뒤덮인 패거리의식이 하나가 되어 이 사회를 보수화하는 시멘트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민주언론과 민중교육이 이 문제를 푸는 첫 열쇠가 되겠군요.
홍세화 쉽지 않은 일이죠. 제가 평소에 하는 얘긴데, 그러니까 진보는 어차피 느리지 않은가 합니다. 하지만 달팽이도 걸어가는 걸 보면, 참 가는가 안 가는가 싶은데 꾸준히 가지 않습니까?
박노자 제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이 91년입니다. 그때와 지금의 한국은 천양지차입니다. 정말 다른 나라예요. (웃음) 그때는 제가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얘기했을 때 아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뭐랄까… 물구나무를 서면서 걷는 거하고 똑같이 생각했다고 보면 맞습니다.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진보운동의 분열이 안타깝다
홍세화 그렇지만 아직은 역시 소수에 지나지 않은가 싶어요. 지역주의 문제도 조금 해소됐다고 하지만, 여전하거든요. 이것 역시 ‘벌’과 관련되는 건데,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톨레랑스는 너무 먼 얘기가 아닌가 하는 거죠.
박노자 톨레랑스라는 건 세계의 전체 관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사회의 산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진보사회에서도 나이 한두살 갖고 위아래를 구분하는 게 한국의 현실 아닙니까.
홍세화 집단 속에 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박노자 제가 몸으로 체험한 것이지만,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한국의 학자세계는 뭉쳐서 사는 게 가장 지독한 집단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보면 18세기죠. 아마 그때 유럽 대학이 그랬을 겁니다.
홍세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진보운동 사회의 인간관계도 조금 톨레랑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너무 부정의 관계에만 익숙한 것이 아닌가. 왜 이런 말을 꺼내냐 하면, 얼마 되지도 않은 진보세력이 왜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으로 나뉘는가를 이해해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박노자 일제 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파시즘의 힘을 하나로 계속 키워나갔는데, 일본이나 조선,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념과 인맥으로 계속 나눠지지 않았습니까. 지금 두 진보정당의 관계를 보면 1920년대를 방불케 하는 요소가 있어요.
홍세화 역사학자로서 두 정당 분들에게 뭐라고 충고를 좀 해주세요.
박노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 느낌 하나는 너무 인맥관계가 중요시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이념관계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 뒤에 숨어 있는 것은 80년대부터 내려온 ‘벌’관계가 아닐까요?
홍세화 맞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집단주의와 관련된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붉은악마’는 어떨까요. 한창 난리인데 어떻게 보셨어요?
박노자 제가 한국에 온 날이 6월10일이었습니다. 한-미전이 있는 날이었죠. 버스를 타고 세종로를 지나면서 응원하는 걸 보았는데…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대회를 연상했습니다. 다행히 여기서는 통제가 잘돼서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모스크바 같으면 사람들 많이 죽었을 겁니다. 집단적인 열기에 무섬증이 느껴졌습니다.
홍세화 국내에서는 다른 시각도 있는 것 같아요. ‘Be the Reds’를 직역하면 “빨갱이가 되자”거든요. (웃음) 이게 참 양면적인데 묘한 느낌이 개인적으로 들었어요. 인터넷을 통해 모임이 이루어지고, 또 끝나고 나서 깨끗하게 정리하는 자율성과 자발성 같은 게 보이거든요.
박노자 네, 그건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배타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남한테 피해주지는 않지요
홍세화 월드컵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젊은 문화를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또 자율적이고 건강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는 거죠.
히딩크와 이주노동자의 상징성
박노자 제가 한국 역사학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붉은악마’의 응원열기는 이른바 ‘상상의 민족공동체’를 조금 더 높은 단계로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거지요. 먼저 히딩크라는 영웅이 한국사람들과는 피부색이 다르지 않습니까. 또한 붉은악마 사이에는 지역색이 없지 않습니까. 광적인 배타주의도 없고요. 이건 더욱 성숙되고 열린 민족주의로 가는 거지요. 그리고 안정환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골 넣고 난 다음에 결혼반지에 입맞춤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한테 감사 보낸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자랑스럽다는 얘기도 안 했고…. 한국 민족주의에 개인주의적 요소도 포함돼 간다는 논리였어요, 글쎄…. (웃음) 이렇게 보면 한국 민족주의의 발전에 긍정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계급의식 성장에는 부정적이지 않은가… 너무 국가와 민족을 강조하다 보면 계급의식이 더 희미해지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홍세화 저는 좀 유보한 상태예요. 박 교수께선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에 담긴 허위의식들을 지적하셨습니다만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경제력 있는 백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딴판이지 않습니까. 히딩크만 해도….
