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나잉옹의 고백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1965년 양곤 출신인 나잉옹은 맨달레이 의과대학을 마치고 벽촌 의사로 주민들을 돌보다가 1988년 9월18일 군사쿠데타 직전 버마-타이국경의 산악밀림으로 탈출했다. 그는 선배들의 대영국 반식민지투쟁에 빛났던 깃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재건하고, 1988년 이른바 ‘양곤의 봄’에 참여했던 학생과 시민을 조직해 군사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민주해방군을 이끌고 카렌과 몬을 비롯한 국경의 민족해방세력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한 이른바 버마민족민주동맹(NDF)의 한 중요한 축이 되어 버마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해 왔다. 현재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의장 겸 버마의 민주·민족해방세력들의 결집체인 버마연방민족회의(NCUB)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정치투쟁에 주력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지닌 정치적인 전망과 견해는 그가 일생동안 경험한 일들의 농축물이다.” 이 기본적인 명제를 떠올리며 늘 친숙한 <한겨레21>에 나의 고백을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물음’과 함께 삶을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제한된 자기 영역으로부터 뛰쳐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이들도 자기와 똑같이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안식처를 찾기 위한 대답들을 좇아 결국 사람들을 ‘물음의 강’에 함께 뛰어들어 함께 흘러가게 되고, 어떤 이들은 지치거나 가라앉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헤엄을 치기도 한다.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첫 번째 물음: 내 길지 않은 삶에서 가장 끈질긴 물음은 “왜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나”라는 것이다. 이 물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숙제다. 아홉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심하게 싸운 뒤, 나를 품에 안은 어머니가 이혼하겠다면서 흘리던 눈물이 내 얼굴을 적신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충격을 받았고 처음으로 가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큰 공포심으로 다가왔다. 이때부터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나도 죽게 될 것이고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사람이 얼마나 미물에 지나지 않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기댈 곳이나 안식처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느꼈다. 정직하게 말하면, 이런 생각의 사슬 안에서 아직도 나는 아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내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는 무엇인가?”
두 번째 물음: 그뒤 나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웃에 개인도서관을 가진 ‘책부자’ 할머니가 살았고, 그는 내가 책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제한없이 많은 책을 빌려주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유행했던 중국 무협지는 어린 나를 매료시켜 버렸다. 무협지 속에 등장하는 지적이고 용맹한 인물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남을 위해 희생해 가는 과정들이 마치 나의 신념처럼 내게 각인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독서가 안식을 주는 좋은 상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독서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넓게 보는 다행스런 버릇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물음을 하나 더 보탰다. “왜 교과서는 내가 바깥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지 않는가?”
세 번째 물음: 학교생활, 그게 성적을 말한다면 나는 분명 최고의 학생이었다. 모든 종류의 시험에서 나는 늘 가장 뛰어난 점수를 받았고 해마다 최고 학생으로 뽑혀 상을 휩쓸었다. 이건 부모님의 정열적인 지도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기억한다. 그럼에도 내겐 교육에 대한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8학년 때, 나는 버마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정부가 지원하는 여름캠프인 ‘루웨춘 프로그램’의 학교대표로 선발되었고, 다시 지역대표 경선에 출전했다.
이건 집권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이 전국의 인재들을 뽑아 당원으로 충원하던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마지막 경쟁자는 지역군사령관인 연대장의 아들이었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고 나는 패배했다. 당시 나는 내가 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심한 동요를 일으키며 수많은 의문 속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내가 모두 잘못되었단 말인가?”
의사의 이상형에 대한 끝없는 의문
네 번째 물음: 내가 어릴 적부터 늘 의사가 되기를 권했던 아버지는 물리학자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마에서 극존칭에 해당하는 사야(스승)라 불렸고, 나는 이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내 스스로도 의사가 되겠다고 너스레를 떨고 다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나는 수학과 물리학에 크게 재미를 붙였고 공과대학으로 진학하겠다는 뜻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 계획을 거부했고, 난생 처음 부모님과 심한 논쟁을 벌인 끝에 가출해 버렸다. 17살 때 일이었다. 얼마 뒤 어머니에게 붙들린 나는 어머니에게 설득당해 공과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가슴에 손을 얻고 “네가 의사가 되는 길만이 내가 늙어 병들었을 때 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건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이길 수 있는 버마식 설득법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나는 결국 어머니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무렵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추가되었다. “누가 누구를 선택하는가? 내 삶을 내가 선택하는가 혹은 내 삶이 나를 선택하는가?”