박노자 그렇죠. 히딩크의 위치와 이주노동자의 위치는 이른바 한국 민족주의의 대외의식을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홍세화 박 교수께서 특히 이주노동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여러 노력도 하는데… 경기도 일산에서 NGO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 자신이 이주노동자였던 처지라….
박노자 저도 노르웨이에서 이주노동자입니다. (웃음)
홍세화 이주노동자의 처우랄까,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갖추게 하는 일은 한국사회 시민의식의 성장과 그 진도가 똑같다고 봅니다.
박노자 유럽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를 보면 그 나라의 성숙도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이주노동자를 가장 심하게 다루는 나라인 이스라엘·그리스·스페인의 경우 그 나라 민족주의의가 낮은 단계라는 것을 보여주지요. 특히 이스라엘은 한국보다 훨씬 가혹합니다.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하는 건 그렇다 치고, 타이·루마니아 노동자나 러시아 매춘녀 같은 경우는 거의 노예화된 상태입니다. 러시아 매춘여성 문제가 가장 심각한데, 고등학생까지 이용할 수 있는 대량 성상품이 됐다고 합니다.
홍세화 이제 정리를 해보죠. 월드컵 열기를 겪으면서 드는 생각을 말씀드리면, 한국과 중국, 일본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화에 우등생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엔 어린이들이 꿰맨 축구공으로만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동아시아의 한·중·일 3국에서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대한 기대나 전망을 할 수 있을까요?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
박노자 저 같은 경우는 단기적으로 약간 비관을 해도 장기적으로는 낙관을 합니다. 한국에서도 장기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인권이 신장해가는 추세이고요. 박정희가 써먹은 일제시대의 발전모델이 상당부분 지양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지금 물밑에서 민주주의, 인권의식이 자라고 있고요. 아직까지는 표면에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하나도 보도가 안 되지만, 중국의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엄청나게 발전했어요. 파업도 상당히 많고…. 거기서는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말해, 크게 봐서는 유럽에서 좀더 왼쪽에 있는 사람들, 이른바 비주류 좌익들이 어느 정도 반세계화 운동의 흐름을 타고 네오케인스적인 정책을 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보일 수 있다면 동아시아에서도 분명히 그 길로 갈 수 있는 역동성과 힘이 있지 않을까… 장기적으로 보면 낙관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세화 저도 낙관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람시의 말을 좋아하는데, 이런 게 있어요.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
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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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프랑스의 톨레랑스를 한국사회에 처음 소개한 책이었다면,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사회의 척박한 톨레랑스를 맹렬히 질타한 책이라 할 만하다. 두 책의 저자인 홍세화 <한겨레> 편집위원과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가 만났다. 서울대에서 열리는 ‘환태평양 한국학 학술대회’(6월18∼20일) 참석차 잠시 귀국한 박노자 교수는 오는 6월25일 한국의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아시아의 친구들’(Friends of Asia)이라는 국제 비정부기구(NGO)를 창립한다. 베스트셀러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인세를 재원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이 NGO는 이주노동자 한글학당을 축으로 한 국제교류와 다양한 시민활동으로 한국사회에 다문화주의의 씨앗을 뿌릴 계획이다. 더불어 2000년 가을부터 <한겨레21>에 연재한 ‘북유럽탐험’을 모아 사회비평집 <좌우는 있되 위아래는 없다>를 출간한다. 2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한겨레>와 인연을 맺은 뒤 ‘왜냐면’을 통해 새로운 토론문화를 일으키고 있는 홍세화 편집위원은 곧 새로운 사회비평집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가제)을 탈고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유럽 톨레랑스’의 이중잣대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 ‘붉은악마’ 논쟁으로 끝을 맺었다. 편집자 |

사진/ 박노자

사진/ 홍세화

사진/ '붉은악마'들의 광적인 응원열기에 무섬증을 느꼈다는 박노자 교수. 홍세화 위원은 자율적이고 건강한 새 문화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