다섯 번째 물음: 대학 진학을 위한 최종 시험 결과 전국의 550등 상위권에 들었다는 사실도 내겐 의미가 없었고, 맥빠진 의과대학에 진학해서도 나는 의사가 되는 일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A학점 학생의 꼬리표는 이제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간판을 따기 위해 그저 재시험을 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열을 바쳐 공부할 까닭도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여학생 기숙사 주위를 맴돌았고 밤새도록 기타치며 노래나 불렀다. 시를 끼적이는 재미에 빠져 공부란 건 그저 시험이 가까워 오면 날치기로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러던 내게 고민의 시간이 다가왔다. 고통받는 환자들이 쪼그려 앉아 있는 병원 모퉁이에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간판용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 저 환자들의 생명이 나의 부족한 지식과 미숙한 경험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면….” 나는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였고, 이때부터 최선을 다해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돈만을 좇는 의사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갈등에 빠졌다. 의사들이 병원에서 무료로 지급하는 약을 빼돌리는 대신 가난한 노동자들이 바깥에서 약을 사서 병원에 들어오는 현실은 나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무렵 나는 또 하나의 충격을 받았다. 같은 의과대학을 다니던 한 친구의 모습은 나에게 삶의 긴장을 강요했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던 농부들인 그의 가족들과 우연히 마주친 순간 나는 정신없이 달아났다. 알고보니 그 친구는 야간엔 공사장 경비원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다. 그뒤 의사란 직업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스스로 의사의 이상형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오직 환자의 건강에 대해서만 물을 뿐 환자들에게 치료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의과대학생 가운데 유일한 환자가 되었다.
혁명전선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
여섯 번째 물음: 의과대학 졸업반 시절, 양군의 대학생들은 화폐개혁반대와 경제개혁을 내걸고 반정부 시위에 돌입했다. 정치적 집회는 불법화되었고, 나는 결국 아버지를 따라 카렌주의 몰메인으로 옮겨가 시골 벽지에 조그만 의원을 열었다. 당시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면허증을 받은 이들은 대개 정부 산하의 의료원에서 숙련기간을 거치기 위해 또다른 시험을 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는데, 버마식 사회주의체제 아래 정부 병원에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당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다. 내겐 이런 구조가 지성의 존엄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그런 그물망에서 벗어나 벽지에서 내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무렵 민주화와 인권을 외치는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여기서 나는 빛을 보았다. 이 빛은 군사독재로부터 자유를 찾는 일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존경하며 삶의 의미를 누려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해 절망하고 있던 젊은이들에 대한 희망의 빛이기도 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내 판단에 따라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혁명전선에 뛰어들었다. 돌이켜보면, 이전까지 나의 삶은 쉽게, 쉽게 현실을 따라 떠다니는 꼴이었다. 혁명전선에 뛰어들고부터, 혁명은 내가 지녔던 편리한 현실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스스로 내린 결정을 결코 후회해본 적이 없다. 비록 나의 길은 멀고 험할지라도 나는 나의 목적지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많은 물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어떤 미래 속에 내가 있을 것이며, 대답들을 찾아낼 수 있는 오솔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지닌 정치적인 전망과 견해는 그가 일생동안 경험한 일들의 농축물이다.” 이 기본적인 명제를 떠올리며 늘 친숙한 <한겨레21>에 나의 고백을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물음’과 함께 삶을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제한된 자기 영역으로부터 뛰쳐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이들도 자기와 똑같이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안식처를 찾기 위한 대답들을 좇아 결국 사람들을 ‘물음의 강’에 함께 뛰어들어 함께 흘러가게 되고, 어떤 이들은 지치거나 가라앉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헤엄을 치기도 한다.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사진/버마-타이 국경밀림의 버마학생민주전선 전사들.나잉옹은 이 조직의 수장으로서 한번도 자신의 길을 후회한 적이 없다)










